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경주시민상 문화부문 수상자 김덕수

신라의 맥과 혼을 이어 이전의 신라 천년에서 후세 천년을 기약하며 다듬어 이어가는 사람

손익영 기자 / 2010년 11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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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경주시민상 무화부문 수상자 김덕수
ⓒ (주)경주신문사
김덕수 선생의 검게 그을린 얼굴에 흰 광목 두루막자락이 돋보인다. 아니 흰 두루막자락이어서 얼굴이 더 검어 보이는 건 아닌지... 희끗희끗한 머리에 눈빛이 유난히 반짝이며 힘이 있어 보인다.
2010 경주시민상 문화부문 수상자 김덕수(58·경주축제문화위원회)를 발표했을 때 풍물놀이패 ‘김덕수’와 혼돈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한민국의 풍물, 신명나는 우리 가락, 장단으로 세계를 열광시킨 김덕수가 있다면 경주를, 그 근원인 신라를 찾아내고 신라의 맥과 혼을 이어 이전의 신라 천년에서 이다음 후세 천년을 기약하며 다듬어 건지는 사람 ‘김덕수’를 만난다.

“경주가 경주다워야 사람들이 경주를 보러 오지 않을 거가 말이다”
천년 신라의 찬란했던 문화를 끄집어내는데 그의 젊음이 고스란히 묻어갔다.
사라져간 역사에서 세월을 뒤적여서 역사적 사실을 찾아내는 일은 녹록지 만은 않다. ‘삼국유사’ 등에서 사료를 찾아내 문화행사로 기획했다. 월명재, 충담재, 천관재, 정월대보름 축제 등이 그것이다.

김덕수 선생은 1952년 경주시 강동면 유금리에서 태어나 강동초와 경주중학교, 경주공업고등학교를 거쳐 서라벌대학을 졸업했다. 부인 이진옥 여사와의 사이에 동산, 대중 두 아들을 두고 있다. 자녀들의 이름이 예사롭지 않아 묻자 “동산은 동산 선사(1890~1965)를 존경해 큰아이를 동산으로 짓고 둘째는 큰 스님이 되었으면 해서 대중(大衆)이라 이름 지었다”고 할 만큼 불교에 심취하고 생활화하고 있다.
1984년 부처님마을을 창립해 초대촌장으로 활동 시작, 87년 삼국유사 절터찾기 모임 창립, 89년 경주남산 성역화 결사대회 마련, 92년 경주남산사랑모임 창립 초대회장으로 경주남산 세계유산 선정운동 전개, 93년 경주문화축제위원회를 결성해 월명재, 충담재, 정월대보름 축제, 천관재 등을 주도하며 새로운 시민축제문화개발, 95년 경주를 사랑하는 시민연대 결성, 99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위촉 경주남산보존정비 자문위원, 2000년 신라문화동인회 부회장으로 신라문화보호보존에 노력, 신라문화동인회 50년사 편집위원장, 2009년 5월 경주남산 염불사지 진신사리 봉안 등 신라불교예술문화 발전에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이며 문화유산이 가진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고 새로운 문화 창조의 기틀을 마련했다. 또한 대표 불교국가인 스리랑카와 불교복지협회를 결성하고 초대회장에 취임해 12회를 방문하며 많은 어린이들과 불우한 환경개선을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이며 특히 2005년 스리랑카 지진해일이 발생하자 이재민구호단장을 맡아 전국적인 모금활동을 전개해 현지에 사랑의집 3채를 신축해 전달했다.

내남 농협에 근무하며 낙후한 농촌경제발전과 농민의 삶의 질 향상에도 남다른 열정과 노력을 기울여 지역자활기관 협의체 위원으로 활동하며 다문화가족지원을 하는 등 농촌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했다.
“경주를 살리고 미래를 내다보는 경주를 만들려면 경주만의 문화특성 테마가 있어야 한다. 예전 수학여행처럼 하루 이틀로 그저 훑고 지나가는 경주가 아니라 이야기가 있는 경주로 연결해야 한다”며 경주에서 오래 살아온 토박이 등 시민들을 활용해 경주문화해설 교육전문 양성과정을 만들어 가이드를 자원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주를 찾는 사람에게 전문해설사 자격을 갖춘 안내자가 관광가이드로 나서면 하루 이틀에 끝나버릴 관광이 체계적으로 이어져 며칠씩 묵어가는 관광산업화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경주만의 스토리가 있는 관광특성화를 위해 외동↔부조간의 동해남부선 철로를 걷어내면 스토리텔링과 연계된 단지를 조성하고 간이역사는 기념관 혹은 작은 박물관, 휴식 공간 등으로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
또한 백제권 문화인 부여나 공주처럼 스토리텔링 지역을 묶어 둘레길 개발을 시급하게 내다봤다.
아울러 강경장, 풍천장과 함께 3대 시장으로 내려오던 강동면의 부조장을 다시 활성화해서 전통장으로 부각시키는 것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저이는 결혼할 때부터 부처님마을을 얘기했어요. 부처님마을 식구들과 부처님 진리를 베풀며 늘 봉사하고 배려하며 살 거라 얘기했는데 지금까지 그렇게 지키고 실천하며 사신 거 같아요. 월급 타면 식구들 넉넉지는 못해도 봉사하고 하고 싶은거 하니 집안 살림하는 여자로선 애들 공부시켜야 하고 돈 들어갈 일 많은데 솔직히 어려움도 있었구요. 하지만 결혼 전부터 늘 입버릇처럼 얘기하던 일 하는데 싶어... 옆에서 늘 일관되게 살아오는 모습 지켜보면서 존경스런 마음도 들구요” 하며 부인 이진옥 여사(54세)가 수줍게 웃었다.
선생이 가장 애착을 갖고 또한 보람으로 여긴 일은 부처님마을과 월명재(매년 음력 시월 보름에 행사), 충담재(매년 음력 삼월 삼짇날 행사), 정월대보름 행사, 천관재 등이다. 그리고 스리랑카 사랑에 푹 빠져 있다.
1994년부터 한-스리랑카 불교복지협회를 결성해 초대회장으로 스리랑카 어린이돕기 운동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12차례 현지를 오가며 환경개선, 불우청소년·노인돕기, 쓰나미 이재민돕기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가 하면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스리랑카근로자들을 초대해 경주관광을 시켜주기도 했다.

“나는 두 달 후 정년퇴임하면 여생을 스리랑카에서 봉사하며 살 끼다. 때 묻지 않은 눈빛과 인정이 있는 그곳에서 앞으로 50년은 살 수 안 있겠나?”
선생은 경주에 스리랑카 사원을 지을 계획으로 현재 스리랑카와 추진 중이며 본사 경주시민상 시상식 다음날인 17일 새벽 스리랑카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번 스리랑카행은 한-스 불교복지협회에서 마련한 장학기금 500만원 전달과 함께 현지어를 체계적으로 배우며 장기 체류를 위해 스리랑카 대학에서 학업을 이어가며 국경 없는 사랑을 펼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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