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서장(上書莊)

경주신문 기자 / 2010년 12월 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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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북단에 자리 잡은 상서장(上書莊)은 온통 나무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특히 가을 단풍이 곱게 물들었을 때 주변 광경은 한 폭의 동양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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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서(上書)’란 신하가 임금에게 글을 올린다는 말이다. 여기서 글을 올린 사람은 신라 말의 유명한 문장가 고운 최치원(857~?)이다. 고운이 상서할 때 살고 있었던 집이라 하여 상서장이라 불렀다. 그렇다면 고운은 과연 어느 임금에게 어떤 내용의 글을 올렸을까? 이는 고운의 삶과 사상을 가름하는 중요한 과제의 하나이다.

「삼국사기」에 고운이 상서했다는 글이 두 군데 보인다. 894년 2월에 고운은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의 글을 올렸다. 나라에서 당장 시행해야할 십여 가지 조목의 글을 적어 올린 것인데 그 내용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임금은 사사로운 정에 얽매여 정치를 게을리 해선 안 되고 자신의 영달을 위해 날뛰는 조정 신료들의 기강을 바로 잡아야 한다. 그리고 백성들의 과중한 세금을 감면하여 이반된 민심을 수습해야 한다고 했을 것이다. 진성여왕은 그의 글을 보고 감동하여 이찬 벼슬을 내렸다.

두 번째 글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처음 일어났을 때 고운은 그의 사람됨이 비범하여 반드시 새로운 나라를 세울 줄 알았다. 그리하여 ‘계림의 나무 잎사귀는 누렇고 곡령의 소나무는 푸르다(鷄林黃葉 鵠嶺靑松)’라는 문구가 적은 글을 보냈다. 계림은 신라이고 곡령은 송도의 송악산으로, 곧 신라는 망하고 고려가 일어날 것이라는 참언이었다. 계림황엽(鷄林黃葉)이 신라 삼기팔괴(三奇八怪)의 가운데 하나로 꼽힌 것은 이 같은 이유에서이다.

문제는 두 번째의 글이다. 고운이 과연 왕건의 비범한 인물임을 알고 이 같은 글을 보냈을까? 고운은 왕건보다 스물 살 위이다. 궁예 아래에 있던 왕건이 신숭겸 등과 그를 축출하고 고려를 세운 것은 918년이다. 신라는 이보다 훨씬 뒤인 경순왕 9년(935)에 망했다. 왕건이 건국할 때 고운은 회갑의 나이다. 고운은 진작 40대 중반에 가솔을 데리고 가야산으로 들어가 종적을 감춘 뒤이고, 돌아간 해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를테면 고운이 가야산에 들어갈 때 왕건은 스물다섯의 나이에 불과하였고, 왕건이 건국할 때 고운이 생존했는지 조차 알 수 없다. 연대적으로 따져보아도 고운이 왕건에게 이 같은 글을 보낼 이유가 없었고 지리적으로도 일면식 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고운은 일생을 고결한 삶으로 일관하였고 신라에 대한 애국심도 참으로 남달랐다. 이 같은 고운이 어찌 시류에 영합한 글을 왕건에게 올릴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사서(史書)에는 엄연히 이 같은 사실을 적고 있다.

그렇다면 후세 사람들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을까? 앞서 두 편의 글 가운데 후자를 음미하며 상서장을 찾은 문사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경주 남산을 찾은 조선시대 선비들은 줄곧 상서장에서 출발하였고, 터만 남은 이곳에 들러 계림황엽(鷄林黃葉) 등 문구를 되뇌이며 사상에 젖어들었다.

19세기 중엽까지 상서장에는 영당을 비롯하여 아무런 건물도 없었다. 고종 13년(1876)에 부윤 이돈상(李敦相)이 글을 지어 세운 상서장 비각(碑閣)은 현재 건물 가운데 가장 먼저 건립되었다. 그런데 이돈상의 이 비문에도 ‘계림황엽’ 운운하고 있어서 아쉽다. 고운이 진성여왕에게 시무책 올린 글을 읽어보지 못했는지 알 수 없다. 역사의 편견에 대한 선하(先河)란 이렇게 무섭구나하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후대에 내려올수록 고운의 후손들은 선조의 숭고한 정신이 이 같이 잘못 전해지고 있는데 대해 안타깝고 곤혹스러웠다.

마침내 1978년에 이르러 후손들이 유허비(遺墟碑)를 세웠다. 비문은 이병도 박사가 지었는데 그 글에서, ‘신라의 국록을 받고 고고(孤高)히 여생을 마친 선생이 설마 이러한 아부의 글을 왕건에게 보냈다고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후에 선생의 문인들이 고려 조정에 많이 벼슬하였는데 계림황엽 곡령청송(?林黃葉 鵠嶺靑松)이란 말은 이들이 조작한 말일 것이다.

그렇다면 경박한 그들이 선생을 추영(追榮)하기 위한 것인데, 도리어 욕되게 한 것이다. 영혼이 있다면 얼마나 그들을 책망할 것인가. 생각할수록 불쾌막심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고운이 왕건에게 올렸다는 글은 후세 사람들의 날조에 의한 것이라고 했다. 고운의 사실(史實)을 정확하게 읽은 신필(信筆)이다. 그러나 역사의 흔적은 지운다 해서 없어지지 않는다. 이를 어떻게 새겨 읽어야 할 것인가? 초 겨울날, 앙상한 가지에 한 닢 남은 나무 잎사귀가 못내 아쉬운 듯 찬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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