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산집 서문을 지은 경주부윤 홍양호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11월 14일
공유 / URL복사
↑↑ 오상욱 시민전문기자
경북고전번역연구원장
영양남씨 활산(活山) 남용만(南龍萬,1709~1784)은 부친 남국형(南國衡)과 모친 여주이씨 이덕함(李德咸) 사이에서 출생하였고, 어려서 이름은 해만(海萬)이었다. 14세에 종조숙부 남국선(南國先)의 양자가 되었고, 훗날 모친상을 탈상한 후에 식솔을 이끌고 경주 명활산(明活山) 아래로 이거해 살며 평생을 학문을 궁구하였다. 풍천임씨 임간세(任榦世)의 따님을 만나 남경채(南景采,1736~1811) 낳고, 서산류씨 화계(花溪) 류의건(柳宜健,1687~1760)의 따님을 만나 치암(癡庵) 남경희(南景羲,1748~1812), 남경화(南景和)를 낳았으니, 아들 역시 뛰어난 문장가였다.

그가 남긴 『활산집』은 원집(原集) 7권, 부록(附錄) 합 5책으로, 1790년 해좌(海左) 정범조(丁範祖,1723~1801), 1793년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1724~1802)가 지은 서문 등이 포함되어 있다. 문집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집안에서 많은 노력 등이 있었고, 특히 그의 둘째 아들 남경희의 정성이 특출하였으며, 차남 남경희가 「어록(語錄)」을, 장남 남경채가 「행장」을 지어 부친의 행적을 기록하였다.

이계 홍양호는 1760년 7월부터 1762년 6월까지 경주부윤으로 재임하며 학교의 부흥과 문화발굴에 지대한 공을 들인 인물이다. 그가 부윤으로 있으면서 활산과 교유하였고, 물러난 뒤에도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학문적 교유를 이어갔으며, 남겨진 많은 시작품이 이를 대변한다. 특히 활산의 만사(輓詞)에서 “옛적 내가 이 지방을 다스렸을 때, 민풍을 살피러 옛 수도를 방문했네. … 명활산에 처사가 있으니, 고상한 걸음으로 그윽한 지조를 보존하였네. … 신령의 바람 말은 어디로 돌아갔는가, 남휘정(覽輝亭)을 찾아갔겠지.”라고 그를 추억하였다. 남휘정은 1771년 명활산 덕계에 지은 행랑채의 이름으로, 초봉암(招鳳菴)의 동편에 있었다.

활산은 「초봉암기(招鳳庵記)」에서 “나는 진정 세상을 벗어난 은자(隱者)로, 이곳에 집을 지었으니 진짜 봉황은 쉽게 볼 수 없음을 안다. 사람 가운데 봉황의 자질이 있는 사람 얻기를 구하였기에 그와 비슷한 지명을 따라 편액을 걸고 그들을 불러들였다. 지금 나를 따라 노니는 자는 모두 자주 날갯짓하려 하지만, 날개가 아직 다 자라지 않아서, 바야흐로 멀고 가까운 거리를 막론하고, 모두가 날개를 나란히 하여 이른다면 그 가운데 무리 중 빼어난 자가 없을 것이라 어찌 알겠는가?”라고, 보기 드문 봉황의 출현과 은둔한 자신의 처지 그리고 봉황처럼 성군의 출현과 태평성대를 기대하는 그의 마음을 글로 대변하였다.

앞서 활산은 풍기군수로 있던 정범조를 찾아가 선조의 글을 받은 적이 있었고, 그의 아들 남경희 역시 부친의 유집을 갖고 그에게 서문을 부탁하였으니, 사람의 인연은 참으로 긴요하다.

아들 남경희는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1711~1781)의 문인으로, 이만운(李萬運)·손병로(孫秉魯)·송전(宋銓) 등과 교유하였고, 증광시에 합격 그리고 1777년 진사에 올라 승문원박사·성균관전적·사헌부감찰·병조좌랑·사간원정언 등을 역임하였으며, 1791년에 사직하고 고향 경주 보문마을리로 돌아온 뒤 스스로 은거하였다.

듣기에 『활산집』이 국역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에 경주의 선비 활산 선생에 대한 자료를 다시 넘겨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에 문집의 서문을 소개한다.



활산선생문집 서문 - 이계 홍양호

계림은 신라의 옛 도읍으로, 삼한(三韓)을 통일하여 천 년 동안 나라를 누렸다. 산천이 빼어나고, 신령이 돌보아 동방의 으뜸이 되었기에 이름난 신하와 큰 선비가 성대하게 배출되었다. 하지만 근세 이래로 차츰차츰 떨쳐 일어나지 못하였으니, 논하는 사람들이 개탄해하였다. 

경진년(1760) 내[홍양호]가 동도의 부윤이 되어 학교를 일으키고 선비를 양성하는 일에 뜻을 두었다. 듣기에 진사 남붕로(南鵬路)가 온 고을의 존경을 받고 영남 좌도가 모두 그를 경모하였기에, 이에 예를 갖춰 그를 학교로 초청하였다. 많은 선비의 스승이 되어 문예(文藝)를 강론하고, 경술(經術)을 가르치니, 1년 만에 문장의 재목이 되었다.

배우는 자들이 명활산 아래 덕계(德谿) 가에 나아가 서당을 짓고, 무리를 이뤄 학업을 익혔는데, 내가 그 편액을 쓰고 서문도 지어주었다. 내가 조정으로 돌아오자 남붕로 역시 도백(道伯)의 천거를 받아 침랑(寢郞)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거문고 연주하고 책 저술하면서 노년을 마쳤다. 매번 마음에 드는 시문이 있으면 번번이 천 리나 떨어진 나에게 부쳐 보여주었으며, 나 역시 그렇게 하였으니, 깊이 서로 인정함이 이와 같았다.

군의 둘째 아들 남경희가 젊어서 과거에 급제해 서울로 와서 나를 찾아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붕로가 세상을 떠났는데, 나는 만시(輓詩)를 부쳐 그를 애도하였다. 남경희가 이미 탈상을 하고 『활산유고(活山遺稿)』네 권을 가지고 와서는 나에게 서문을 구하였다. 내가 다 읽어보니 … 질박(質樸)하나 속되지 않고, 심오하나 교묘에 빠지지 않았으니 … 말세의 소리가 아니었다. … 계축년(1793) 단오에 풍산인 홍양호 서문을 짓다.


X
URL을 길게 누르면 복사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