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티 고개의 철비(鐵碑)
경주의 조선문화 산책 <3>
경주신문 기자 / 2008년 10월 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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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악리 무열왕릉에서 도로를 따라 고개를 오르면 왼쪽에 두 개의 비석이 있다. 율동에서 넘어오면 더 잘 보이는 곳이다. 하나는 경주에서 하나뿐인 철비(鐵碑)이고 다른 하나는 석비(石碑)이다. 철비 비면에는 ‘영장류공춘호영세불망비(營將柳公春浩永世不忘碑)’라 씌어있다. 영장 류춘호의 덕을 잊을 수 없다는 선정비다.
조선 시대 영장은 지방의 각 군사 진영에 있었던 최고 관직이다. 뒷면을 보면 계사년(1893) 6월에 비를 세웠고 당시 감독을 맡았던 사람은 권달운(權達運)이라 적혀있다. 명문은 모두 판독할 수 있는 32자이다. 내용을 봐서는 주민들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선정을 베풀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대혜(大惠)’ 또는 ‘빙얼(氷蘖)’ 등의 말이 보이는데, 군포 등을 징수할 때 많은 혜택을 주었고,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매우 청백했었다는 말이다.
석비를 보면 앞면에 ‘영장류공춘호청덕거사비(營將柳公春浩淸德去思碑)’라 씌어있다. 역시 영장 류춘호의 맑은 덕은 잊을 수 없다고 하였다. 계사년(1893) 7월에 건립했으니 앞서 철비보다 한 달 늦게 세웠고, 감독은 이기원(李基元)이다. 여기 명문 또한 32자이고, 내용에 ‘무졸(撫卒)’, ‘애민(愛民)’ 등의 말이 있다.
군졸들의 어려운 삶을 잘 어루만져 주었고 백성들을 아들처럼 사랑했다고 했다. 이 비는 계묘년(1903) 12월에 옮겨와 세웠다고 뒷면에 새겨져 있다. 석비는 다른 곳에 있었던 것을 이 때 옮겨와서 철비와 한 자리에 세웠다는 말이다. 아무리 선정을 베풀었다해도 한 곳에 두 기의 비석을 세울 수는 없었다. 떨어져 있었던 것을 사정이 있어서 한 자리에 옮겨왔던 것이다.
선정비는 주로 관아 뜰이나 마을 어귀에 서 있고, 고개 마루에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그런데 이 비석은 왜 이곳에 있을까하고 궁금했었다. 간혹 이곳에 들러 살펴보면 누군가에 의해 관리가 잘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금년에도 우연히 지나다가 보니 역시 벌초가 깨끗이 되어 있었다. 나는 이 인근 마을에 류춘호의 후손이 살고 있을 것이라 믿고 소티 마을로 내려가서 수소문하니, 율동리 선두마을에 사는 이태수(73세)씨가 그 주인이었다. 이태수씨에게 비의 내력을 물으니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본래 이 두 기의 비석은 경주 성건동에 있었습니다. 당시 성건동은 황량한 모래밭이었고, 두 기의 비는 비각 안에 모셔진 채 외롭게 서 있었습니다. 1950년대 이르자 이곳 성건동 일대는 점차 가옥이 들어서면서 변모하였고, 사람들도 많이 살게 되었습니다. 비각은 점차 퇴락하여 기울어졌고, 마침내 인가의 한쪽 구석에 방치되면서 거름더미 속에 묻힐 지경이었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기시던 저의 아버님 이봉조(李鳳兆)께서 1957년에 석비만 소달구지에 싣고 이곳 소티 고개로 옮겨와 세웠습니다. 몇 년이 지나자 누군가에 의해 철비도 이곳으로 옮겨왔습니다. 그 후 아버님이 두 기의 비석을 벌초하며 관리하다가 돌아가시자 제가 아버님의 뜻을 받들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고 말하였다. 석비는 원래 어느 곳에 건립되었는지 모른다. 성건동으로 옮겨 세워졌다가 다시 소티 고개로 이건하였다. 석비가 옮겨간 자리에 철비만 외롭게 방치되어 있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권달운 후손들이 철비를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이 비석과 어떠한 인연이 있으며 영장 류춘호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고 물으니, 이태수씨는 “석비를 세울 때 감독을 맡았던 이기원이 저의 증조부입니다. 본디 영장 류춘호와 친분이 두터웠고, 영장이 떠난 후 이 비석을 세우는데 저희 증조부가 적극 주간하게 되었습니다.”고 했다.
아! 이럴 수도 있구나. 선정비 뒷면 하단에 증조부 이름자 석 자가 있다는 것만으로 대를 물러가며 이렇게 잘 수호할 수 있단 말인가. 명리(名利)에 따라 온 산천에 비석이 난립해 있는 이 때, 진정 이태수씨의 행적을 기리는 비를 세워 후세 사람들을 긍식(矜式)하게 하는 것이 어떨까?
조 철 제
(경주고·향토문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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