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함산은 신라인의 얼이 깃든 영산이었다

하성찬 시민전문 기자 / 2018년 07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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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국사를 지나 토함산으로 오르는 등산로 초입 오른쪽에 청마 시비가 있다.

“목 놓아 터뜨리고 싶은 통곡을 견디고
내 여기 한 개 돌로 눈 감고 앉았노니”

불국사를 지나 토함산 등산로로 들어서면 오른쪽에 청마 시비가 있다. 청마 유치환 선생님의 시 ‘석굴암 대불’의 일부이다. 이어지는 구절이 더 가슴을 흔든다.

“천년을 차거운 살결 아래 더욱
아련한 핏줄 흐르는 숨결을 보라……”

↑↑ 하성찬
시민전문기자
석굴암 본존불은 돌로 조각한 불상이 아니고 피가 흐르고 숨소리가 들리는 살아있는 부처님이다. 그래서 필자는 자주 토함산을 오르면서도 그때마다 이 시비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지금부터 60여 년 전 초등학교 5학년 때였으리라. 청마선생이 교장으로 재직하시는 경주중·고등학교에서 주관하는 예술제에서 동요부문에 입상한 사실이 있다. 이를 계기로 글쓰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후 교과서 등을 통해 ‘깃발’, ‘행복’ 등 청마선생 시를 만나면서 내 가슴 속 한부분에는 늘 선생님이 자리하고 있다.

경주의 동쪽을 둘러싸고 있는 토함산은 높이 745m로 경주에서는 단석산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산이다. 신라인의 얼이 깃든 영산으로 오악의 하나인 동악(東岳)인 이 산을 지역에서는 동산 또는 웃봉만댕이라고도 하였다. 토함산은 예로부터 불교의 성지로 자리 잡아 산 전체가 마치 하나의 유적지로 보일 만큼 유물과 유적이 많다.

정상 부근에 동악의 신으로 숭앙하던 탈해왕의 사당이 있었고, 동남쪽으로 내려가면 석굴암이 있다. 동쪽 산허리에는 장항리사지, 서쪽 기슭에는 동리목월문학관과 불국사, 그 아래로 마동삼층석탑이 있고, 더 아래로 내려가면 구정동 방형분, 남쪽으로 내려가면 감산사지와 원성왕릉, 숭복사지 등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나라 불교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불국사와 석굴암을 포함한 이곳은 지리산에 이어 1968년 두 번째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경주국립공원 8개 지구 중 토함산지구이다. 경주국립공원지구는 우리나라 전체 19개 국립공원 중 유일한 사적형 공원이다.

토함산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설이 있다.
첫째, 동해에서 불어오는 습기를 머금은 바람으로 인해 산 정상에 자주 운무(雲霧)가 끼고 걷히기를 반복하는데 이 모습이 ‘마치 산이 안개를 삼키고 토하는 것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둘째, 토함산 신령이 되었다는 신라 제4대 임금인 석탈해왕의 이름 ‘토해(吐解)’가 ‘토함’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탈해(脫解)를 토해라고도 한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삼국유사』 「왕력」편 ‘탈해왕’조에 의하면 탈해가 죽자 뼈를 빻아서 소상(塑像)을 만들어 대궐 안에 모셔 두었는데 문무왕 20년(680)에 왕의 꿈에 “내가 탈해이다. 내 뼈를 소천구에서 파내어 소상을 만들어 토함산에 안치하도록 하라”는 계시를 받고 토함산 정상에 사당을 지어 모셨는데. 이후 탈해왕이 동악신(東岳神)이 되었다고 한다.

셋째, 토함산에 화산의 분출이 있었는데 그 불을 뿜는 모습에서 토함산이라는 명칭이 생겼다는 설도 있다. 경주 민속 공예촌 부근에서 토함산 정상을 향해 오르면 만호봉(470m)에 이르게 된다. 이 봉우리 주위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많은 돌을 볼 수 있다. 검은색의 현무암과는 달리 빛깔이 희다. 또 여기저기 까만 흙들이 보인다. 화산 분출의 흔적임이 분명한데,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무열왕’편 4년(657) 7월 기록에 ‘東吐含山地 燃三年而減’이라는 구절이다. 동쪽 토함산의 땅이 타기 시작하여 그 불길이 3년 만에 없어졌다는 것이다.

토함산은 동해에서 경주 시내를 잇는 가장 짧은 거리에 위치하여 신라시대에는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A.D.14년(남해차차웅 11)에 낙랑이 금성을 공격하다 물러가자 6부의 군사 1000명으로 추격했는데, 토함산에서 알천에 이르기까지 돌무더기가 많은 것을 발견하고 적이 많다고 여겨 중단했다고 한다. 이는 토함산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이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토함산에 대한 기록이 꽤 나오며, 중사(中祀)를 지내는 5악 중 동악(東嶽)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토함산이 “부의 동쪽 30리에 있는데, 신라 때 동악(東嶽)이라 일컫고 중사(中祀)를 거행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금오산과 형산은 나오는데 토함산은 언급이 없다. 이후의 경주부 읍지나 지도에는 대부분 토함산이 표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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