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신문 창간 20주년 특별기획 / 경주의 문화관광 그 빛과 그림자 ⑤
노동리 노서리 고분군을 가다
황명강 기자 / 2009년 03월 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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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남사거리에서 시내 중심부로 진입하는 태종로를 사이에 두고 좌측 노서리 고분군과 우측 노동리 고분군으로 나뉜다.
경주사람들의 넉넉함과 포용력은 삶과 죽음이 멀리 있지 않음을 던져주는 환경에 기인된 것이란 생각을 하며 노동리 고분군을 들어선다.
먼저 여덟 그루의 고목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봉황대(125호 고분)를 만난다. 1970년대 고분 정비사업 이전까지는 남녀노소 추억의 장소이기도 한 봉황대는 높이 23m, 둘레 250m로 단일 원형고분으로는 경주에서 가장 큰 고분이다.
풍수지리설에 따른 전설을 지니고 있는 봉황대가 전설에서처럼 축조된 것인지 누구의 능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작은 산을 연상시키는 그 크기로서 왕이나 귀족의 무덤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노동리 고분군에서 가장 인상적인 풍경은 봉황대와 그 위에 뿌리 내린 느티나무들과의 교감이다. 일본 관광객 부부가 봉황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데 그 옆으로 자전거를 탄 사람이 지나간다. 능과 능 사이 고즈넉한 산책길에 자전거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봄이 깊은 따스한 날, 이곳으로의 나들이를 권해 본다.
봉황대 옆 126호 고분은 식리총(신라시대, 5세기 후반)이다. 1924년 발굴당시 귀고리, 유리옥의 가슴장식, 은제허리띠, 은팔찌, 환두대도, 쌍룡 고리자루큰칼, 말갖춤, 옷칠그릇, 금동제 신발이 출토됐는데 특히 금동제 신발(식리)의 문양이 독특해 이곳을 식리총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현재 식리총의 봉분은 없으며 3m 가량 높이의 원형 단면을 유지하고 있다.
제127호 고분이 금령총이다. 이 또한 1924년 발굴 후 봉분이 없는 1m 높이의 원형 단면으로 유지되고 있다. 식리총과 금령총은 크기와 규모가 비슷해 봉황대의 주인과 밀접한 관계를 유추하게 한다. 금령총에서 출토된 토기 중 기마인물, 배 모양 토기가 특이하고 금팔찌, 금관 등의 장신구의 크기가 작아서 왕자의 무덤으로 추측하고 있다.
노동리 고분군은 21세기 우리 경주인이 껴안고 생활하는 터전이다. 분리될 수 없는 생사의 무한함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끝없는 기다림과 온유함, 다정함이란 경주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일 것이다. 고분군 동편으로는 법장사 처마가 보인다. 그 옆 기와집은 국립문화재연구소가 경주지역문화유산 보수 및 발굴 임시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노동리, 노서리 고분군을 관람한 관광객이 이곳에서 선체험이나 다도체험을 한다면 어떨까. 비어 있다시피 한 그 집에서 한국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는 관광코스를 개발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노서리 고분군>
사적 제39호. 노서리 고분군에는 서봉황대, 고분을 비롯하여, 금관총, 서봉총, 호우총, 마총, 쌍상총 등 13기의 크고 작은 고분과 1기의 표적만 남아있는 고분의 흔적이 있다.
노서리 고분군에서 가장 유명한 금관총은 128호 고분으로 1921년 발굴이 집행됐다. 신라의 금관이 출토돼 금관총으로 명명됐으며 수많은 장신구와 구슬이 나왔다. 무덤의 구조로 보아서는 통일신라 이전 왕릉으로 추측된다. 발굴이후 봉분 없이 보존되고 있으며 펑퍼짐한 능의 한쪽에 나무 한그루가 자릴 잡고 있다.
금관총 서쪽 가까운 능이 129호 고분 서봉총이다. 당시 스웨덴 황태자 아돌프 구스타프가 발굴 현장(1926년)에 참여했다는 기념비와 그의 손자인 칼 구스타프(1994년)가 방문 기념으로 식수한 나무가 자라고 있다.
출토된 금관에 봉황이 장식된 서봉총에서는 각종 금제장신구 외에 토기, 쇠솥, 칠기, 금․은․청동제 용기류, 유리용기, 마구, 각종 유리구슬이 있었다고 한다. 서봉총 옆 130호 고분은 봉황대와 대칭을 이룰 만큼 커서 서봉황대로 불린다. 131호 고분은 능이 있었음직한 자리에 대형 돌 3개만 놓여있다.
그 바로 옆의 132호 고분은 크기가 작고 말뼈가 나왔다고 해서 마총으로 불리는 133호 고분은 가장 작은 무덤이다. 그리고는 그 옆의 거대한 쌍분 134호 고분을 만난다. 어느 왕의 무덤인지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잔디사이로 난 길을 걸으며 상상으로 그 주인을 만나본다. 135호 고분의 크기는 큰 편이고 136호 고분은 아담하다. 쌍상총으로 명명되는 137호 고분은 부부합장묘로 알려져 있다. 청동호우가 출토돼 호우총으로 불리는 140호 고분 관람을 끝으로 잠시 밀어두었던 현실로 돌아온다.
<빛과 그림자>
노동리, 노서리 고분군은 관광객 뿐만아니라 경주시민의 휴식처로 매우 훌륭하게 조성돼있다. 오솔길과 벤치가 있으며 주차공간이 넉넉지는 않으나 구 시청사 주차장이나 시내공영주차장을 이용하면 된다. 노서리 고분군 입구 쪽에 있는 녹슨 안내문이 거슬린다. 고분을 훼손하거나 쓰레기 투척을 금한다는 등의 안내판이 풍경을 훼손하고 있다. 철거를 권한다. 노서리 고분의 간이 화장실 관리가 청결하지 못하고 화장지가 비치되지 않았다. 관리인이 거처하는 듯한 컨테이너도 미관을 해친다. 그리고 좀 더 욕심을 부린다면 출입구의 유적지 안내 외에 각 능마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이 요구된다.
황명강 기자
경주사람들의 넉넉함과 포용력은 삶과 죽음이 멀리 있지 않음을 던져주는 환경에 기인된 것이란 생각을 하며 노동리 고분군을 들어선다.
먼저 여덟 그루의 고목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봉황대(125호 고분)를 만난다. 1970년대 고분 정비사업 이전까지는 남녀노소 추억의 장소이기도 한 봉황대는 높이 23m, 둘레 250m로 단일 원형고분으로는 경주에서 가장 큰 고분이다.
풍수지리설에 따른 전설을 지니고 있는 봉황대가 전설에서처럼 축조된 것인지 누구의 능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작은 산을 연상시키는 그 크기로서 왕이나 귀족의 무덤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노동리 고분군에서 가장 인상적인 풍경은 봉황대와 그 위에 뿌리 내린 느티나무들과의 교감이다. 일본 관광객 부부가 봉황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데 그 옆으로 자전거를 탄 사람이 지나간다. 능과 능 사이 고즈넉한 산책길에 자전거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봄이 깊은 따스한 날, 이곳으로의 나들이를 권해 본다.
봉황대 옆 126호 고분은 식리총(신라시대, 5세기 후반)이다. 1924년 발굴당시 귀고리, 유리옥의 가슴장식, 은제허리띠, 은팔찌, 환두대도, 쌍룡 고리자루큰칼, 말갖춤, 옷칠그릇, 금동제 신발이 출토됐는데 특히 금동제 신발(식리)의 문양이 독특해 이곳을 식리총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현재 식리총의 봉분은 없으며 3m 가량 높이의 원형 단면을 유지하고 있다.
제127호 고분이 금령총이다. 이 또한 1924년 발굴 후 봉분이 없는 1m 높이의 원형 단면으로 유지되고 있다. 식리총과 금령총은 크기와 규모가 비슷해 봉황대의 주인과 밀접한 관계를 유추하게 한다. 금령총에서 출토된 토기 중 기마인물, 배 모양 토기가 특이하고 금팔찌, 금관 등의 장신구의 크기가 작아서 왕자의 무덤으로 추측하고 있다.
노동리 고분군은 21세기 우리 경주인이 껴안고 생활하는 터전이다. 분리될 수 없는 생사의 무한함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끝없는 기다림과 온유함, 다정함이란 경주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일 것이다. 고분군 동편으로는 법장사 처마가 보인다. 그 옆 기와집은 국립문화재연구소가 경주지역문화유산 보수 및 발굴 임시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노동리, 노서리 고분군을 관람한 관광객이 이곳에서 선체험이나 다도체험을 한다면 어떨까. 비어 있다시피 한 그 집에서 한국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는 관광코스를 개발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 경주신문 |
<노서리 고분군>
사적 제39호. 노서리 고분군에는 서봉황대, 고분을 비롯하여, 금관총, 서봉총, 호우총, 마총, 쌍상총 등 13기의 크고 작은 고분과 1기의 표적만 남아있는 고분의 흔적이 있다.
노서리 고분군에서 가장 유명한 금관총은 128호 고분으로 1921년 발굴이 집행됐다. 신라의 금관이 출토돼 금관총으로 명명됐으며 수많은 장신구와 구슬이 나왔다. 무덤의 구조로 보아서는 통일신라 이전 왕릉으로 추측된다. 발굴이후 봉분 없이 보존되고 있으며 펑퍼짐한 능의 한쪽에 나무 한그루가 자릴 잡고 있다.
↑↑ 노서리 고분군의 금관총 |
ⓒ 경주신문 |
금관총 서쪽 가까운 능이 129호 고분 서봉총이다. 당시 스웨덴 황태자 아돌프 구스타프가 발굴 현장(1926년)에 참여했다는 기념비와 그의 손자인 칼 구스타프(1994년)가 방문 기념으로 식수한 나무가 자라고 있다.
출토된 금관에 봉황이 장식된 서봉총에서는 각종 금제장신구 외에 토기, 쇠솥, 칠기, 금․은․청동제 용기류, 유리용기, 마구, 각종 유리구슬이 있었다고 한다. 서봉총 옆 130호 고분은 봉황대와 대칭을 이룰 만큼 커서 서봉황대로 불린다. 131호 고분은 능이 있었음직한 자리에 대형 돌 3개만 놓여있다.
그 바로 옆의 132호 고분은 크기가 작고 말뼈가 나왔다고 해서 마총으로 불리는 133호 고분은 가장 작은 무덤이다. 그리고는 그 옆의 거대한 쌍분 134호 고분을 만난다. 어느 왕의 무덤인지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잔디사이로 난 길을 걸으며 상상으로 그 주인을 만나본다. 135호 고분의 크기는 큰 편이고 136호 고분은 아담하다. 쌍상총으로 명명되는 137호 고분은 부부합장묘로 알려져 있다. 청동호우가 출토돼 호우총으로 불리는 140호 고분 관람을 끝으로 잠시 밀어두었던 현실로 돌아온다.
<빛과 그림자>
↑↑ 노서리 고분의 간이 화장실과 컨테이너 |
ⓒ 경주신문 |
노동리, 노서리 고분군은 관광객 뿐만아니라 경주시민의 휴식처로 매우 훌륭하게 조성돼있다. 오솔길과 벤치가 있으며 주차공간이 넉넉지는 않으나 구 시청사 주차장이나 시내공영주차장을 이용하면 된다. 노서리 고분군 입구 쪽에 있는 녹슨 안내문이 거슬린다. 고분을 훼손하거나 쓰레기 투척을 금한다는 등의 안내판이 풍경을 훼손하고 있다. 철거를 권한다. 노서리 고분의 간이 화장실 관리가 청결하지 못하고 화장지가 비치되지 않았다. 관리인이 거처하는 듯한 컨테이너도 미관을 해친다. 그리고 좀 더 욕심을 부린다면 출입구의 유적지 안내 외에 각 능마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이 요구된다.
황명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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