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윤의 절터 기행[9-1] 경주 고선사 터(上)

신라 고승 원효의 발자취를 품은 물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7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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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경주박물관 뒤뜰로 옮겨진 고선사 삼층석탑.


보문호를 채운 물의 근원 덕동호

보문호를 거닐다 호수를 가득 채운 물의 근원이 궁금해졌다. 경주 땅에 널리고 널린 것이 신라의 흔적이라지만, 신라의 웅혼한 혼이 지금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이 땅을 평화롭게 적시며 흘러가는 물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문호의 근원을 생각하다 경주 사람이 아니면 모를, 덕동호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보문관광단지에서 감포로 넘어가는 옛길 그 어디 즈음에 댐이 있다는 것과, 댐에 신라시대 고승 원효대사가 머물렀다는 고선사 터가 수몰되었다는 이야기는 충격이었다.

 가뭄이 들 것을 대비해 경주에도 식수 공급을 위한 댐이 필요했다. 경주의 옛이름 서라벌이다. ‘벌’은 넓고 평평한 땅을 의미한다. 대부분이 평지의 땅으로 이루어진 경주에서 유독 지대가 높은 덕동면은 댐을 만들기에 유일했고 적합했다. 한 면(面) 전체가 수몰되어야 하는 댐 건설에 덕동면 주민은 경주시를 위해 고향을 기꺼이 내어 주었다. 어디든 댐을 볼 때면 평온하게 물결치는 그 아래가 궁금했다.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내어준 실향민들의 심정이나 집과 길, 논과 밭이 한 순간에 물에 잠기는 슬픔을 다 헤아리지는 못한다. 그러나 가까스로 물 밖까지 가지를 내밀어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나무들을 볼 때면 허우적대는 처절한 슬픔이 심연 깊숙이까지 파고들곤 했다.

감포로 가기 위해 무심하게 지나쳤던 곳이었다. 덕동호를 알고 처음 덕동호에 왔을 때, 낯선 풍경에 몹시 당황했었다. 보문관광단지에서 조금 빗겨나자 예상치 못한 산길이 나타났다. 천북·암곡 방면으로 난 길은 통행하는 차량이 드물고,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마치 과거로 접어드는 것같이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입구부터 안개가 자욱했다. 신비스러움마저 훅 끼쳤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한참을 멈춰 있었다. 어디론가 점점 깊게 빨려 들어가는 느낌은 섬찟하면서도 호기심이 일었다. 안개에 잠긴 산과, 산을 따라 구불텅하게 난 길의 끝이 어디일지 궁금했다. 쭈뼛쭈뼛 늘어선 나무들이 섬뜩해질 무렵, 보덕로 내리막 끝에 ‘암곡동 대성마을’이라는 이정표가 나타났다. 옹기종기 지붕을 맞댄 민가가 반가웠다. 길을 따라 가면 갈수록 안개는 점점 짙어졌다. 누구라도 만난다면 길부터 물어야 할 판이었다. 

덕동길을 달려 와동경로당 앞 갈래 길에서 멈췄다. 어디선가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한겨울임에도 얼지 않고 콸콸콸 힘차게 흐르는 물소리였다. 경로당 앞 덕동천이었다. 며칠 동안 양껏 내린 비로 장마철 못지않게 물이 불었다. 저 깨끗함, 발 벗고 들어가 온몸으로 시린 물살을 느끼고 싶었다. 한기가 머리끝까지 번쩍하고 스쳤다. 겨우내 바짝 웅크린 나태함을 ‘쨍’하고 깨웠다.

한 번, 두 번, 세 번…. 덕동호는 매번 안개에 잠겨 있었다. 다시 한 번, 두 번, 세 번…. 고향처럼 덕동호가 자연스러워졌다. 저물녘엔 붉게 물드는 노을을 바라보고, 단풍이 들 땐 옛길에서 낭만을 즐겼다. 어느새 덕동호는 특별함이 아닌 익숙함이 되었다.


↑↑ 고선사 삼층석탑과 함께 국립박물관 뒤뜰로 옮겨진 석물들.


추억 서린 고선사 터를 그리워하는 수몰민

오랜만에 다시 찾은 경주였다. 보문호 수위를 살핀 후 곧장 암곡동으로 향했다. 옛길은 풍광이 좋아 경주 사람들에게 아름답기로 소문난 길이다. 산기슭에 옹기종기 모여 터를 잡은 집들이 처음 보는 것처럼 새롭다. 나무와 풀 사이로 덕동호가 얼비쳤지만, 수위가 얼마나 낮아졌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외동 경로당에서 ‘명실 2㎞’라는 오래된 표지석을 따라 익숙하게 우회했다. 덕동천 다리를 건너 구불텅하게 난 길을 달리니 논과 밭 너머 덕동호 바닥이 드러났다. ‘시래골’을 알리는 표지석이 나타나자 마음이 급해졌다. 차에서 내려 잰걸음으로 밭둑에 올라섰다. 늘 그 자리에 주인처럼 서있던 한 쌍의 허수아비가 서두르라며 재촉했다.

허수아비만 자리를 지키던 빈 밭에 오늘은 촌로 내외가 나와 땅을 고른다. 내외의 시선이 내게 고정된다.

“이 촌구석엔 뭣 하러 왔소?” 촌로가 물었다. “어르신, 덕동호에 절터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촌로의 표정이 밝아졌다. “고선사를 말하는 거로구만요” 촌로는 힘주어 말했다. “고선사를 아십니까?” 내가 반가운 기색으로 묻자 촌로는 몸을 돌려 한쪽 산기슭을 가리킨다. “저짜 저…, 저 산봉우리 아래가 거기라요. 큰 탑이 하나 있긴 있었는데…. 아주 컸어요. 우리가 쪼만할 땐, 뭣도 모르고 올라가서 소리도 지르고 놀고 그랬어요. 아들이 다 그래 놀았어요. 그라면 어른들은 탑 무너진다고, 부정 탄다고 막 몽둥이를 들고 와서 야단쳤어요. 그래도 소용 없었어요. 아들은 아들인기라요. 그키 야단맞고도 다음날 되면 또 탑에 기어 올라가서 놀았어요. 뭔 날만 되면 어른들은 탑 아래 초를 놓고 불도 붙이고, 누구는 물도 떠다 놓고, 누구는 떡도 해다 놓고 빌었어요. 그라면 우리는 어른들 안 볼 때 그거 훔쳐 묵고, 묵다 들키서 야단도 맞고 도망 댕기고…. 배고픈 시절이라 꿀맛이었어요. … 아주 옛날에 무슨 유명한 스님이 고선사에 오래 있었다 카던데…. 절터가 꽤 널렀어요(넓었어요). 논 중간에 탑이 있었는데 멀리서도 한눈에 보였어요. 댐 짓는다고 살던 사람들 다 나가라 카고, 탑은 어데더라…. 그 어데서 가져갔다 카던데…. 탑이 없어지고 한참 허전했어요. 있던 거는 원래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거라요. 우리가 나고 자라면서 늘 거기 있던 거였는데 하루아침에 가져 가뿌니까 우리도 허전하고, 탑도 아마 무척 여기 오고 싶을 거예요”

↑↑ 안개가 자욱해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덕동댐, 저 물 아래 고선사 터가 있다.

촌로는 고향을 떠나지 못하고 수몰된 마을 어귀 산 중턱으로 올라와 터를 잡았다. 매일 고향이 잠긴 덕동호 물결을 내려다보며 고향에서의 추억을 생각하며 산다고 했다. 촌로가 가리키는 산봉우리 아래를 바라보았다. ‘아!’ 가뭄에 물은 저 건너 산 아래까지 물러났다. 함부로 볼 수 없던 너른 땅, 땅이 드러났다. 덕동호는 비로소 속살을 열어 나를 불렀다. 나는 주머니를 뒤져 오래전 넣어둔 흑백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이 귀한 사진을 어데서 구했어요? 우리 어렸을 때, 고선사 터가 이랬었어요”

촌로의 표정이 환히 빛났다. 여기 이쯤에 누구 집이 있었고, 어디 즈음엔 무엇이 있었다며 촌로가 사진 속, 옛날을 회상했다. 너른 들판에 석탑 하나가 웅장하게 서 있는 사진이었다. 탑은 첫눈에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멋이 있었다.

시야를 뻗어 산세를 훑었다. 촌로는 덕동호 어디까지 따라와 석탑이 서 있었을 법한 곳을 가늠해 주고 돌아갔다. 오랜 가뭄의 흔적에는 물기가 없었다. 물이 빠진 바닥은 건조되어 퍼석거렸다. 덕동호 속살에 내 발자국이 마른 흙 위에 흐릿하게 찍혔다. 바람이 불어 먼지가 일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바닥엔 누가 다녀갔는지 모를 발자국이 드문드문 찍혀 있었으나, 그들이 여기에 왜 왔으며 무엇을 하고 돌아갔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걷고 멈추고, 걷고 멈추기를 반복했다. 오래전 절을 드나들던 사람들처럼 예를 갖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느새 나는 사라진 절터에 서 있었다. 돌을 모았다. 층층이 쌓다가 마지막엔 아주 작은 돌 하나를 얹었다. 사진 속 고선사 석탑에 비하면 한없이 보잘 것 없지만, 나는 이렇게 빈 땅에 탑 하나를 세웠다. 내가 쌓은 탑은 웅장한 탑을 대신해 고선사 터 석탑을 대신한다.


박시윤 답사기행에세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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