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조선 스토리(7)-반구서원 관련 한강 정구의 편지글 옥산에서 발견되다

경주신문 기자 / 2017년 12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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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상욱 시민전문기자 일신서당&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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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2016년도 학술등재지 한국한문학연구 62집에 수록된 「반구서원 건립과 반구대 상징화에 대한 소고」의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서원첩설에 관한 한 사례이다. 17·18세기 조선정치는 사화와 환국의 어수선함과 중앙과 지역 간의 대립 그리고 지방유림들은 서원을 세워 지역을 선양하면서 서원첩설과 향전 등 여러 마찰이 발생되는 숨 가쁜 시절이었다. 이에 언양에서는 유림의 공조로 1712년 반구대 일원에 포은 정몽주·회재 이언적·한강 정구선생 삼현을 모신 반구서원이 건립된다.

언양유림 김지는 ‘반구서원창건록’에서 “9월 13일 나는 박문상과 함께 옥산 이 아무개 집으로 가서 한강의 간독을 고열하였다. 그리고 길일을 택하여 터를 닦았으니 10월 초4일 미시였다.(九月十三日, 不佞與朴文祥, 偕行於玉山李某家, 考閱寒岡簡牘, 而以爲涓吉開基, 十月初四日未時也.)”며 반구서원건립을 위해 옥산을 찾아 한강의 서간을 봉독한 일을 기록하였고, “1)옛날 고려 말기에 포은 정몽주선생은 권세를 가진 간신(奸臣)에게 모함을 받아 언양에 유배되어 이 석대에 소요한 자취를 남겼으니, 고상한 풍도가 어제인 듯 사람들을 전율케 한다. 2)조선조에 들어와 회재 이언적선생은 본도에 덕화를 베풀어 감당의 훌륭한 정사가 있었다. 3)한강 정구선생은 머물러 살고 싶다는 뜻을 편지 중에 드러내었다.(昔者麗季鄭圃隱先生, 爲權奸所搆, 放流彦陽, 杖屨逍遙於此臺, 高風如昨, 令人寒慄洎乎. 國朝李晦齋先生, 宣化本道, 有甘棠之憩. 鄭寒岡先生, 留念卜居, 形於簡牘之中.)”며 반구서원에 삼현을 모신 이유와 입장을 밝혔다. 위 사실을 근거로 언양유림들은 학문과 충절로 뛰어나면서 언양에 유배 온 사실을 근거로 포은선생을 서원의 주향자로 선택하였고, 회재선생은 경주 출신으로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울산을 교화시켰으며, 한강선생은 간독(簡牘)에서 머물러 살고 싶다[복거(卜居)]는 글귀 등 언양과 관련된 구체적 근거를 들어 삼현배향의 이유로 삼았다. 하지만 필자가 찾은 그 간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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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로 길을 잡아 돌아가는데, 길가에서라도 한번 뵙기를 감히 바라지 않을 수 없으나, 또한 어찌 감히 반드시 (이첨지께서) 나오시겠습니까? 반고(槃皐)의 형승(形勝)을 매우 한 번 찾아보고 싶은 마음 간절했으나, 함께 온 사람들 가운데 아는 자가 없었습니다. 언양 근처에 도착해서 사람들에게 자세히 물으니, 바로 길이 방행(傍行)해야 한다고 합니다. 잠시 머물러 지체되는 것은 개의치 않으나, 오히려 경유하는 거리가 멀고 치우쳐서 걱정이 됩니다. *‘寒岡書牘’, “取路鷄木而還 道傍一奉 不敢不望 而亦安敢必蔪也 槃皐形勝 深欲一過 而同來上下人 皆無知者 欲到彦陽近處 詢問于人 即路■傍行 不惜暫停 而猶恐距經由遠僻也”

이 글은 회재선생의 독락당에 보관된 《여주이씨 옥산문중 전적》 가운데 13. ‘한강서독(寒岡書牘)’에 실려 있으며, 1607년·1611년·1614~1618년의 서간 35통이 포함되어 있다. 『한강집』「연보」를 보면, 1617년과 1619년 7월에 동래(東萊)온천에서 목욕하고 돌아온 기록이 있으며, 옥산 이 아무개[玉山李某家]는 회재의 혈손인 이전인의 후손을 말한다. 당시 언양 유림들은 한강선생이 반구대에 머물러 살고 싶다는 뜻을 편지 중에 드러내었다 주장하였지만, 글을 살펴보면 한강 정구는 동래온천을 갔다가 경주로 돌아가는 길에 반고의 형승을 둘러보고 싶었으나, 함께 동행한 이들은 반고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하는 수 없이 언양 근처에 와서 길을 물었고, 경유하는 거리가 멀어 고민하였다.

이 간독의 글만 봐서는 한강이 반구대에 들렀는지, 아니면 그냥 계획만 세우고 가지 않았는지 확실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다만 한강의 간독에는 반고에 대한 언급만 있을 뿐, 유림의 주장처럼 반구대에 머물러 살고 싶다[卜居]는 뜻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으니, 한강선생의 경우 역시 간독구절을 확대해석하지 않았을까 판단된다. 당시 반고는 언양과 동떨어져있고, 긴 계곡이 있는 산속 깊은 곳에 위치해있어 문인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 아니었으며, 지금도 큰길에서 산길을 따라서 차를 타고도 한참을 들어가야 반구대를 만날 수 있다.

포은과 회재선생은 앞서 울산부의 구강서원에 배향된 인물로, 언양유림들은 첩설을 피하기 위해 또 다른 배향자를 찾았다. 유림들은 포은선생을 학문의 종주로 삼고, 회재선생을 퇴계의 학문에 영향을 끼친 영남학의 영수로 여겼으며, 한강선생을 퇴계의 제자로서 성리설을 이어받아 심학을 강조한 영남학파로 인정하였다.

특히 한강선생은 남명의 학풍을 이어받았지만 실상 근기학에 가까웠고, 훗날 1603년 남명 조식의 제자 정인홍(1535~1623)이 ‘남명집’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이황과 이언적을 배척한 일로 절교를 선언하면서, 자연스레 퇴계와 회재에 대한 영남학파의 입지를 굳히게 된다. 즉 한강선생은 퇴계와 남명의 학풍 가운데 남명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회재와 퇴계를 경북으로 보고, 한강과 남명을 경남으로 여겨서 경상도를 아우르는 영남학을 이뤘다. 또 동서와 남북의 분당 쟁론에 가담하지 않았으므로, 그의 제자들은 영남과 비영남을 막론하고 전국에 퍼지게 되었는데, 양동의 문인들도 그의 학문에 감화가 있었고, 이는 반구서원에 회재와 한강선생을 모시는 일과도 상당한 연관이 있었다.

우재 손중돈(1463~1529)의 후손 매호 손덕승(1659~1725)과 회재의 후손 우와 이덕표는 고유(高儒)로 이름났으며, 우재는 회재의 스승이자 외삼촌이요, 매호의 증조부 손로(1578~1649)는 한강 정구와 여헌 장현광(1554~1637)의 문인이었고, 안재 이덕현의 백부 무첨당 이의윤(1564~1597) 역시 한강의 문인이었고, 이러한 얽힘 속에 매호를 비롯한 양동문인들은 가학을 바탕으로 점필재학과 여헌학·회재학 그리고 한강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따라서 언양유림은 포은과 회재 그리고 회재와 한강의 학문적 마땅한 입장 위에 언양의 반구대와 관련된 얘기를 미화해서 반구서원 건립을 도모해 언양의 입지를 세우려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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