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 특집(3)-정무공 정신 깃든 경주최부자 가문과 동학

노비를 제사 지내고 노비를 며느리·수양딸로 삼고···
경주최부자 가문의 정신적 효시 최진립 장군과 방계 조상 최제우 선생

박근영 기자 / 2019년 03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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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촌 경주최부자댁과 정무공 최진립 장군.

3·1 만세운동과 관련한 동학과 천도교의 역할 및 비중에 대해 전편에서 소개했다. 그러나 이 동학이 경주의 전통 명가로서 10대 이상에 걸쳐 나눔과 상생을 이어온 경주최부자 가문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는 사실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수운 최제우는 경주최부자 가문의 정신적 지주이자 효시로 알려져 있는 정무공 최진립(1568∼1636)장군의 후손이다.

최진립은 임진왜란 당시 젊은 나이로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고 무공을 인정받아 2등 선무공신에 오르며 무인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이후 북방과 주요 수영을 지키거나 총괄하는 요직을 거쳤다. 병자호란 때 공주영장 신분으로 경기도 험천(지금의 용인) 전투에 참가했다가 69세의 나이로 순절한 충신이다. 청백리로 이름 높았으며 훌륭한 가풍을 전해 경주최부자 가문의 정신적 기반을 만들었다. 특히 신분의 차별을 뛰어 넘는 포용력으로 충노 기별과 옥동의 일화를 남겼다. 내남면 이조리에 있는 정무공 종가와 관련 유적들에는 최진립의 면모를 볼 수 있는 동상과 기념관, 충노비와 충노각 등이 있고, 무인이자 유학자인 장군의 학식과 덕을 추모해 세운 용산서원과 신도비가 있다. 최진립의 직계는 첫째 아들 최동윤으로 시작해 현재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 최채량 선생까지 이른다.

경주최부자 가문은 최진립의 셋째 아들인 최동량의 후손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최동량의 맏아들인 최국선에서 부를 쌓았고 다시 최국선의 둘째 아들인 최의기 쪽으로 이어지며 경주최부자의 명성을 일으킨다. 족보상으로 따지면 최제우는 현재 경주최부자 가문의 종손인 최염 선생의 방계 6대조다.

-경주최부자는 최진립 장군의 셋째 아들, 최제우 선생은 넷째 아들의 후예
최제우는 최진립의 넷째 아들인 최동길의 후예다. 최동길은 최진립의 형이 후사가 없어 양자로 가면서 공식적으로는 최진립 가계에서 벗어났지만 혈통상으로는 그의 후손이다. 최제우는 최동길의 7대손이다.

최진립과 최제우는 신분 차별을 타파했다는 점에서 묘한 평행이론을 이룬다. 최진립은 무공을 뒤늦게 추가로 인정받아 숙종 대에 이르러 불천위(不遷位)가 됐다. 불천위란 국가에서 훌륭한 인물로 인정해 후손대대로 제사를 받들도록 규정한 것을 말한다. 그런데 최진립의 제사 때는 반드시 그의 노비인 기별과 옥동의 제사를 함께 지낸다. 기별과 옥동은 평생 동안 최진립을 모시던 노비들이며, 이 중 옥동은 노비의 몸으로 주인과 함께 전투에 참여해 장렬한 최후를 맞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진립 가계의 후손들은 이들 노비의 충열을 기려 최진립 장군의 제사를 지낼 때면 반드시 두 노비의 제사를 함께 지내왔다. 양반과 상놈의 신분차별이 엄존하던 시대 최진립 가계의 후손들이 이 전통을 지금까지 고수하고 있는 것은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최제우가 도를 터득한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노비문서를 태우고 노비들을 해방시킨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여자 노비 둘 중 한 명을 며느리로 삼고 한 명은 수양딸로 삼는다. 역시 신분의 구별이 분명하던 시대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파격적인 일이다. 최진립의 제사는 불천위가 되면서 후손 전체의 대제(大祭)가 되었으니, 최제우가 집안의 전통에서 특별한 감흥을 받은 것이라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최제우는 스스로도 신분차별의 희생양이기도 했기에 신분차별에 대해 더 적극적이었을 수도 있다.

그것은 어머니 한 씨가 재가녀였기 때문으로 최제우의 아버지 최옥이 63세 때 여행 중 주막집에서 만난 한 씨와 관계해 최제우를 낳았기 때문이다. 최옥은 후사가 없어 아내를 둘이나 맞았지만 실패했다가 우연히 한 씨에게서 최제우를 얻었지만, 한씨는 최제우가 7~8살에 이르도록 이를 숨겼다가 뒤늦게 아들을 최옥에게 맡기고 사라졌다. 그러나 그 사이 최옥은 집안에서 양자를 얻어 공식적인 후계 구도를 정하고 있던 터라 최제우의 입장이 순탄치 않았고, 이런 분위기가 최제우로 하여금 신분타파에 대한 분명한 타파의식을 가지게 하는 계기로 작용했을 수 있다. 동학이 정부에 내건 화약내용 중 신분철폐와 신분과 연령, 성별을 떠나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는 사상은 신분제도에 대한 최제우의 경험적 가르침이 깔려 있다고 봐야 한다.

-사방백리에 굶어죽는 사람 없게 하라, 과객을 후히 대접하라···경주최부자 정신이 독립운동으로 이어져
이런 가르침 때문인지 경주최부자 가문 역시 신분타파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유의가 남다르다. ‘사방백리에 굶주린 사람 없게 하라, 과객을 후히 대접하라, 만석 이상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라, 며느리 삼년 무명옷 입게 하라’ 등 유명한 육훈 내용 외에도 아랫사람들 배불리 먹여라, 파시에 장보지 말라 등의 교훈이 전하는 것은 모두 모두 상생과 나눔의 가르침이 깔린 것이고 전통적으로 족보상에 적서의 구별을 하지 않는 것도 경주최부자 가문의 특징이다.

이러한 집안계보 탓에 동학 3대 교주인 손병희(1862~1922)는 마지막 경주최부자인 문파 최준(1884~1970)을 매우 존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이 상으로는 22세나 많았지만 늘 공경했고 최준에게 수시로 ‘동학은 경주 최씨와 최부자 가문의 가르침’이라며 예우했다고 전한다. 경주최씨, 그중 최진립으로 시작되는 가계도를 이해하고 있었기에 이런 표현을 했을 것이다.

손병희는 전편의 기사에서 언급했듯 3·1운동을 계획하며 대한제국 자신이 운영하던 보성전문을 최준이 맡아 운영해 줄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최준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 한다.

두 사람은 상의 끝에 전라도 대지주의 아들이자 한창 사업가로 명망을 떨치던 인촌 김성수(1891~1955)를 설득한 끝에 보성전문을 인수하게 한다. 그러나 김성수는 당장 보성전문을 인수할 만큼의 자금이 없어 대지주인 아버지에게 달려가 재산을 할애해 줄 것을 요청하지만 쉽게 승낙을 얻지 못한다. 급기야 방문을 안으로 닫아걸고 단신투쟁을 벌인 끝에 재산을 상속 받아 학교 인수에 성공한다. 보성전문은 지금 고려대학교의 전신이다.

그렇다면 최준은 왜 보성전문을 인수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최준 역시 독립운동과 관련해 매우 큰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백산무역주식회사를 차려 조국독립을 위한 자금줄 역할을 하고자 계획하고 있었던 것.

백산무역주식회사 창립이 3·1운동과 더불어 올해 100주년을 맞는다. 1919년 1월 14일 설립 인가가 났고 5월 28자로 첫 번째 주주총회를 열었다. 다음 호에서는 백산무역주식회사가 독립운동사에 미친 영향과 경주최부자 가문의 독립운동을 소개할 예정이다.










◀*박근영 기자가 쓴 ‘The 큰 바보 경주최부자’에서 동학과 경주최부자 정신을 더 자세히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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