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경주, 마지막 과거 문과 급제자 수헌(脩軒) 최현필(崔鉉弼) 선생

구한말 한일합방 격동기 거치며 선비의 지조와 유학적 전통 지켜

선애경 문화전문 기자 / 2020년 10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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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처에 보관돼 있는 수헌 선생의 유고와 자료들.

조선은 유교의 역사이며 이는 과거제도로서 지탱돼 왔다. 그러나 고종 31년(갑오년, 1894년) 격동속에서 갑오경장을 맞아 고려 958년(광종 9)부터 이어진 과거제는 막을 내린다.

경주에서는 1894년 과거제 폐지 직전인 1891년에 조선시대 마지막 문과에 급제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수헌(脩軒) 최현필(崔鉉弼) 선생이다. 당시 갑오지사라는 말이 있을만큼 마지막 과거장이 매우 문란했으나 선생은 워낙 출중한 실력으로 당당히 급제한다.

조선조 개국부터 과거제가 폐지된 1894년 갑오경장까지 502년간, 경주에서 문과 급제자는 전체 70여 명 남짓하다고 한다. 수헌 선생 이외에도 문과 급제자들이 더러 나왔으나 선생만큼 많은 활동을 하고 저서를 남긴 이는 드물다. 선생은 족중 뿐 만 아니라 영남일원에서도 문명(文名)이 드높았다. 마지막 과거 급제자로 유일한 생존자였고 학문이나 덕망으로 존경받아 도산서원의 원장을 맡았는가하면, 타문중이라도 행사나 문제가 있을때는 언제나 주관하고 조정했으며 문회나 시회 등 유림과의 제반사에 명실공히 동량(棟樑)이었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 수헌문집.

 수헌문집 후기에서 손자 최상협은 ‘조부님께서 살고 가신 세대는 근세와 현대, 봉건과 개방이 상충하는 풍운기여서 급변하는 정세와 함께 가치관의 급격한 경도를 피부로 체험하신 시기였다. 망국의 비탄에 통곡하는 가난한 한 사람의 벼슬아치가 일체의 외장(外裝)을 벗어 던지고 자연에 귀의하여 그 고난의 세대를 수신하고 처세하면서 진정 선비답게 군자의 도를 어떻게 지키고 가셨나를 짐작할 수 있다’고 썼다.

선생은 숭혜전지 서문, 사마소 중건기, 근암문집 발문, 김유신 장군 재실 현판, 최씨 대동보 서문 등 수많은 글과 글씨를 남겼으며 유집으로 ‘수헌문집’이 있다. 경주 하동에 묘소가 있으며 수많은 글과 선생의 저술들이 아직 빛을 보지 못하고 쌓여있어 해제 및 연구가 시급해 보인다.

본 기사는 후손 최형대 선생((사)경주발전협의회 회장)이 제공한 ‘수헌문집(영인본, 1책, 1988년)’과 인터뷰, 조철제 경주문화원장의『경주문집해제(경주문화원, 2004, ‘수헌문집(脩軒文集)/ 최현필)』와 인터뷰를 바탕으로 재구성해 보았다.

↑↑ 모처에 보관돼 있는 수헌 선생의 유고와 자료들.

-수헌 최현필 1860년 현곡면 종동에서 출생하고 을사보호조약때는 사람 대하기가 부끄럽다하시고 이목과 내객이 많은 교리 피해 한촌(寒村) 구황리로 이주

수헌 최현필은 최동길의 후손으로, 1860년 현곡면 남사리 종동에서 최교수의 독자로 태어났으나 5세 때 큰아버지 종남(鍾南) 최하수의 후사로 들어간다. 어머니는 월성이씨였다. 자는 희길(羲吉) 호는 수헌(脩軒)이다. 뒷날 향교가 있는 교리에 옮겨와 살았는데 수헌문집 서문의 ‘교리사(校里肆)’가 그곳이다. 그러나 선생은 교리에서 다시 가족을 데리고 구황리로 가서 살았다고 한다. 구황리에 아들이 살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수헌문집에서 당시의 정황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신께서 급제하신데 대한 이야기는 단 한 말씀도 들은 기억이 없습니다. 짐작하건대 망국의 한과 사직하시고 하향하실때의 쓰라렸던 기억을 되씹기 괴로워 아예 묻어버리신 건지도 모릅니다. 또한 때가 아닐 때 등과(登科) 하신 것을 후회하시고 조신(朝臣)으로서 망국을 막지 못했다는 죄의식에 고민하셨습니다. 그래서 을사보호조약때는 사람을 대하기가 부끄럽다하시고 이목과 내객이 많은 교리를 피해 한촌(寒村) 구황리로 이주했습니다. 급기야는 한일합방의 비극을 맞자 더욱 깊숙히 보문리로 다시 이주해 일체 외부와의 접촉을 끊으시고 칩거하셨습니다’

갑자년(1924)에 지은 사상재(泗上齋) 모성계안(慕聖契案)에서 그의 당시 주소는 내동면 보문으로 적었으나 만년에는 다시 교리에 돌아온다.

↑↑ 수헌 선생의 친필(사진제공: 조철제 경주문화원장).

-1894년 갑오경장 과거제 폐지 직전, 1891년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 부정자에 올라...한일합방되자 의분으로 통곡하고 식음 폐하고 피 토하며 쓰러져

선생은 어려서부터 재능이 뚜렷하고 재주가 뛰어났다. 종남공이 글을 가르치자 한 번 읽으면 곧 외웠고 8세 때 능히 글을 지어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13세 때는 사서와 삼경을 두루 읽어서 통했다. 16세때 경주부에서 실시한 백일장에 들어가 응시를 요청하자 부윤이 기특하게 여기고 허락했는데 잠시 후 그는 붓을 잡고 시권(과거응시자들이 제출한 답안지 혹은 채점지)을 제출하니 부윤이 크게 칭찬하고 이로써 재명(才名)을 크게 떨치게 된다.

또 효성이 매우 지극해 어버이를 섬길 때 조금도 뜻에 어긋남이 없었다. 종남공이 돌아가셔서 겨우 장례를 마치자 다시 본생(本生) 아버지 상을 입었는데 슬픔을 지나치게 하면서 상제를 모두 예법에 따라 행했다. 본래 매우 가난하여 집안의 여러 가지 일을 직접 주간했으나 독서를 거두는 일은 없었다. 경사는 물론 제자의 글을 두루 읽고 그 정수를 터득했으니, 마침내 1891년 문과에 급제한다.

후손 최형대 선생은 이즈음의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전해지기로는, 현곡에서도 재주가 뛰어나 교촌 최부잣집 인근에 살면서 최준 선생의 스승으로 역할했다고 합니다. 이는 ‘최준은 최현필에게 사사를 받고’ 라는 기록에서 연유합니다. 최준과 함께 서울 과거 시험까지 봐주기로 했는데 과거를 함께 보자는 제안으로 선생도 응시했고 대과(문과)에 급제한 것입니다. 당시, 경주에서 급제자가 나왔다고 하니 당연히 최부잣집인 줄 알았으나 최현필 선생이셨습니다. 최부잣집에서 미리 준비해 둔 잔치음식은 흔쾌히 옮겨서 전부 수헌 선생댁으로 보내주었다지요”

급제한 후 선생은 승문원 부정자에 오른다. 그러나 갑오년(1894) 이후 세상이 날로 어지러워지자 벼슬에 뜻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독서와 과농(課農)으로 자신을 위한 계책으로 삼는다. 1905년 일본이 조선의 외교권을 강제 박탈하는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하고 크게 탄식한다.

마침내 1910년 나라가 망하자 그는 의분으로 통곡하고 밤낮으로 식음을 폐하고 잠도 자지 않았다. 큰 잔으로 몇 잔의 술을 들이마시고 제갈량이 지은 ‘출사표’를 한 번 외운 뒤, 피를 몇 사발 토하고 쓰러졌다. 이후로 두문불출하고 스스로 몸을 삼갔다. 나라 잃은 신민(臣民)으로서 동지 몇 사람과 같이 후학을 가르치고 강학을 개설해 학문에 더욱 힘쓰게 했다. 1918년 고종이 승하하자 두문절식하고 곡위(哭位)를 차려두고 성복하여 슬퍼했고 국장 때 유신(遺臣)으로 달려가 통곡했었다. 고별의 예를 치뤘던 것으로 선생의 그 절통한 한을 상상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 수헌 최현필 선생의 과거 답안지.

-1988년 드디어 '수헌문집(脩軒文集)' 간행 돼... 시(詩) 455, 서(書) 106, 서(序) 59, 기(記) 56, 발문과 상량문 등 46, 제문과 축문 등 91, 행장과 유사 등 42, 묘갈명 105편 수록

수헌 선생은 평소 말과 행동을 조심하며 서두르지 않았고 세상의 명리나 사물에 마음 두지 않았다. 선조에게 제사 지내면 그 효성을 다했고 자제를 가르칠 때 재능과 분수에 따라 알맞게 지도했다.

어버이 장례 때 산송(山訟, 묏자리 다툼)이 일어났는데, 그는 지극한 효성과 슬픔으로 상대를 감동시켜 해결했다. 그러므로 그는 명망과 덕이 높아서 당시 사람들의 기문, 상량문, 묘갈명 등 천유(闡幽, 숨겨 있는 좋은 행실을 천양함)의 글이 그의 의해 지어진 것이 많았고 이를 얻은 사람들은 영예로 여기며 간직했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앞서 남들의 간청에 따라 남긴 글이 매우 많았으나 그의 사후 이들 유고를 정리하지 못했다. 해방과 혼란, 그리고 민족상잔이었던 한국전쟁 등으로 사회는 극도로 혼란했고 그러는 사이 수헌의 유고는 점차 흩어진다. 수헌의 둘째 아들 최영우는 이를 안타깝게 여기고 유고를 수합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모은 글을 시(詩), 서(書),제문(祭文) 등으로 분류하고 초서는 읽기 쉬운 필체로 바꿔 써 모두 8권으로 묶었다.

간행을 서둘러 마침내 1984년 6월 경주향교 명륜당에서 수헌문집발행발기회를 조직하고 아직 수합되지 않는 유고를 모으며 활동했으나 1987년 최영우가 죽은 뒤 결실을 보지 못했다. 이에, 수헌의 손자 최상협이 직접 필사하면서 주간하고 1988년 드디어 '수헌문집(脩軒文集)'을 간행하기에 이른다. 문집에는 시(詩) 455, 서(書) 106, 서(序) 59, 기(記) 56, 발문과 상량문 등 46, 제문과 축문 등 91, 행장과 유사 등 42, 묘갈명 105편이 수록되어 있다. 조철제 경주문화원장은 “그러나 이 속에 수헌의 학문적 사상을 읽을 수 있는 잡저(雜著)나 기행문, 시국에 관한 글이 보이지 않아 아쉬웠습니다. 더구나 일정 때의 참담한 현실과 통분의 탄식, 저들에 대한 불의를 명종(鳴鐘)한 글이 분명 있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이러한 글을 더 발굴해야 할 것이지만 우선 그의 여러 저술에서 그의 학문적 세계를 논구(論究)하는 일부터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 후손 최형대 선생이 유고를 살피고 있다.

-권위 떠난 진실한 선생의 위상은 장례기간이 한 달을 넘는 유림장으로 증명돼...동리 전체가 장례에 매달릴 정도

문집에서 손자 최상협은 “매일같이 찾아오는 그 많은 문객들을 대하시는 모습이나 중인, 상민, 하인, 노비에 이르기까지 따뜻하게 미소지으며 추호도 차별이 없으셨습니다. 또 중인 신분의 사람들이 글을 청해도 기꺼이 내리셨습니다. 명절때면 그들이 다투어 찾아와 뜰아래에서 문안을 드리는 모습은 어느 양반댁에서도 볼 수 없는 우리집에서만 볼 수 있는 흐뭇한 광경이었습니다”라며 선생의 인품을 회고했다. 모든 권위를 떠난 진실한 선생의 위상은 장례 광경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당시 매우 존경받는 유림이었으므로 장례기간이 한 달을 넘는 유월장으로 장사를 지낼 정도였다.

향년 78세로 귀천한 진정 군자의 대왕생이었는데 교리의 객택사랑은 한 달 남짓 조객들의 숙소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동리 전체가 장례에 매달릴 정도였다고. 장례행렬은 교리에서 첨성대를 지나 반월성을 끼고 안압지, 불국사역이 있는 소정까지 삼십리정, 거기서 불국사행 도로를 따라 하곡까지 형형색색 수백의 만장들을 휘날리며 영구를 인도했다고 전한다.

↑↑ 고종황제 교지.

조철제 문화원장은 “수헌 선생은 평소에 존경했던 분입니다. 선생의 생애 당시는,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조선시대 전통이 붕괴되고 새로운 질서가 대두되는 시기였습니다. 각 문중은 억압받다가 개방이 돼 새로운 가문의 양상이 펼쳐지는 한복판을 사신 분이셨지요. 경주에 계셨고 어지러운 시대에 태어나 억울할 정도로 자신의 포부를 다 펼치지 못하셨지요. 구한말 한일합방의 격동기를 거치면서 선비의 지조, 체통과 유학적 전통을 지키기가 어느 시대보다 어려웠을 것이고 자신의 사상을 글을 통해 웅변한 듯합니다. 무너져가는 전통사회 양상을 지키려했던 경주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을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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