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성대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관측소이다(1)

하성찬 시민전문 기자 / 2024년 10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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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대의 첨성대(좌) 현재의 첨성대(우).

↑↑ 하성찬 시민전문기자
첨성대가 월성 앞에 우뚝 서 있다.

첨성대는 신라 왕경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어 사방 어디에서도 볼 수 있다.
첨성대 남쪽으로 계림과 월성, 금오산의 게눈바위[蟹目嶺]가 차례로 눈에 들어오고, 서쪽으론 선도산 너머 멀리 단석산도 보인다. 또 북쪽에는 경주 시가지가 펼쳐지고, 동북 방향으로는 야트막한 소금강산과 동으로 돌아가며 보문 단지, 명활산, 낭산이 있고, 그 뒤로는 토함산의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가까이는 월성과 월지가 보인다.

다음은 고려 충신 포은 정몽주 옛 신라의 첨성대를 보고 읊은 시이다.

瞻星臺兀月城中(첨성대올월성중)
첨성대는 월성에 우뚝 서 있고
玉笛聲含萬古風(옥적성함만고풍)
옥피리소리는 만고의 바람 머금었네.
文物隨時羅代異(문물수시라대이)
문물은 때에 따라 신라와 달라졌으나
嗚呼山水古今同(오호산수고금동)
아아 산과 물은 고금이 한 가지로다.


첨성대는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데, 기네스북에는 ‘세계 최초의 천문대’로 등재되어 있고,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때 석탈해왕의 16세손인 석오원이 축조한 것으로 되어있다.

첨성대 인근 지역을 과거에는 속칭 ‘비두골’, ‘비두거리’라고 했는데 이는 북두칠성에 다른 별을 비교해서 국가의 안위와 길흉화복을 점쳤다는 뜻이다. 천문, 기상, 역법은 농경사회에서 매우 긴요한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정치적인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고대사회에서는 자연을 움직이는 것은 하늘이며, 이 하늘을 정치 이념의 중심으로 삼았다. 따라서 일식, 혜성, 지진 등과 같은 천문현상은 국가의 흉조(凶兆)로 여겨 국왕은 이를 하늘로부터의 경고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국가적인 사업의 일환으로 기상 및 천체를 관측하기 위하여 첨성대가 조성되었을 것이다.

첨성대가 실제로 매일 밤 천문을 관측하던 실용적인 건조물이었느냐에 대해서는 이론이 없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삼국시대에 누각박사(시간측정 전문가), 역박사(역법 전문가), 일관(천체 기상 관측자) 등의 관리를 두고 있으며, 가뭄·홍수·폭풍·우박·서리 등에 대한 이상 기후와 천체 현상과 관련한 일식·혜성·유성·지진 등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첨성대가 천문·기상과 관련이 있는 구조물임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칠팔십 년 전 첨성대 사진과 지금 사진의 모습은 비슷하지만 달라진 게 있다. 1920년대 일본 사람들이 첨성대 바로 북쪽에 신작로(新作路)를 만들었다. 그 후 6.25동란 때 동해안에 착륙한 미군 포병부대가 첨성대 북쪽에 주둔하면서 장갑차와 탱크들이 지축을 울리며 꼬리를 물고 그 길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하여 그 진동으로 북쪽으로 10도 가량 급격하게 기울어졌을 것으로 인근 주민들이 믿고 있다.

건축 당시 땅 밑을 여물게 다졌기에 그 정도로 기울고 만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휴전이 되고 몇 년 지난 뒤 군용차를 동원하여 굵은 밧줄 타래를 동여매어 남쪽에서 잡아당겨 바로 세우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지금의 상태로 기울어졌다고 한다.

신라 선덕여왕 때 세워진 첨성대가 1400여년의 풍상을 겪은 지금 육안으로 보아도 한쪽이 땅속으로 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계측 결과 북쪽으로 7.2㎝, 동쪽으로 2.4㎝ 기울어져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리고 1970년대에 북쪽 길을 뭉개고 부근에 있는 인가도 없애고 주변 정화 작업을 한 후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길을 새로 냈다.

전문가의 탄성파 탐사와 학술논문 발표 등에 의하면 첨성대가 기우는 이유는 북동쪽 지반이 남·서쪽에 비해 물기가 많고 지형이 덜 딱딱하기 때문에 첨성대의 밑바닥 기단석이 북동쪽으로 약 2.07도 기울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앞으로도 더 기울어질 것이라고 염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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