박시윤의 절터 기행[11]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

백탑으로 불리는 오층석탑만 덩그러니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9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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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원리오층석탑(국보 제39호)_ 나원리 오층석탑은 오래전부터 ‘나원백탑’으로 더 유명하다. 일반적인 회백색의 탑보다 유난히 흰빛을 띤다. 흰빛이 풍기는 순박함과 종교적 순결함, 또 흰빛이 주는 눈부심과 맑음은 인간 세계를 넘어 신(神)의 세계와 맞닿은 듯하다.

나원리 가는 길

경주의 동남쪽을 적시며 흐르는 형산강엔 어느새 가을이 서린 듯하다. 물의 기운이 일어서는 이른 아침, 강 언저리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물비린내가 제법이다. 모든 생명이 잠들고 깨어나는 동안 강은 쉬지 않고 흐르고 흘렀다. 여름 새가 한철을 살고 날아가면, 그 자리엔 또 어느 계절을 살기 위해 또 다른 새가 날아와 빈자리를 채우는 강.

형산강을 따라 달리다 어느 낯익은 마을 입구에 차를 세운다. 현곡면 나원리 마을 입구다. 여기서부터는 천천히 발품을 팔 참이다. 누구는 길이 좁아 차로 이동하기 불편하니 길부터 넓혀야 한다지만, 시골길을 걸어보는 자연이 주는 특별한 혜택을 누리는 것 같아 즐겁다. 입추가 지나면서 나락이 하나 둘 고개 숙이는 게 아닌가. 그러고 보니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안태봉(安胎峯·338m)이 자연스레 흘러내린 산기슭으로 접어든다. 안태봉은 신라 왕실의 태(胎)를 묻은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안태봉의 기운이 동남쪽으로 흘러내린 기슭에 탑이 있다는 걸 알고부터 부쩍 오게 된다.



경주의 오층석탑

이른 아침, 햇살을 정면으로 받으며 탑이 신성하게 빛난다. 짙푸른 나무 사이 흰빛의 무언가가 보인다. 의심할 겨를도 없이 탑이라는 것을 안다. 탑은 초록의 여름 숲이거나, 암갈색의 겨울 숲에서도 곱게, 환하게 제 모습을 다한다. 탑 아래 서면 고개부터 바짝 쳐들게 된다. 탑은 자신을 우러러보라는 것이 아닌, 세상살이에 풀 죽어 고개 숙인 사람들에게 당당히 고개 들고 살라며 용기를 주는 듯하다.

경주에는 탑이 흔하다. 대부분 삼층석탑이다. 그러나 보기 드물게 오층석탑이 있다. 토함산 동쪽 중턱에 있는 ‘장항리사 터 서오층석탑(국보 제236호)’과 현곡리 안태봉 아래 나원백탑으로 유명한 ‘나원리 오층석탑(국보 제39호)’, 그리고 일명 늠비봉 오층석탑으로 알려진 ‘남산 포석곡 제6사지 오층석탑(유형문화재 제555호)’이다.

↑↑ 나원리오층석탑 기단부는 몸돌과 지붕돌과는 다른 재질의 돌을 사용했다. 흰빛을 띠는 것과 다르게 회백색이며 오래된 세월에 청태와 이끼가 끼었다


나원 백탑으로 더 유명한 나원리 오층석탑

사람들은 장항리사 터 서오층석탑(국보 제236호)과 나원리 오층석탑을 서로 비교하곤 한다. 삼층석탑이 일반적인 경주에서는 보기 드문 오층석탑이기 때문일 것이다. 언뜻 보면 닮은 듯도 하지만 탑을 만든 돌의 재질, 빛깔, 몸돌에 새긴 문양 등에서 차이를 보인다. 장항리사 터 서오층석탑은 구리 함량이 높아 옅은 분홍빛을 띠는 경주석으로 다듬어졌다. 나원리 오층석탑은 유달리 흰빛을 띠는 화강암으로 두 탑은 빛깔이나 재질에서 이미 다름을 알 수 있다.

고선사 터 삼층석탑(국보 제38호)이나 감은사 터 삼층석탑(국보 제112호), 용장사 터 삼층석탑(국보 제186호), 불국사 삼층석탑(석가탑, 국보 제21호)을 보는 듯한 웅장함은 나 혼자만의 느낌일까. 비록 탑의 층수는 오층과 삼층으로 다르지만, 자태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한 인상은 같은 듯하다.

나원리 오층석탑은 오래전부터 ‘나원백탑’으로 더 유명하다. 일반적인 회백색의 탑보다 유난히 흰빛을 띤다. 이런 화강암이 흔하지도 않거니와 흰빛이 풍기는 순박함과 종교적 순결함, 또 흰빛이 주는 눈부심과 맑음은 인간 세계를 넘어 신(神)의 세계와 맞닿은 의식의 동경에서 그리 불리게 된 듯하다.

8세기 경 세웠을 것으로 추정되는 백탑은 천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청태나 이끼가 끼지 않았다. 남산의 돌로 만들었다는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남산에서 나원리까지 거대한 돌을 옮겨왔다고 한다면 ‘이 거대한 돌을 어떻게 옮겨왔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지만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한다.

기단석은 각 면마다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긴 것 외에는 어떠한 문양도 없다. 탑신부는 각 층 몸돌의 모서리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기고, 지붕돌은 경사면의 네 모서리에 예리한 각을 세웠다. 지붕돌 귀퉁이마다 처마처럼 하늘을 향해 살짝 쳐들게 해 상쾌한 모습을 보인다. 꼭대기인 상륜부에는 부서진 노반과 부러진 찰주가 남아있다.

안태봉 기슭에 9.7m 높이로 우뚝 솟은 탑은 웅장한 위엄과 순백의 청신한 기품으로 보는 이들을 감동케 한다.

↑↑ 다섯 개의 지붕돌이 조금도 틀어지지 않고 일직선을 이룬다.


무(無)와 백(白), 없는 것과 흰 것은 동일함을 뜻하는가?

금당은 어디에 있었을까. 백탑 3층 몸돌에서 국보급 사리장엄구가 나왔다. 금동으로 만든 사리함 바깥 면에 사천왕을 새겨 놓았다. 탑의 방위와 사천왕이 놓인 방위가 일치하도록 배치하여 안치한 것으로 보아 사리함을 안치할 때 상당한 불교식을 행한 듯하다. 사리함엔 황금으로 만든 불상과 3층 공양탑 1기, 9층 공양탑 3기, 사리 15과, 나무 공양탑 편(片) 다수와 구슬 4점 등이 들어 있었다. 또한 한지에 먹으로 쓴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일부분이 수습되었다.

보통은 탑신이나 탑의 주춧돌인 심초석에 사리장엄구를 안치한다. 그러나 나원리 오층석탑은 3층 지붕돌에 사리공을 만들어 안치했다. 후대에 도굴꾼이 들이닥칠 것을 예견이라도 한 걸까. 여러 차례 도굴범의 손을 탔지만 약간의 결실 외에는 거의 완벽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탑의 규모와 안치된 공양물만 봐도 상당한 규모의 사찰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금당 터조차 찾을 수 없다. 누구의 발원으로 어떻게 세워졌는지조차 확인되지 않으니, 백지상태인 나원리 절터는 그야말로 없는 것 즉 ‘무(無)’의 상태요, ‘백(白)’의 상태인 게다.



강산이 변해도 한국의 아름다움 품은 석탑은 변하지 않아

나원리 오층석탑은 찬란했던 신라 불교문화를 온몸으로 보여준다. 탑을 돌면서 마음을 다스리고 소원을 빌다 보면 어느새 인생 또한 돌고 도는 윤회의 과정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우리네 선조들의 삶과 애환이 깃든 석탑의 세계는 이미 불심 그 자체인 것이리라.

탑은 정남향을 향하고 있어 아침부터 오후까지 햇살이 아주 잘 든다. 실제 사찰이 존재했다면 부처님을 모신 금당도 정남향이 아니었을까. 사적은 무엇 한 줄 전하지 않지만, 어느 시대 누구의 발원으로 향을 피웠든 간에,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탑은 현재에도 존귀한 것이다. 거대하고 웅장한 탑을 세운 발원자는, 탑 옆에 띠풀 집을 짓고 부처님을 모셨던 걸까. 세월이 흘러 기둥 하나, 기와 한 장 남지 않도록 무(無)를 염원하면서 오로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탑을 경외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탑을 세우고 향화를 올리던 승려나 사람은 모두 세월 속으로 저물었지만, 탑은 이리도 굳건히 남아 지금 시대를 사는 누군가의 바람을 듣는다. 탑은 맑고 깨끗한 기도자들의 뜻을 하늘에 전하려는 불가의 기도처와도 같다. 큰 가람 속에 으레 서 있는 웅장한 탑이 아니라 소외된 곳에 우뚝 솟은 저 순백의 돌덩이에 누구는 숨결을 불어 넣고 누구는 생명을 주었을 것이다. 오랜 세월을 비바람 속에서 지내온 탑, 그러나 그 탑은 차갑지 아니하고 부처님의 참뜻과 훈기가 서려 있는 듯하다.

강산은 변했어도 탑은 변할 줄 모른다.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
면 추운 대로 오직 자연의 섭리와 불법의 가르침을 따라 오늘의 고행을 다르게 겪는다. 그리고 내일에 올 불심의 세계를 반겨 맞으며, 꽃피고 새우는 숲속에 홀로 서서 오는 이들을 반긴다. 그 환한 감동이 있기에 나는 기꺼이 새벽길을 달리는 것이다.



박시윤 답사기행에세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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