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동도 명기 ‘홍도(紅桃)’ 최계옥 선생-재색(才色) 겸비했던 경주 유명 기생 ‘홍도’… 훌륭한 예인으로 재평가 지속돼야

선애경 기자 / 2016년 09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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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월, 한국예총 경주지부를 비롯한 경주의 문화예술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금장대 소공원에서 제막된 ‘동도명기 홍도 최계옥’ 추모비.
ⓒ (주)경주신문사


홍도 최계옥(1778~1822년) 선생은 눈물을 거두었을까. 경주에 유명한 기생 홍도(紅桃)가 있었다. 조선 시대 홍도라고 부른 기생은 많았으며, 일제 때 대중가요 ‘홍도야 울지 마라’의 홍도와는 무관함을 우선 밝힌다. 홍도는 재주가 영특하여 옛 글에 밝았을 뿐 아니라 특히 미색이 뛰어났다. 시서(詩書)에 능했기 때문에 문인들과 어울려 고금을 논하고 시주를 즐겼던 그는 재색을 겸비한 예인이었던 것이다.

‘미모는 국내에서 제일이고 재주와 시문이 출중했던’ 그를 본 경주 부윤 유한모가 추천하여 궁궐 상의원에 들어가고 그곳에서 독보적인 가무 솜씨를 발휘하자 한양에서도 명성이 자자할 정도였다고 한다.

경주가 자랑할만한 정신적 유산이자 재평가돼야 할 인물로서 홍도 최계옥은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그는 어려운 삶 속에서도 경주의 악공과 후학들을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살았고, 짧은 45년의 삶을 마감하면서, 자신의 전 재산을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전부 내놓은 훌륭한 예술인이었다. 차제에 동도 홍도 총괄기념사업회를 통해 경주가 낳은 홍도 선생을 기리고 나아가 문화인물의 가치성을 확립하고 그에 대한 재평가 작업을 지속적으로 이뤄나가야 할 것이다.

본 기사는 조철제 선생(전 경북도 문화재 전문위원)의 조선시대의 경주를 재발견할 수 있는 저서인 ‘또 다른 경주를 만나다’에서 발췌 인용해 구성했다.

↑↑ 경주시 도지동 산 627-1번지에 있었던 동도 명기 홍도의 묘역으로 2007년 8월 발굴 당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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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그에게 별호로 내린 이름이 ‘홍도(紅桃)’
경주시 도지동 산 627-1번지였다. 이 비석이 처음 발견되어 세상에 화제가 된 것은 1990년이지만 실제 이보다 훨씬 이전에도 비석을 눈여겨 본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비석은 두 동강이 난 채 포도밭둑에 누워 있었다. 포도밭 주인이 이를 안타깝게 여기고 부러진 부분을 시멘트로 붙여 이었으나 정교하게 붙이지 못했다.

비석이 약간 구부정한채 무덤 앞에 세워져 있었다. 이것이 당시 언론에 보도되었을 때의 모습이다. 비석 앞면에는 ‘동도명기홍도지묘(東都名妓紅桃之墓)’라고 썼다. 비의 높이는 120cm, 너비는 50cm, 두께는 20cm, 총 글자 수는 388자이다.

이때 조철제 선생은 이를 몇 번 답사하여 탁본을 했다고 한다. 시멘트로 뒤덮인 가운데 부분의 한자는 알 수 없지만 뜻을 이해하는데 큰 문제는 없었으며 비문을 참고해 풀이했다. 정조 2년(1778)에 태어난 홍도는, 아버지는 향리 우두머리를 역임한 최명동이고 어머니는 경주에서 대대로 기생노릇을 한 집안 출신이다.

그의 성은 최씨이고 이름은 계옥(桂玉)이며 자는 초산월(楚山月)이다. 홍도는 재주가 영특하여 옛 글에 밝았을 뿐 아니라 특히 미색이 뛰어났다. 그를 본 경주 부윤 유한모가 추천하여 궁궐 상의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독보적인 가무 솜씨를 발휘하자 한양에서도 명성이 자자하였다.

이를 눈여겨 본 정조의 장인이며 순조의 외조부인 박준원이 매우 좋아하여 외부(外婦), 곧 소실로 삼았다. 당시 박준원은 정조의 장인이며 순조의 외조부가 되는 권문 외척이었다. 당시 박준원은 쉰아홉 살이었고 홍도는 갓 스물 살의 꽃다운 나이였다. 정조는 장인을 위로해 드리려고 그에게 별호를 내린 이름이 ‘홍도(紅桃)’였다.

홍도는 출입이 극히 제한된 갇힌 몸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근 10년을 그렇게 보낸 홍도는 몸이 야위고 근심이 가득했다. 어느 날 박준원이 그 이유를 묻자 홍도는 자신을 앵무새에 비유한 시를 읊었다.

‘푸르고 붉은 옷을 입은 새가/ 밤마다 하늘을 보고 울고 있구나./ 새장 속에 깊이 갇혀 있으니/ 어찌 여위지 않겠어요.//

-고향 경주로 내려와 악부(樂府)의 종사(宗師) 돼, 모든 재산 친척들에게 골고루 나눠주라고 유서 남긴 뒤 생 마쳐
홍도는 박준원과 11년 간 같이 살았고, 그가 죽은 뒤 3년 상을 치르고 고향 경주로 내려왔다. 경주에 돌아온 그는 악부(樂府)의 종사(宗師)가 되었다. 곧 경주 교방의 우두머리가 되어 기생의 교양과 가무 및 악기 등을 가르쳤다. 그는 궁중 장악원에서 익히고 닦았던 실력을 후진 양성을 위해 정성을 쏟아 부었다. 당시 경주부의 관기는 약 50여 명이고 악부 곧 교방은 내아 서편 큰 길 건너편에 있었다. 교방은 특성상 내아와 아주 근접해 있었다.

홍도는 박준원에게 상당한 재산을 물려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그는 재력이 있었고, 또한 지방 문사들과 더불어 폭 넓은 교유를 맺었다. 특히 그는 시서(詩書)에 능했기 때문에 문인들과 어울려 고금을 논하고 시주를 즐겼다. 그런데 홍도는 알 수 없는 병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후사가 없는 그는, 붓을 들어 그의 모든 재산을 친척들에게 골고루 나눠주라고 유서를 남긴 뒤 생을 마쳤다. 때는 순조 22년(1822)이며 그의 나이 마흔 다섯이었다. 선산이 있는 형제산 아래에 묘를 썼다.

-기생 무덤으로 확실하게 알려진 것으로 경주에서 유일, 전국에서도 몇 군데 남아 있지 않은 귀중한 유적이었음에도 소실돼
재색(才色)을 아울러 갖춘 그였지만 신분적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채 사회적 굴레에 얽매어야 했다. 묘비명에, 그의 미모는 국내에서 제일이고 재주와 시문은 출중하였다고 끝을 맺었다. 그가 죽은 지 30년이 지난 철종 2년(1851)에 교방의 제자들이 뜻을 모아 묘비를 세웠다. 비문은 절충 장군 최남곤이 지었다.

1990년 8월에 홍도비가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진 뒤, 많은 문화인들이 그의 묘소를 찾았다. 기생 무덤으로 확실하게 알려진 것으로 경주에서 유일하고 전국에서도 몇 군데 남아 있지 않은 귀중한 유적이다. 그런데 홍도 묘소에 뜻밖에 횡액이 닥쳤다.

홍도 묘역 일대에 거대한 아파트가 건립되면서 도동구획정리사업으로 지정되었다. 이즈음 홍도 묘에 해괴한 일이 발생하였는데, 곧 묘비가 하루아침에 감쪽같이 없어졌다는 사실이다. 누군가 개발에 장애가 된다는 이유로 묘비부터 먼저 없애버린 것이다.

홍도묘는 묘비 없는 무덤으로 방치되었다가 2005년 3월에 이르러 무연분묘로 분류되어 각 신문에 공고되었다. 그 해 11월에 홍도 무덤은 무연분묘라 하여 파헤쳐 화장된 뒤 건천 영호공원 납골당에 합동으로 안치되어 버렸다.

그후 신라문화유산원에서 발굴해 조사가 끝났고 문화재청에 발굴 보고서를 올리자 문화재청에서 홍도비 유적에 대해 표지판을 세우라고 한다. 그 결과 코아루 아파트 경내 표지판을 게시했다.

↑↑ 홍도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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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의 고혼(孤魂) 생각하면 마음이 착잡하고 무겁다. 잔 잡고 권할 데 없다”
1970년 중반 소설가 정비석 선생이 명기열전을 모 신문사에 연재했다. 그때 그는 동도 명기 홍도에 대해 정보를 입수하고 누구와 같이 왔는지 알 수 없으나 세 차례나 이곳을 찾았다. 홍도 비문을 읽고 주변을 탐문하며 자료를 찾았으나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 글을 쓰지 못했다. 마침내 1990년 경주에서 홍도 묘소가 발견됐다며 중앙 신문에 일제히 보도됐다. 조선일보 이규태 칼럼에 실린 것도 이 무렵이다.

조철제 선생은 경주고에 재직하던 중 홍도 묘소를 찾아가 비문을 탁본해 둔 것이 있었고 권윤식 선생의 비문과 비교해 결락한 글자를 비워두고 강재 김형진 선생을 찾았다. 강재 선생은 비문을 읽고 앞 뒤 문맥에 따라 메워 나갔다.

이렇게 해서 빠진 글자를 보충한 것이 지금 나도는 홍도 비문이라고 한다. 그 뒤 동국대 최효식 교수가 ‘동도명기 홍도 최계옥의 생애’라는 논문을 쓰면서 앞서 빠진 비문의 글을 몇 자 수정해 게재했다. 한편, 조철제 선생은 원문을 다시 고치고 이를 국역해 권윤식 선생에게 드리고 권 선생은 ‘홍도비에 얽힌 사연’을 쓴 것이다.

조 선생은 “1989년경에 처음 홍도 묘소를 찾았을때는 누군가 묘를 관리하고 있었다. 즉 묘소 주위에 큰 소나무와 대나무가 우거졌지만 주위가 훤해 해마다 벌초를 한 묘역이었다. 그런데도 개발 앞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묘비는 백주에 없어진 것이다. 누구의 소행인지 알 수 없다. 최소한 양심마저 저버린 행위였다”고 했다.

“홍도 무덤은 경주의 또다른 문화유산으로 개발될 수 있었다고 생각할 때, 참으로 안타까웠다. 묘는 이미 없어졌지만 홍도비는 마을 주변에 어딘가 반드시 묻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런 흔적이 없고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도 모른다고 할뿐이다. 묻힌 비석을 찾아야 명확한 비문 판독이 가능하고 이를 바탕으로 삼아 비를 재건할 수 있을 것이다. 형제산과 문천 가에 떠도는 홍도의 고혼(孤魂)을 생각하면 마음이 착잡하고 무겁다. 잔 잡고 권할 데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 홍도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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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도 명기 홍도 총괄 기념사업회, 지난 4월 추모비 제막하고 “재평가 작업 지속적으로 이뤄 나갈것”
‘임은 한 송이 붉게 핀 복숭아꽃이었다. 세상의 풍랑은 거칠고 사나웠으나 임은 한 시대의 한을 온몸으로 감싸 안은 채 고결한 삶을 잃지 않았다’ 지난 4월, 그림과도 같이 아름다운 금장대 풍광아래 고졸한 명문(名文)을 새긴 ‘동도명기 홍도 최계옥’ 추모비가 제막됐다.

이 추모비에는 홍도의 생애를 기록한 것으로, (사)한국예총 경주지부를 비롯한 경주의 문화예술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지난 4월 금장대 소공원에서 제막돼 임의 넋을 위로하고 시민과 함께 기념하게 된 것.

동도 홍도 총괄 기념사업을 맡아 추모비 제막을 추진한 경주예총 최용석 회장과 신라문화진흥원 김호상 원장은 “탁월한 예술적 재능을 경주에서 발휘하고 후학양성에 정열을 바친 것을 기리고자 2014년 말부터 이 사업을 추진해왔다. 이곳 금장대에 비를 세워 시민들과의 접근성도 고려했다. 자연풍광도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문학과 예술의 상징으로서의 장소성에 의미를 부여했다” 면서 “최계옥 선생의 혈손은 없지만 경주의 예인들과 함께 영원토록 호흡할 수 있게 돼 기쁘다. 홍도 최계옥 선생에 대한 재평가 작업을 지속적으로 이뤄 나갈 계획이다”고 전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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