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천년의 궁성이 있었던 월성(3)

하성찬 시민전문 기자 / 2024년 05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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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월성 북쪽 해자. 남쪽은 남천이 자연 해자 구실을 하고 있다. 3~4 해자에서 확인된 동물뼈, 해자 호안의 목재구조

월성 주위에 해자(垓子)가 있었다.

↑↑ 하성찬 시민전문기자
해자는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성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로, 월성의 해자에 대한 발굴조사는 1980년대부터 최근까지 여러 차례 이뤄졌다.

해자는 내부와 외부의 경계, 외부의 침입 방지, 식수 확보 및 오수 배출, 물자 운반, 연못이나 원지 등의 조경시설 등 다양한 역할을 한다.

월성 해자는 성의 남쪽은 자연 하천인 남천을 활용하고 나머지 부분은 인위적인 도랑을 파서 만들었다. 그런데 남천을 해자로 이용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수량이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갈수기에는 거의 바닥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곳 남면은 비교적 경사가 급해서 만약 침입자가 경사면을 기어 오른다면 쉽게 제압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일부 경사가 완만한 곳은 평소 경계를 강화하여 이를 보완하였을 것이다.

월성의 남쪽을 제외한 삼면은 시기에 따라 돌을 사용한 석축해자(최대 길이 약 150m, 최대폭 약 50m, 석축 최대높이 0.8m)와 돌을 사용하지 않은 수혈해자(최대폭 약 58m, 최대 깊이 1.8m)로 구분된다. 먼저 땅을 파서 돌 없이 도랑을 만들어 사용하다가 그 위에 석벽을 쌓아 올려 이를 보완하였다. 월성 북쪽의 해자는 물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다가 남천으로 이어지도록 만들었다. 돌을 이용하지 않은 수혈해자에서 5~7세기대 유물이 나왔고, 석축해자에서는 8~9세기대 유물이 나왔다.

이곳 월지의 해자는 사람이 못 건널 정도로 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해자에서 출토된 가시연꽃의 존재로 보아 해자 바닥이 거의 뻘층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쉽게 건널 수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80년대에 해자의 대략적인 규모를 파악하기 위한 시굴조사를 시작한 이후 1999년부터 2010년까지는 해자의 형태, 축조 기법을 파악하기 위한 발굴조사를 하고, 2015년부터 2021년까지는 해자의 변천과정, 옛날의 환경, 주변의 건축물과의 관계를 밝히기 위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지금까지의 발굴조사 결과 월성의 해자는 두 차례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4세기 후반에는 월성의 방어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수혈해자를 만들고 5세기 전반에는 판자벽을 설치하여 재정비했다. 7세기 후반 삼국통일 무렵 월성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석재로 호안을 두른 석축해자로 변화하였다. 석축해자는 총 7개의 독립된 담수시설로 확인되었으며, 입수구와 출수구로 서로 연결되어 있어 서쪽 방향으로 물이 자연스럽게 흐를 수 있도록 하였다.

이곳 해자에서는 발굴과정에서 각종 씨앗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다양한 식물 유체가 출토되었다. 땅속에서 썩지 않고 남겨진 이와같은 식물의 잔해는 육안으로 식별이 가능한 씨나 열매에서부터 맨눈으로 볼 수 없는 꽃가루에 이르기까지 여러 형태로 발견되고 있다. 특히 수생식물인 가시연꽃 씨앗은 옛 월성해자의 모습을 추정해 볼 수 있고 당시 신라인들이 식물을 어떻게 이용했는지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 이곳 해자에서 약 80m에 이르는 목재 구조물이 확인되었다. 이 구조물에 이용된 나무를 분석하면 당시의 식물 환경을 알 수 있다. 출토된 목재 구조물의 나무 조직을 현미경을 통해 분석한 결과 사용된 나무는 참나무가 가장 많았다. 이외에도 소나무, 굴피나무, 물푸레나무, 벚나무, 느릅나무, 느티나무 등 다양한 나무를 이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뿐만 아니라 이곳 해자에서 확인된 동물로는 멧돼지, 사슴 등의 야생동물, 소, 말, 개와 같은 가축이 많고, 심지어 강치, 상어, 돌고래 등의 바다 동물도 있었다.

또, 해자에서 나온 동물 뼈는 당시 신라 사람들이 동물을 어떻게 이용했는지 알 수 있는 단서가 된다. 그중 곰은 신라 시대 유적에서 최초로 확인된 동물이다. 곰의 뼈는 가죽을 얻기 위해 해체하면서 남은 흔적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이 뼈는 반달가슴곰의 뼈와 유사한 것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된 군대의 깃발을 만들 때 곰 가죽을 이용했다는 내용이 고고학 자료로 확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곳 해자에서 복골(卜骨)이 출토되기도 했다. 이와같이 해자 속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신라 사람들의 먹거리에서부터 도구의 재료, 신앙생활을 일부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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