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위해 목숨 던진 열부와 어머니 정성으로 모신 효자 이야기

광명동 소재 2개 비각 ‘관리 손길’ 절실

이상욱 기자 / 2024년 07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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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가 지난 1992년부터 ‘孝子, 烈女碑(효자 열녀비)’를 제목으로 연재한 고 함종혁(咸鍾赫: 1935~1997) 선생의 기사를 토대로 그 현장을 다시 찾아 점검한다. 함 선생은 1963년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경주에 부임해 경주의 문화재를 알리는데 주력했다. 함종혁 선생이 본지를 통해 전했던 경주지역의 효자, 열녀 이야기를 재편성해 선조들의 충효사상을 되새겨본다. 그리고 현재 효자·열녀비에 대한 관리 상황도 함께 점검해본다 /편집자주

↑↑ 경주시 건천읍 용명리 소재 효열의인광주노씨정려비.


남편의 명(命)을 대신한 열부(烈婦), 효열의인광주노씨정려비(孝烈宜人光州盧氏旌閭碑)

경주시 건천읍 용명리 1762-2번지에는 1980년대 새로이 단장한 한옥구조의 효열각이 있다. 이 비각이 바로 효열의인광주노씨정려비(孝烈宜人光州盧氏旌閭碑)다.

동경통지에 따르면 노씨는 파평 윤두환의 처로, 나이 40세가 넘도록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여자가 남의 집안에 들어가 대를 이어주지 못하는 것을 큰 죄로 생각한 노씨 부인은 항상 통탄해하면서 남편을 대할 면목이 없었다.

가난한 가운데 홀로된 시어머니를 모시고 극진한 효성을 다해 보양해오던 중 남편 윤씨 마저 병이 들어 누웠다. 그러자 노씨는 겨울 엄동설한에 두꺼운 얼음을 깨고 물고기를 잡아 식사를 올리는 등 시어머니와 남편을 정성을 다해 봉양해왔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성 가득한 간호에도 아랑곳없이 남편의 병은 차도가 없이 운명 직전에 이르렀다. 노씨 부인은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죽어가는 남편의 입에 수혈했다. 이로 인해 남편이 잠시 깨어났다. 이 같은 정성에도 얼마 후 남편이 숨을 거두게 되자 노 씨는 남몰래 뒤뜰로 돌아가 자결을 결행했다. 이를 본 집안사람들이 놀라 노씨 부인을 부둥켜안고 방으로 들어가니 뜻밖에도 남편이 죽지 않고 소생해 있었다. 하지만 노씨 부인은 숨졌다.

↑↑ 본지 150호에 실렸던 효열의인광주노씨정려비.

소생한 남편 윤 씨는 숨진 부인 노씨를 어루만지며 곡하여 이르기를 “조금 전 부인이 저승으로 나를 따라와 나의 손을 잡고 울면서 내가 그대의 명을 대신했으니, 그대는 다시 세상에 나가서 새로 배필을 얻어 자손을 잇게 하소서”라며 슬퍼했다. 그 후 윤씨는 재취 장가를 들어 아들 3형제와 10여명의 손자를 두어 가문의 대를 잇게 됐다.

이 같은 노 씨 부인의 파평윤씨 가문을 빛나게 한 효열(孝烈)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은 1980년대 이곳에 정려비와 효열각을 세웠다.


↑↑ 경주시 광명동 소재 열부사인손희천처진양하씨지각은 수풀이 우거져 접근조차 어려웠다.


후사를 잇고 남편 따라간 열부 하씨, 부사인손희천처진양하씨지각(烈婦士人孫喜天妻晋陽河氏之閣)

경주시 광명동 379-6번지에는 2동의 비각이 있다. 그중 서쪽 비각이 열부사인손희천처진양하씨지각(烈婦士人孫喜天妻晋陽河氏之閣)이다.

하 씨는 월성손씨와 결혼해 신행을 가기도 전에 남편의 병 소식을 듣고 급히 시댁으로 달려 갔으나 이미 남편이 숨진 뒤였다.

↑↑ 본지 158호에 실렸던 열부사인손희천처진양하씨지각.

하씨 부인은 남편을 따라 같이 죽으려고 결심했으나 임신한 몸으로 남편의 후사를 이어주기 위해 결행하지 못했다. 이후 산달이 되어 아들을 낳았다. 하씨는 아들이 능히 죽을 먹고 혼자 살 수 있는지를 시험해보고, 또 어머니가 없어도 자랄 수 있음을 확인한 뒤 독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씨 부인은 남편과 같이 묻히게 됐다. 이러한 열부의 행적이 세상에 널리 알려짐에 따라 조선 순조 3년(1803년)에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이에 월성손씨 문중은 비와 비각을 세워 하씨 부인의 열행을 기렸다.

1992년 경주시는 퇴락이 심한 비각의 담장을 새로이 보수했으나 비각 안에 있어야 할 비신(碑身)이 언제인지도 모른채 없어지고 텅 빈 비각만 남았다. 하씨 부인의 행적을 기록한 현판만이 전해지고 있어 비각을 찾는 사람들을 쓸쓸하게 하고 있다.


↑↑ 경주시 광명동 소재 효자절충김두망지비 내부.


어머니 눈을 뜨게 한 효자 김두망, 효자절충김두망지비(孝子折衝金斗望之碑)

진양하씨지각 동편에 있는 비각이 효자절충김두망지비(孝子折衝金斗望之碑)다. 효자 김두망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나이 20세가 되도록 앞을 보지 못하는 어머니께 아침저녁으로 3년 동안 식사를 손수 지어 먹이는 등 수발을 하며 정성으로 섬겨왔다. 김두망은 밤낮으로 천지신명께 ‘저의 눈은 멀게 할지라도 어머니의 눈만은 뜨게 해달라’고 빌어왔다. 하루는 하늘이 감동해서인지 어머님이 다시 눈을 뜨게 됐다. 
어머니 그 후 10여년 동안 밝은 세상을 보면 즐겁고 행복하게 생존하시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 본지 161호에 실렸던 효자절충김두망지비.

그 뜻을 후세에 길이길이 전하기 위해 헌종 17년(1837년) 효자로 정려하고 광명리에 월성김씨 문중으로 하여금 비각을 세우게 했다. 오랜 세월 동안 비바람으로 무너진 것을 경주시가 1992년 흙 담장을 말끔히 보수하고 높이 75cm, 넓이 30cm, 두께 10cm의 비신을 정돈했다.

↑↑ 경주시 광명동의 2개 비각 앞은 쓰레기 등이 쌓여있어 관리가 필요해보였다.


광명동 2개 비각 관리 손길 미치지 못해

1993년 당시 본지 보도에 따르면 광명동 소재 2동의 비각은 경주시가 한 차례 정비한 것으로 확인된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찾은 현장에는 관리의 손길이 전혀 미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진양하씨지각은 비신이 없는 탓일까? 비각 입구에는 쓰레기들이 쌓여있었고, 내부에는 수풀이 우거져 접근조차 어려웠다.

비신이 없어진 시점조차 파악되지 않으면서 비지정문화유산에 대한 관리대책을 서둘러 마련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현장 상황이었다. 그나마 관리의 손길이 닿은 것으로 보이는 김두망지비도 내부 비신을 보호하는 나무 살대 일부가 떨어져 나가 있는 등 보수가 시급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주시 등 관리 당국이 이들 비각의 정비를 통해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효자·열부들의 훌륭한 효(孝) 사상이 이어질 수 있도록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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