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운천서원과 운천향현사에 대하여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10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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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상욱 시민전문기자
경북고전번역연구원장
찰방(察訪) 농재(聾齋) 이언괄(李彦适,1494~1553)과 군수(郡守) 귀봉(龜峰) 권덕린(權德麟,1529~1573)을 배향한 운천향현사(雲泉鄕賢祠)는 임자년(壬子年,1732) 5월 경주 강동면 왕신리 운곡[운천]에 창건되었다. 앞서 건천 서면에 제향소가 있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여강이씨와 안동권씨의 관계 그리고 강동에 세거한 안동권씨 집안의 주장에 따르면, 운천향현사는 현재 왕신저수지에서 운곡서원 방향인 동쪽으로 접어들어 굽은 비탈길을 오르는 좌측의 어느 공간으로 일축된다. 

운곡서원의 입지와 후손이 세거한 강동면 국당마을 일대를 근거로, 건천에 향현사가 있었다는 주장은 근거로 삼기에 부족하고, ‘운곡’이라는 지명이 ‘운천’과 통용되는 점 등을 미뤄보면 운천향현사는 운곡서원 부근에 자리한 것이 타당할 것이다. 당시 경상감사는 조현명(趙顯命), 경주부윤은 김시형(金始炯.재임1730.11~1732.10) 그리고 이헌락(李憲洛,1718~1791)의 부친인 이신중(李愼中)이 일을 주도하였지만, 훗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최초에 묘우(廟宇)를 추원사(追遠祠)라 칭하고, 1785년에 묘우를 포함한 ‘운천서원’으로 이름하였다. 강당은 『시경』에서 의미를 취한 영보당(永報堂), 동재는 돈교재(敦敎齋), 서재는 잠심재(潛心齋), 외삼문은 견심문(見心門), 정자는 유연정(悠然亭), 돈대는 반월대(半月坮)라 하였고, 근래에 남쪽 바로 옆에 새롭게 건축하여 운곡서원이라 편액하였다.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1684~1747)이 상량문을,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鄰,1658~1737)이 봉안문을 각각 지었고,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1720~1799)은 제문에서 “즐거운 저 운천은 신령한 구역에 우뚝하네. 맑디맑은 폭포가 있어 용이 절경을 비호하고, 구름이 신령의 행차를 앞세워 강림하기에 마땅하네. 후손의 정성 실로 다함이 없고, 한목소리로 사당을 세우니 넓고 고요한 곳에 자리하였네(樂彼雲泉 靈區嵽嵲 有湫湛湛 龍護絶境 雲旗風馬 允宜臨況 後昆之誠 實無窮竟 同聲建宮 位置閎靚).”라며 운천의 공간에 대한 영험한 기운과 후손의 정성 등을 언급하였다.

여강이씨 이신중은 회재의 동생 이언괄의 후손 입장에서 향현사 건립에 참여하였고, 전주이씨 간옹(艮翁) 이헌경(李獻慶,1719~1791) 역시 외손의 입장에서 운천서원 강당 영보당 기문을 지어 그 내력을 전하였다. 이헌경은 어려서부터 문장에 재주가 있었고, 영정조년간 4대 문장가로 불렸다. 1743년에 진사에 급제해 정언․사서․지평 등을 지냈고, 1763년에 사간원사간이 되어 사헌부집의에 올랐으며, 이후 홍문관수찬, 동부승지, 대사간이 되었다.

단종의 충신 죽림(竹林) 권산해(權山海,1403~1456)의 후손인 갈산(葛山) 권종락(權宗洛1745~1819)은 이헌경을 스승으로 모셨고, 권종락이 후손에게 효를 진작시키기 위해 이헌경에게 『효경중간발(孝經重刊跋)』을 부탁하였다. “지금 새로이 배우는 후학들은 효경의 면목을 보지 못하니 실로 개탄스럽다. 점필재 선생께서 일찍이 선산부에서 효경을 간행하였고, 그 후에 흥해군에서 간행되었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졌다. 
경주 권구환(權龜煥),권종락(權宗洛) 두 사문이 오래전에 발행한 책을 구매하여 추원보본의 정성으로 사당에서 간행하여 널리 전하고, 후학을 깨우치려한 점이 매우 정성스럽다.”라고 칭송하였다. 권종락은 선대인 죽림공의 관직을 회복하는 지대한 노력을 한 인물이다.


영보당기(永報堂記) - 간옹 이헌경

사람이 시조(始祖)에게 제사지내는 것은 정자가례(程子家禮)에 ‘동지(冬至)에 시조에게 제사지낸다.’에서 비롯되었다. 또 하물며 공덕이 이 백성에게 있고, 혜택이 후세에 미치는 경우 나라의 사전(祀典)에 실어서 보답하였으니, 자손이 보답함은 더욱 마땅히 어떠하겠는가? 안동권씨의 시조는 고려 태사공이다.


그렇다면 동도에 사당을 세우는 것이 어떠한가? 동도에 사당을 세움은 곧 효도를 다하는 이유이고, 효도는 보답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실로 선대의 뜻을 계승하고, 선대의 신령을 위로할 수 있다면, 우리가 어찌 감히 힘쓰지 않겠는가.”라 말하였고, 이에 동도의 운곡에 사당을 세웠다. 곧이어 “누구를 공과 함께 배향해 흠향할 것인가?”라 하니, 모두가 “자손으로 그 음덕을 입은 수효가 천억이요, 명현(名賢)과 공경(公卿)을 다 이를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동도의 사람으로 높은 산처럼 추앙받는 이로는 죽림 권산해와 귀봉 권덕린 두 선생같은 이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동도에 사당을 세우고 마땅히 경주의 여망(輿望)을 쫓아, 드디어 두 선생을 함께 배향하였다. 

이윽고 제례를 마치고 음복하는 장소를 영보당(永報堂)이라 하였다. 서울로 사람을 보내어 완산(完山) 이헌경에게 “그대가 또한 우리 시조의 외손이니, 기문을 지을 만하다.”고 말하니, 이헌경은 “그러겠습니다.”라고 공경히 응하였다. … 『시경』「소아․곡풍지습(谷風之什)」에 “은덕을 갚으려 해도 하늘처럼 끝이 없네(欲報之德 昊天罔極).”라고 하였으니, 이는 부모의 은덕이 갚기 어렵기가 이와 같고, 나의 말도 이와 같다. 부모의 말씀도 또한 이와 같으니, 위로 거슬러 올라가서 시조에까지 이르도록 그 말을 이와 같지 않음이 없는 것은 그 시조가 또한 부모의 부모이기 때문이다. 무릇 부모의 마음은 한가지이니 시조에게 제사를 드려 보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시경』「대아․기취(旣醉)」에 “효자의 효도 다함이 없는지라 영원히 복을 받으리라(孝子不匱 永錫爾類).”라고 하였으니, 권씨의 복을 가히 헤아릴 만 하다.

을사년(1785) 음력 9월 상순 … 이헌경 삼가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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