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소묘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10월 24일
|
공유 / URL복사 |
저녁의 소묘
한강
어떤 저녁은 피투성이
(어떤 새벽이 그런 것처럼)
가끔은 우리 눈이 흑백 렌즈였으면
흑과 백
그 사이 수없는 음영을 따라
어둠이 주섬주섬 얇은 남루들을 껴입고
외등을 피해 걸어오는 사람의
평화도,
오랜 지옥도
비슷하게 희끗한 표정으로 읽히도록
외등은 희고
외등 갓의 바깥은 침묵하며 잿빛이도록
그의 눈을 적신 것은
조용히, 검게 흘러내리도록
고통과 치욕 끝에 남은 사랑의 시
↑↑ 손진은 시인 |
철학자가 아니더라도 하루의 일과를 마친 저녁을 우리는 흔히 거울을 보듯 찬찬히 존재의 본질과 마주하는 시간으로 부른다. 그 몇 분의 시간 속에서. 그렇게 우리는 서서히 자아를 탈바꿈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시인이 그리는 저녁은, 그런 성찰의 시간을 멀찍이 뛰어 넘는다. 새벽의 시간과 뚜렷한 구분도 없다.
바로 “나는 피 흐르는 눈을 가졌어”(「피 흐르는 눈」) 할 때의 눈이 가진, 고통받는 존재들과 내밀하게 교감하는 지점에서 나온다. 그리하여 이 시는 “어떤 저녁”이 “피투성이”일 때 나의 깊은 곳에서 고통과 침묵 사이에서 뿜어나오는 “고요히 붉은/영혼의 피 냄새”(「마크 로스코와 나2」)에 가깝다.
“외등을 피해 걸어오는 사람”들이 겪고 있는 “오랜 지옥”을, 어둠이 대신 그들의 “주섬주섬 얇은 남루들을 껴입고” 있는데, 나는 그들을 위무해줄 수는 방법은 없다는 말인가? 시인은 고심한다. 여백 끝에 시인은 이들의 ‘피투성이 삶’이 안 보이도록 “가끔은 우리 눈이 흑백 렌즈였으면”하고 소망한다. 그래야 흑과 백, “그 사이 수없는 음영을 따라” 노랗고 주황빛인 “외등은 희”어지니까. 화자의 마음처럼 “외등 갓의 바깥은 침묵하며 잿빛”이 되니까.
소설 『채식주의자』에는, 오토바이에 매달려 질질 끌려가는 개의 “덜렁거리는 네 다리, 눈꺼풀이 열린, 핏물이 고인 눈”이 나온다. 세상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 얼마나 고통과 마주하는 일이 끔찍했으면 그림자와 빛으로만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고 할까, 그렇다고 해도 처절한 고뇌를 느끼지 않을 수야 없겠지만, “비슷하게 희끗한 표정으로 읽”힐 수 있다면 오랜 지옥을 견뎌온 사람들의 삶이 조금은 위무될까. 그리하여 우리 눈이 흑백렌즈였으면 좋겠다는 시인의 소망과 한탄이 뻑뻑한 치욕을 사랑으로 바꾸는 행위임을 알겠다. 그런데도, 그 사랑이 따뜻하면서도 서늘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비록 그 렌즈로 바라본다고 세계의 상처가 숨겨지기야 않겠지만, 그 순간만이라도 “그의 눈을 적신” 붉은 빛이 “조용히, 검게 흘러내”리는 걸 보고 싶다는 말이다. 다시 고통과 치욕, 그 끝에 남는 사랑을 생각하게 하는 시이다.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