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의 미학 ‘문인화’
이재건의 미술칼럼
경주신문 기자 / 2008년 09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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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하취생도 지본담채, 23.2X27.8cm, 간송미술관 소장 |
ⓒ 경주신문 |
우리에게는 전통적으로 이어져 오는 고상한 취미의 문인화라는 화목이 있다.
번거로운 일상을 살아가는 가운데 잠시나마 틈을 내어 먹 향기를 맡으며 흰 종이에 생각나는 대로 농필(弄筆)을 즐기는 한가로운 취미생활이다.
옛 묵을 가볍게 가니
책상에 향기 가득한데
벼루에 물 부우니
얼굴이 비치도다
산새는 약속이나 한 듯
날마다 날아와 지저귀고
들꽃은 심은 이 없으나
저절로 향내를 발하는 구나
단원 김홍도가 읊은 몇 줄의 시는 그림보다 더 아름다운 전경을 보여준다. 단원은 동양화의 모든 장르에 뛰어난 기량을 발휘한 영수였다. 불화, 도석화(신선도)는 물론 풍속화, 진경산수 그리고 문인화와 서예, 시에도 높은 경지의 작품을 남기었다.
화원으로 그에게 맡겨진 일은 막중하였을 것이며 엄청난 양의 작품을 제작하면서 받은 스트레스도 대단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래서 그가 단숨에 흥으로 그려내는 그림 가운데는 의례히 술병과 악기(생황, 비파, 거문고 등)가 등장하며 그림 속에 나타난 인물은 노인이건 젊은이건 단원의 자화상으로 느껴지게 된다.
묵향과 들꽃향내가 번져오고 가볍게 흐르는 생황의 소리가 파초 잎처럼 여유와 평화가 감도는 아름다움이 있다. 벼루에 부운 물에 얼굴을 비춰보는 은밀한 시간 속에 시상을 찾아내고 그림의 소재를 구하는 자세는 문인화를 다루는 화가에게는 필연의 순간이다.
가볍게 먹을 갈면서 삿된 생각을 녹여버리고 오직 깨끗한 마음바탕을 이루는 회사후소(繪事後素)의 뜻이 이러 하리라.
오늘 우리는 이러한 여유로운 시간 속에서 그림을 그려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먹을 가는 시간마저 부족하여 검은 먹통의 묵즙을 벼루에 따라 먹으로 가는 흉내만 내는 실정이다. 물론 많은 양의 먹물이 필요한 때도 있겠지만 이제는 먹을 가는 작업이 귀찮은 일로 느껴지지는 않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먹을 가는 일이 마음을 가는 일이라 생각한다면 그 시간은 생각의 여유를 갖게 하는 귀중한 것이며 문인화를 다루는 작가의 기본 태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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