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당 김시습이 바라본 불국사의 공간인식
경주신문 기자 / 2019년 12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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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상욱 시민전문기자 경북고전번역연구원장 |
그의 문학작품은 매우 빼어났으며, 추강 남효온은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에서 “그가 지은 시문은 수만여 편이나 되었는데,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사이에 거의 다 흩어져 없어졌다. 조정의 신하들과 선배들이 혹은 그의 글을 절취하여 마치 자기작품인양 하기도 하였다.”며 개탄하였다.
시대를 막론하고 수많은 문인들이 불국사를 유람하고 다양한 표현방식으로 자신의 소견을 표출하며 시문(詩文)을 남겼다.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1664~1732)는 식산집별집 권4, 「地行錄[十]․東都雜錄」에서 “양나라 보통 원년에 지증왕이 사신을 보내 양나라와 우호관계를 맺으려 했다.
이때에 불법이 비로소 우리나라에 전해졌다.… 점점 불당이 성행해져서 왕실과 민간의 촌락에 혼재함은 이루다 기록할 수 없다. 지금 남아있는 것 가운데 월성과 가까운 곳은 부의 동쪽에 분황사가 있고, 부의 북쪽에 백률사가 있다. 멀리는 함월산에 기림사가 있고, 토함산에 불국사가 있다. 불국사의 석교와 석탑은 바로 처음 창건할 때 세워진 것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리고 당주(鐺洲) 박종(朴琮,1735~1793)은 『당주집』권14,「유록·東京遊錄」에서 “지금은 법흥왕 27년으로부터 1240년이 되었으니, 절이 흥하고 폐함이 얼마나 오랜 세월을 지났는지 모르겠다. 석물과 누전(樓殿) 가운데 열이 없어지고 하나가 남아있는 것도 오히려 이와 같이 기이하고 아름다우니, 신라가 처음 이 절을 창건한 당시의 성대함을 대개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며 신라 불교의 유입과 당시 불국사의 아름다움과 성대함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였다.
『매월당시집』권12,「시·유금오록(遊金鰲錄)」에는 106제(題) 146수(首)의 시가 실려 있으며, 「금오록」을 따로 지을 만큼 경주에 대한 애착이 깊었고, 불국사를 불국토의 성지(聖地)로 인식하였다.
斲石爲梯壓小池(斲石爲梯壓小池) 돌을 깎아 만든 층계는 작은 연못을 압도하고
高低樓閣映漣漪(高低樓閣映漣漪) 높고 낮은 누각들이 잔물결에 비치네
昔人好事歸何處(昔人好事歸何處) 옛날 호사가(好事家)들은 어디로 갔는지?
世上空留世上奇(世上空留世上奇) 부질없이 세상의 기이함만 남았네
秦宮隋殿魏招提(秦宮隋殿魏招提) 진·수나라의 궁전과 위나라의 사찰은
剩得當時俗眼迷(剩得當時俗眼迷) 더군다나 당시 사람의 안목을 미혹시켰고
人去代殊俱寂寞(人去代殊俱寂寞) 사람 가고 세대 달라져 모두 적막하건만
夕陽唯有老烏栖(夕陽唯有老烏栖) 해질 무렵 오직 까마귀만 하늘을 맴도네
수련(首聯), 돌을 깎아 만든 층계는 청운교(靑雲橋)·백운교(白雲橋) 등을 말하며, 경내로 흘러 들어오는 잔잔한 유속의 연못에 불국사 누각(樓閣)의 반영(反影)이 아름답다. 특히 매월당은 돌층계 아래에 연못이 있었음을 기술한다. 함련(頷聯), 말하길 좋아하는 호사가들은 모두 어디를 갔는지? 이토록 아름다운 불국사 건축물과 그에 얽힌 기이한 스토리 등을 설파하지 않는 아쉬움을 토로한다. 경련(頸聯), 진·수나라의 화려한 궁궐과 위나라 사찰의 웅장하고 화려한 위용은 사람들의 안목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하지만, 불국사 역시 이에 버금가는 건축물임을 드러내었다. 불국사 창건에 관한 여러 설 가운데 눌지왕 때 아도화상(阿道和尙)이 불국사를 창건하고, 경덕왕 때 재상 김대성이 크게 개수하였다고 본다면, 5세기 아도화상과 위나라를 연관 짓는 것은 무리가 없을 듯하다. 미련(尾聯), 그토록 웅장했던 불국사가 안타깝게도 적막함 속에 까마귀만 날아다니는 을씨년스러운 공간으로 변하였다. 굳이 까마귀를 통해 전달하고자 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절 까마귀도 3년이면 염불한다.’는 속담이 있듯, 흉조로 알려진 까마귀 역시 불국사에 깃들어 사는 소중한 생명으로, 찬란한 신라의 불교문화를 대변하는 불국사가 완전히 황폐해져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희망을 암시한것이 아닐까 자문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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