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의병장 오모재 권복흥을 기억하다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10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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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상욱 시민전문기자 경북고전번역연구원장 |
의병장 권복흥은 어려서 발에 병을 앓아서 주위 사람들이 불편한 그의 모습에 의병 합류를 만류하였지만, 그는 발이 비록 병들었으나, 마음만은 병들지 않았다며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는 의지를 내세우고, “임금이 위태로움에 처한 상황에 발에 병이 있다고, 어찌 죽음으로 보답하지 않겠는가?”하고는 분연히 뜻을 세웠다. 이후 여러 전투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1592년 4월 28일 다대포 진영 안에서 순절하였다.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1724~1802)는 「정려명(旌閭銘)」에서 “경주에 의로운 선비 권복흥은 어려서 다리에 병을 앓아 걸음이 좋지 않았는데, 임진년(1592)의 난리에 떨쳐 일어나 창을 들고 달려가 싸우다 죽었다. 그의 처 류(柳)씨가 달려가 시신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자 남은 옷으로 초혼(招魂)하여 돌아왔다. 통곡하며 집안사람들에게 ‘지아비가 칼끝에서 죽었는데 그 시신을 찾지 못했으니, 이는 나의 죄입니다. 어찌 천지 간에 살아가겠습니까. 이제 남편을 따라 죽으려 하니, 옷과 신발을 묻은 곳에 합장(合葬)하면 될 것입니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입을 다물고 음식을 끊어 9일 만에 죽었다. 방백이 그 일을 조정에 알렸고, 남편과 함께 선후로 정려문이 내려졌다”라고 칭송하였다.
이 일로 영조 13년(1737)에 ‘충신의사권복흥지려(忠臣義士權復興之閭)’정표를 내렸고, 사후에 후손과 유림의 공조로 1740년에 단계사(丹溪祠)에 배향되었다. 다시 단계서당으로 개칭하였으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 이후 1924년에 재건립된다. 게다가 부인 서산류씨는 권복흥이 순절하자 남편의 시신을 찾아 헤매었으나 끝내 찾지 못하자 식음을 전폐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열부였기에, 그 뜻을 기려 정조 18년(1794)에 ‘열녀의사권복흥처서산류씨지문(烈女義士權復興妻瑞山柳氏之門)’정표를 내렸다.
농수(農叟) 최천익(崔天翼,1712~1779)이 「행장」을, 여와(餘窩) 목만중(睦萬中,1727~1810)이 「권의사복흥전(權義士復興傳)」을, 면암(俛庵) 이우(李㙖,1739~1810)가 「휴허비」 등을 지었다. 그는 병든 발에도 불구하고, 종과 함께 먼 길을 내달려 다대포에 이르러 적진에서 전사하였으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장자』「덕충부(德充符)」를 보면, 공자가 월형(刖刑)을 받아 발꿈치를 잘린 무지(無趾)에게 “그대는 어찌하여 전날 행실을 조심하지 않아서 이러한 우환을 당하였는가?”라고 하자, 무지가 “나는 세상일을 잘 알지 못하고 가벼이 몸을 놀리다가,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지금 와서는 발보다 더 존귀한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온전히 보전하고자 힘씁니다(吾唯不知務而輕用吾身 吾是以亡足 今吾來也 猶有尊足者存焉 吾是以務全之也).”라고 하였다. 존족(尊足)은 하늘로부터 받은 본성을 가리킨다. 발이 불편한 권복흥의 경우를 빗대어 최천익은 ‘존족’으로 그의 천성을 칭송하였고, 나아가 효에 대한 마음도 더불어 부각시켰다.
‘오모(五慕)’는 그의 호로, 『맹자』「만장장구」에서 “대효(大孝)는 죽을 때까지 부모를 사모하니, 50세까지도 부모를 사모한 자를 나는 대순(大舜)에게서 보았노라”라고 순임금의 효도하는 뜻에서 취하였으니, 그의 효심 가득한 마음가짐을 알만하다.
화산 권 공 행장(花山權公行狀) - 농수 최천익
부친 권평(權平)과 모친 청안이씨 사이에 단구리 집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났고, 어려서부터 무리와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말수가 적고 입이 무거워 철이 든 어른 같았다. 어려서 학문을 익혀 이미 대의가 있었는데, 매번 옛 성현께서 충과 효에 힘쓰는 구절을 만나면 문득 가슴에 새겨 외웠다. 어려서부터 성장해서까지 스스로 닦고 남을 가르치는 이유가 오로지 효제(孝悌)를 근본으로 삼았으니, 고을 사람들이 그를 중히 여겼다.
공은 평소 다리에 병이 있었는데, 모두가 “군대를 따라가기 어렵고, 대오에 끼지도 못하니, 힘써 그 행동을 그만둬라”라고 말하였지만, 공은 개의치 않고 “나의 발은 비록 병들었지만, 여전히 발보다 귀한 것[尊足]이 남아있다. 절름발이로 죽음에 나아가도 달아나 숨기를 도모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또 나의 검이 있으니 어찌 무리가 대수이겠는가? 마침내 가동 몇 사람을 거느리고, 활과 검을 차고, 말을 타고 날로 나아가 갑절의 길을 내달려 곧장 부산으로 향하였다. 다대포에서 적을 만나 홀로 말을 타고 적진에 들어가 힘써 싸우다 전사하였다. 살상의 흔적이 매우 많았고, 검은 부러지고 화살은 다하여, 마침내 적병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농수(農叟) 최천익(崔天翼,1712~1779)이 「행장」을, 여와(餘窩) 목만중(睦萬中,1727~1810)이 「권의사복흥전(權義士復興傳)」을, 면암(俛庵) 이우(李㙖,1739~1810)가 「휴허비」 등을 지었다. 그는 병든 발에도 불구하고, 종과 함께 먼 길을 내달려 다대포에 이르러 적진에서 전사하였으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장자』「덕충부(德充符)」를 보면, 공자가 월형(刖刑)을 받아 발꿈치를 잘린 무지(無趾)에게 “그대는 어찌하여 전날 행실을 조심하지 않아서 이러한 우환을 당하였는가?”라고 하자, 무지가 “나는 세상일을 잘 알지 못하고 가벼이 몸을 놀리다가,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지금 와서는 발보다 더 존귀한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온전히 보전하고자 힘씁니다(吾唯不知務而輕用吾身 吾是以亡足 今吾來也 猶有尊足者存焉 吾是以務全之也).”라고 하였다. 존족(尊足)은 하늘로부터 받은 본성을 가리킨다. 발이 불편한 권복흥의 경우를 빗대어 최천익은 ‘존족’으로 그의 천성을 칭송하였고, 나아가 효에 대한 마음도 더불어 부각시켰다.
‘오모(五慕)’는 그의 호로, 『맹자』「만장장구」에서 “대효(大孝)는 죽을 때까지 부모를 사모하니, 50세까지도 부모를 사모한 자를 나는 대순(大舜)에게서 보았노라”라고 순임금의 효도하는 뜻에서 취하였으니, 그의 효심 가득한 마음가짐을 알만하다.
화산 권 공 행장(花山權公行狀) - 농수 최천익
부친 권평(權平)과 모친 청안이씨 사이에 단구리 집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났고, 어려서부터 무리와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말수가 적고 입이 무거워 철이 든 어른 같았다. 어려서 학문을 익혀 이미 대의가 있었는데, 매번 옛 성현께서 충과 효에 힘쓰는 구절을 만나면 문득 가슴에 새겨 외웠다. 어려서부터 성장해서까지 스스로 닦고 남을 가르치는 이유가 오로지 효제(孝悌)를 근본으로 삼았으니, 고을 사람들이 그를 중히 여겼다.
공은 평소 다리에 병이 있었는데, 모두가 “군대를 따라가기 어렵고, 대오에 끼지도 못하니, 힘써 그 행동을 그만둬라”라고 말하였지만, 공은 개의치 않고 “나의 발은 비록 병들었지만, 여전히 발보다 귀한 것[尊足]이 남아있다. 절름발이로 죽음에 나아가도 달아나 숨기를 도모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또 나의 검이 있으니 어찌 무리가 대수이겠는가? 마침내 가동 몇 사람을 거느리고, 활과 검을 차고, 말을 타고 날로 나아가 갑절의 길을 내달려 곧장 부산으로 향하였다. 다대포에서 적을 만나 홀로 말을 타고 적진에 들어가 힘써 싸우다 전사하였다. 살상의 흔적이 매우 많았고, 검은 부러지고 화살은 다하여, 마침내 적병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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