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곡면 남계정사를 찾아서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7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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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상욱 시민전문기자
경북고전번역연구원장
경주에서 현곡면 남사저수지를 지나 왼쪽 남사리로 접어들면 작은 물길을 따라 경주최씨 외와(畏窩) 최림(崔琳,1779~1841)을 배향한 남계정사(南溪精舍)가 나타난다.

조부 최경위(崔慶煒)는 최종륜(崔宗崙), 최종락(崔宗洛), 최종연(崔宗演) 등을 두었고, 최종륜은 밀양박씨 박재엽(朴再燁)의 따님과 혼인해 최림을 낳았다. 최림은 정조 3년(1779) 11월 12일에 현곡 구산(龜山) 아래 옛집에서 나고 자랐고, 현종 7년(1841) 10월 23일에 타계해 현곡 은선암(隱仙庵) 선영에 묻혔으며, 남계정사에서 후손들이 그의 뜻을 기리고 있다.

그는 어린 나이 5살에 모친상을 당하였고, 22세에 경시(慶試) 복시(覆試)를 보았다. 딱히 과거에 뜻이 없는 그는 45세에 부친상을 당하고 나서 과거공부를 접고, 청도 운문산 공암(孔巖)에 은거하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성력(星歷)‧병학(兵學)‧기수(箕數)에 모두 통달하였고, 선비로써 위기지학과 수신에 힘썼다.

「공암산수기(孔巖山水記)」에서 “청도 여러 산은 경주에서 시작되고, 경주의 여러 산은 소백산에 이어진다. 소백산은 순흥에 있고, 그곳에 백운동이 있으니, 회헌 안향이 살던 곳이다”라고 말하면서, 안동의 퇴계와 경주의 회재의 연관성을 언급하고, 청도 공암의 산수 역시 경주부의 서쪽 계곡에서 발현된 것이라 말하며 자신이 청도에 머문 연유를 빗대어 설명했다.

스승 강재(剛齋) 송치규(宋穉圭)와 인연은 45세에 회현(懷縣)의 오동(鰲洞:오촌)으로 송치규를 찾아가 4~5일을 머물렀고, 54세에 다시 송치규를 뵈었으며, 이듬해 문인 배영(裵泳)과 도산서원을 찾아 퇴계학의 연원을 살폈다. 62세 늦은 나이에 관찰사의 추천으로 선공감 가감역관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처사문인으로 평생을 벼슬하지 않았다.

송병선은 「서문」에서, “문(文)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그의 경우 도리(道里)가 있기 때문이다. 문이 있으면서 도리가 아닌 것이 어찌 문이 되기에 충분하겠는가. 군자께서 그러한 연유를 알았기에 반드시 그 근본을 중히 여기고 그 말단을 가볍게 여겼었다. 근본에 힘쓰고 말단을 얻는 자가 굳이 그것이 있더라도, 근본을 얻지 못하고서 말단에 능한 경우는 아직 있지 않다. 때문에 ‘덕이 있는 자는 반드시 훌륭한 말이 있다’라고 하였으니 외와 최 공이 이에 가까울 것이다”라고 그의 인품 됨을 언급하였다. 어려서 수재로 알려진 그는 이미 7세에 글을 지을 줄 알았고, 10세에 인(仁)이 되는 효제(孝悌)의 근본을 좌우명으로 적어 실천하였다. 교유한 인물로는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 과재(過齋) 정만석(鄭晩錫), 안윤일(安允一) 등이 있다. 

손자 최세현(崔世顯)과 증손 최임수(崔任壽)가 유문을 정리하였고, 종손 최진수(崔瑨壽) 등의 주선으로 1899년(광무 3)에 『외와집』을 간행하였다. 연재 송병선이 서문을, 면암 최익현이 행장을, 하석(霞石) 이용원(李容元,1832~1911)이 묘갈명을, 성암 최세학이 행록(行錄) 그리고 심석재(心石齋) 송병순(宋秉珣,1839~1912)이 발문을, 이병수(李炳壽)가 근지(謹識) 등을 지었다. 게다가 「경의회정(經義會精)」에서 『주역』의 건원형이정(乾元亨利貞)을 해설하며, 정자와 주자의 설을 토대로 학자가 지향할 바를 제기한 것이 특이점이다.

최림에 대한 생애와 사상 연구는 경주 현곡에 소재한 선비로써 영천과 지역문인의 관계 그리고 청도에 이어지는 학문연원에 디딤돌이 되기에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묘갈명 병서 -하석 이용원

근래에 경상도 사유(師儒) 중에 외와 최 공이 있는데, 혹은 ‘문장사(文章士:문장으로 이름난 선비)’, 혹은 경세지재(經世之才:세상을 다스릴 재목)라 하니, 사물을 분별하고 이치에 통하여 중심이 되는 사람이다. … 공이 태어난 날밤에 구산(龜山)이 세 번 울었으니, 마을사람들 모두 기이하게 여기며 “옛 정무공 최진립 공이 내려온 듯하다”라고 하였다. … 공은 한번 본 것은 문득 기억하였다. 8살에 경사(經史)에 통달하였다. … 10살에 ‘孝悌’ 두 글자를 책상 모퉁이에 적어 인을 하는 근본으로 삼고는 “孝와 悌 두 글자 모두 도리는 하나다. 효(孝) 자는 아들 자(子)를 따르는 아들의 도리이고, 제(悌) 자는 아우 제(弟)를 따른 아우의 도리이지만, 시행함이 같지 않아서 그 이름이 다르다”라고 하였다. (부친이 돌아가시고) 운문의 공암에 거처하였는데, 공암은 바위 구멍[孔]에서 이름을 취하였다. 사방에서 배우러 오는 자가 매우 많았으나, 모두 수용하지 못하였고, 이에 벽을 마주 대하여 정자로 삼고, 그 안에서 머물렀다. … 「경세연류(經世沿流)」와 「원회운도(元會運圖)」를 지었는데, 당시 세상의 급한 일 네 가지에 대해 논하였다. 첫째, 元孫(원손)을 보익하여 성군의 기틀로 삼는다. 둘째, 빠뜨린 인재를 모아다 어진 길을 넓힌다. 셋째, 수령을 골라 뽑아 백성의 힘을 풀어준다. 넷째, 군사의 방비를 엄수(嚴修)하여 국경을 견고히 한다. … 돌아가시자 원근의 아는 자 모두가 “어는 곳에서 이러한 사람을 만나리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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