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 비림공원<碑林公園> 있다!

황성공원 호림정 내조선중기 이후 비석 29기 도열
복원되는 경주읍성 주변 녹지대 비림공원 조성 계획

이상욱 기자 / 2017년 03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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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성공원 호림정 내에 조선중기 이후 비석 총 29기가 조성돼 비석군을 이루고 있다.
ⓒ (주)경주신문사


경주에 조선시대 경주부(慶州府) 선정비 등 과거부터 전해오는 비석을 한 곳에 모아 놓은 ‘비림공원(碑林公園)’이 있다. 황성공원 호림정 북편에 줄지어 서있는 비석 29기가 바로 그 것.

기존 11기에 최근 경주시가 18기를 옮겨 총 29기로 늘어나면서 비석군을 형성해 비림공원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그러나 이곳은 임시로 이전해 놓은 상태. 이 비석군은 오는 9월경 복원이 완료되는 경주읍성의 동문 주변으로 옮겨질 예정이다.

경주시와 신라문화유산연구원에 따르면 경주읍성 동문과 인접한 녹지대를 경주 비림공원 부지로 선정했고, 문화재청으로부터 현상변경허가를 받은 뒤 비림 조성에 들어간다는 계획이다. 향후 조성될 비림공원으로 이전될 비석 수는 다소 유동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원 측은 호림정 내 29기는 모두 이전하기로 했지만, 현재 협의가 진행 중인 23기 가운데 이전 가능성이 높은 비석은 10여 기로 비림공원 조성 초기에는 40여 개 비석이 먼저 자리 잡을 것이라고 밝혔다. 향후 협의를 통해 추가 이전도 가능하다는 것.

비림공원이 국내서는 다소 생소하지만, 중국은 서안비림 등에 민족 전통과 문화적 가치가 높은 작품들을 돌에 새겨 보존해 고귀한 민족문화와 선대의 정신을 계승·발전시키는 문화보고(寶庫)로 통칭해 오고 있다.

이 같은 관점에서 현재 경주시가 추진 중인 경주 비림공원 조성 사업과 29기 비석을 모아 놓은 호림정 내 임시 비림이 새삼 눈에 띄고 있는 것. 경주시 일원에서 문헌조사 및 현장조사를 통해 확인한 비석은 165기. 대부분 조선 중기 이후의 선정을 베푼 관원의 덕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인 ‘선정비’다.

이중 최근까지도 노서동에서 조사 당시 포함되지 않았던 ‘부윤김상공유애비(府尹金相公遺愛碑)’가 발견됨에 따라 지역 내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는 비석은 더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흩어져 있는 비석들의 관리에 있다.

신라문화유산연구원에 따르면 지역 내 비석의 전반적인 보존 상태는 양호하지만, 25기는 상태가 극히 불량해 대책마련이 시급한 실정이다.

특히 일부 문화적 가치를 지닌 비석들이 개인소유이거나 후손이 단절된 경우 시간이 지나면서 유실되고 있고, 관리되지 않고 흩어져 있어 역사적 의의 등이 사장되고 있다는 것.

이에 따라 역사적·교육적 가치를 지닌 비석에 대한 제대로 된 관리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비림공원을 추진하게 됐다는 것이 연구원측의 설명이다.

연구원 관계자는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는 비석들이 훼손, 멸실, 도난당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비림공원은 가치 있는 문화재들을 보호하는데 가장 큰 목적이 있으며, 비석이라는 새로운 콘텐츠를 활용한 관광인프라 조성에 기여할 수 있다”고 밝혔다.

또 “현재 경주읍성 비림공원으로 이전이 확실한 비석은 39여 기로 향후 비석 소유자 또는 해당 문중 관계자 등과 협의를 통해 추가로 이전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 (주)경주신문사


-호림정 내 비석 어떤 내용 담겼나?
최근 이전한 비석 18기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642년 7월 조성된 ‘관찰사겸순찰사구상공봉서청덕인정비(觀察使兼巡察使具相公鳳瑞淸德仁政碑)’. 경주학연구원이 지난 2010년 발간한 『돌에 새긴 백성의 마음』에 기재된 비문 해설에 따르면 이 비석은 임오년(1642) 7월 송라 덕수 주민이 세웠다.

비신은 넓이 66cm, 높이 123cm, 폭 21.2cm, 비좌 100cm, 28cm, 100cm, 비개는 117cm, 70cm, 31cm.

비신(碑身)은 비석의 몸돌, 비좌(碑座)는 비신을 얹은 받침돌, 비개(碑蓋)는 머리 부분이다.
호림정으로 이전하기 전에는 배반동에 세워져 있었다.

비석 주인공에 대한 해설에 따르면 ‘관찰사 ‘구봉서’는 통정대부의 품계로, 1640년 7월 3일 부임해 임기 만료 후 유임됐고, 1942년 7월 22일 경주를 떠났다. 이 선정비는 그가 관찰사에서 이임하던 그 달에 세워졌다. 당시 경주지역에는 흉년이 들어 주민들이 기근으로 허덕이고 있었는데 당시 구봉서가 선정으로 주민들을 구제했기 때문에 비를 세웠다’고 설명했다.

동일 인물의 비석 2기가 발견되기도 했다. 1893년 6월과 7월에 세운 철비 ‘영장류공춘호영세불망비(營將柳公春浩永世不忘碑)’와 석비 ‘영장류공춘호청덕거사비(營將柳公春浩淸德去思碑)’다.

2기의 비석 비문은 같은 내용으로 ‘영장 류춘호가 부민 또는 군사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떠한 선정을 베풀었는지 알 수 없다고 해설했다.

다만 ‘빙얼(氷糵) 또는 무졸(撫卒) 등의 말이 보이는데 이는 군포 등을 징수할 때 많은 혜택을 주었으며 자신의 일에 매우 청백했고, 지방 군사를 잘 보살폈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들 비석은 효현동 소태고개에서 옮겨졌으며, 원소재지는 성건동이었다.

경주에서 마지막으로 세워진 선정비인 진위대육군참령구상공연하송덕비(鎭衛隊陸軍參領具相公然河頌德碑)도 이번에 자리를 옮겼다.

현곡면의 한 석재공장에서 이전된 이 비는 1903년 10월 고종 때 무관인 참령(정3품) 구연하를 기리기 위해 세웠다. 경주에서 참령을 위해 세운 비는 유일하고, 선정비 또는 송덕비도 이 비석 이후에는 세워지지 않았다고 한다.

비문 해설에 따르면 ‘진위대는 대한제국시대 지방의 질서유지와 변경의 수비를 목적으로 각 지방에 두었던 군대였고 구연하는 고종의 명에 따라 경주 진위대 참령으로 부임했다.

경주는 도적떼와 일본군대로 인해 잠시도 평안하지 못했던 당시 그는 이들을 일거에 몰아냈다고 한다. 이에 주민들은 구연하의 공덕을 높이 기려 그의 초상화를 모신 생사당(生祠堂)을 지으려 했지만 극구 사양한 끝에 송덕비만 세우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외에도 남득온효자비, 관찰사이상공헌영영세불망비, 관찰사조상공병현영세불망비, 부윤엄상공선정비, 좌병마절도사이상공급유애비 등 조선시대 선정을 베풀었던 관리나 효자 등을 기리는 비석 18기가 함께 호림정 내로 옮겨졌다.

ⓒ (주)경주신문사


-비림공원 조성 추진은?
경주시는 비림공원 조성을 위해 지난해 7월 용역 시행기관인 신라문화유산연구원의 중간보고회를 받고 추진 기본 방향을 설정했다.

당시 경주읍성 동문과 북문 황성공원 내 호림정 등 3개 부지 중 동문 주변 녹지대를 비림공원 조성부지로 선정했다. 이에 따라 경주읍성 복원 사업이 완료 되는대로 문화재청에 현상변경신청을 한 뒤 자문을 거쳐 최종 허가를 얻어 비림공원 조성을 본격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경주시 관계자는 “이곳 부지가 접근성이 우수하고, 경주읍성과의 시대적 관계를 고려할 때 역사성이 있는 장소”라며 “특히 새롭게 조성되는 경주읍성과 함께 도심으로 관광객을 유입할 수 있는 관광콘텐츠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또 비림공원 내 이전할 비석은 비문의 내용에 따라 청렴, 공덕, 쇄신 등으로 분류해 배치할 계획이다. 특히 비문이 한문으로 식별하기 어려운 점을 감안해 각 비석의 주인공과 그에 얽힌 스토리를 안내하는 시설물을 설치해 비석의 의미와 가치를 부각시킬 방침이다.

한편 국내서는 울진 봉평군 신라비 전시관, 공주 공산성 금서루 비석군, 창원 용지공원 비석군을 비롯해 총 23개 시·군에 비림공원 또는 비석군이 조성돼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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