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운곡서원과 은행나무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6월 27일
공유 / URL복사
↑↑ 오상욱 시민전문기자
경북고전번역연구원장
강동면 왕신리에 자리한 운곡서원(雲谷書院)은 정조 8년(1784)에 유림의 공의로 안동권씨 권행(權幸)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되었고, 죽림(竹林) 권산해(權山海,1403~1456)와 귀봉(龜峰) 권덕린(權德麟,1529~1573)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권행은 본래 김씨였으나 고창군 병산전투에서 백제군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웠고, 왕건이 고창군을 안동부로 승격하여 식읍(食邑)과 안동 본(本)을 받았다.

단종(端宗)의 이모부인 권산해는 1453년 계유정난으로 단종이 폐위되고, 권자신(權自愼),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이 옥에 갇히자, 하늘을 우러러 눈물 흘리며 “이것이 참으로 하늘의 뜻인가”하고는 마침내 높은 누각에서 아래로 몸을 던져 54세에 자살한 충절의 인물이다. 하지만 이 일로 자손들은 백 년 동안 벼슬길이 막혔지만, 훗날 후손인 갈산(葛山) 권종락(權宗洛,1745~1819)과 여러 선비의 상언(上言)으로 정려문(旌閭門)이 세워지고, 1789년 관직 회복과 1791년 이조참판, 1885년 이조판서 등 증직(贈職)된다. 동생인 향일재(向日齋) 권수해(權壽海,1410~1466) 역시 사육신 일과 연루되어 연일로 유배되었고, 이곳에서 청안이씨 이유미(李裕美)의 따님과 혼인하며 정착해 가계를 이룬다.

권덕린은 회재 이언적의 제자로 어려서 모친의 가르침을 따랐다. 스승은 숙부의 따님을 사위로 삼았는데, 권덕린의 부인은 회재의 작은 아버지 이필(李苾)의 따님으로 회재와는 종매(從妹) 간이다. 이필은 이번(李蕃,1463~1500)의 차남으로 4남 3녀를 두었는데, 최덕숭(崔德崇), 권희범(權希範), 권덕린을 사위로 삼았다. 스승이 유배 가자 안강 양월리 귀성(龜城:구성) 아래에 구봉서사를 짓고 더욱 글을 익혔다. 그는 1553년에 문과급제를 시작으로 예조정랑, 회덕현감, 하동현감 등을 역임하였고, 노모 봉양을 위해 영천군수를 맡았으며, 1571년 지역의 유림과 옥산서원 창립을 도모하였으나, 안타깝게도 45세 병을 얻어 타계하였다. 두류골에 묘소가 있다.

앞서 임자년(壬子年,1732) 5월에 서면 운대리에 운천향현사(雲泉鄕賢祠)를 창건해 농재(聾齋) 이언괄(李彦适,1494~1553), 귀봉 권덕린을 배향하면서 경주에 안동권씨 사당건립이 본격화되었다. 『운곡서원지』에 의하면 1784년 5월에 영해 권씨 종중에서 권중령(權重齡) 등 85인이 시조의 고향에 사당을 세우려 하였고, 동도(東都)에서 영기(靈氣)가 모이는 달천서당과 운천(雲泉) 두 곳을 예정지로 논의한 결과 예로부터 집안사람이 공부하던 운천에 사당을 짓기로 결정하면서 숭모사업 건립에 박차를 가한다.

파평윤씨 무명자(無名子) 윤기(尹愭,1741~1826)는 『무명자집』에서 1789년에 죽림 권산해가 벼슬을 추증받은 것을 축하하며 지은 시에서 “사당 앞 은행나무에 새잎이 돋아나고, 저 멀리 자규루(子規樓)에 달빛이 비치네(祠前鴨樹抽新葉 遙帶子規樓月痕)”라며 읊조렸으며, 현재 운곡서원의 남쪽에 우뚝한 은행나무는 오랜 역사를 기억한 채 깊은 산속에서 인기척을 바라며 서 있다. 이는 권종락이 순흥(順興) 금성단(錦城壇)의 은행나무 가지를 꺾어다 심었다고 한다.

예전부터 순흥(順興) 읍내에 은행나무[銀杏樹]가 있었는데, 가지와 잎이 수 리(里)에 뻗었었다. 단종 때 갑자기 말라 죽어, 점을 쳐보니 “압수(鴨樹)가 다시 살아나면 흥주(興州)가 회복될 것이다”라 하였다. 은행나무의 이름이 압각수(鴨脚樹)이고 흥주는 곧 순흥(順興)이다. 당시엔 그 뜻을 알지 못했는데 얼마 뒤에 세조의 친동생인 금성대군(錦城大君)이 화를 당했을 때 흥주를 폐지하고 풍기(豐基)에 소속시켰다가 숙종 때 단종이 복위되면서 흥주도 복권되었다. 몇 해 전부터 마른 밑동 아래에서 홀연 싹이 나기 시작하더니 날로 무성해졌고, 뿌리가 퍼진 곳은 모두 떨기로 싹이 터서 숲을 이루었으니, 매우 기이한 일이었다.

죽림공이 복작(復爵)된 뒤에 후손 권종락이 이 은행나무 밑을 지나다가 축원을 올리고 그 가지 두 개를 베어서 갔다. 순흥에서 경주까지 거리가 400여리나 되고 권종락의 행보도 마침 우회하여 한 달 만에야 운곡사에 도착하였다. 권종락이 그 가지를 보는데 결대로 갈라지고 껍질이 벗겨져 생기가 없었다. 이에 사당 앞 땅에 꽂자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얼마 뒤에 과연 살아나서 3년이 지난 지금 사뭇 무성해졌다고 한다.

중국의 고사에 송나라 내국공(萊國公) 구준(寇準,961~1023)이 뇌주(雷州)에서 죽어 고향인 서경으로 운구될 때 공안현(公安縣) 백성들이 모두 길가에 나와 대나무를 잘라 땅에 꽂고 지전(紙錢)을 매달아 곡하였는데, 한 달 뒤에 대나무에 순이 모두 돋았다. 그리고 강원도 영월 객관 북쪽의 자규루(子規樓)는 본래 매죽루(梅竹樓)였으나, 단종이 영월에 유배되었을 때 이 누각에 올라 두견새의 울음소리를 들은 일로 누각의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늦게나마 억울하게 생을 마감한 권산해의 복작에 이어 단종의 한이 서린 자규루 옛터도 비슷한 시기에 중건되었으니 역사의 아픔이 조금은 해소되는 듯하다.

X
URL을 길게 누르면 복사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