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윤의 절터 기행[9] 경주 고선사 터(下)

고선사 터와 옛 신라인들의 집단 무덤 터가 있던 땅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7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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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경주박물관 뒤뜰로 옮겨진 고선사 터 삼층석탑과 석재유물.


신라 고승, 고선대사 원효가 머문 고선사

알천의 상류인 덕동면 암곡동에는 고선사 터가 있었다. 가뭄에 대비한 덕동호가 생기면서 덕동면 전체가 수몰되면서 고선사 터도 함께 물에 잠겼다. 방앗간도, 학교도, 집도 모두 수장되었다. 삼층석탑 하나가 겨우 남아 고선사 터임을 증명했지만, 세상의 필요에 의해 그마저도 자리를 내어 주어야 했던 비운의 석탑이었다. 석재 유물과 석탑은 현재 경주국립박물관 뒤뜰로 옮겨졌다. 덕동면 주민 전체가 고향을 잃을 때, 석탑도 고향을 잃었다.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열반에 들 때까지 머물렀다던 고선사다. 어느 시기에 왜 폐사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고선사는 태종무열왕(김춘추, 신라 제29대 왕) 이전에 세워졌던 절로 추정 한다. 황룡사에서 출가했다고 전해지는 원효는, 저술을 위해 분황사에 머물렀던 시기를 제외하고는 평생 이름 있는 절에 몸을 의탁하지 않았다. 불교계의 중심에 이름을 올리지도 않았다. 거창한 명성보다 백성과 고락을 함께했다. 당대 그 누구보다도 공부를 많이 하고 많은 책을 썼지만, 원효가 원한 것은 백성의 삶 속에서 실질적인 구원의 희망을 전파하는 것이었다. 서라벌의 중심이 아닌, 지금도 경주의 골짜기에 속하는 토함산 아래 머물렀던 것만 봐도 원효의 본질적인 애민 정신을 헤아릴 수 있다. 원효가 얻은 것은 지배 계급층의 존귀한 추대가 아닌 민중의 소박한 마음이었다.

신라 사람들은 원효가 고선사 주지로 오래 있었기에 ‘고선대사’라고 불렀다. 원효의 어릴 때 이름은 설(薛) 서당(誓幢, 새털)이었다. 원효의 손자인 설중업은 원효를 기리며 고선사에 ‘서당화상비(誓幢和尙碑)’를 세웠다. 비문에는 686년 원효가 혈사(穴寺, 구멍 절)에서 입적하기 이전에 고선사는 사찰의 규모를 갖췄다고 기록했다. 『고려사(高麗史)』에도 1021년(현종 12년), 가사의 조각조각에 금색 실로 수를 놓아서 승복의 장엄함을 갖춘 ‘금란가사(金欄袈裟)’와 ‘불정골(佛頂骨)’ 을 내전에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 현종까지도 법등은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고선사 터는 옛 신라인들의 집단 무덤 터이기도

그간 덕동호는 매번 물이 가득하고 안개가 자욱했다. 돌아서는 걸음 뒤로, 다다르지 못한 갈증이 곱절로 일었다. 회의감마저 들었다. 사라진 절터를 찾아, 같은 길을 여러 번 오가는 것도 무의미한 일이지만, 사라진 절과 수몰된 절터를 찾는 것은 또 무슨 의미란 말인가. 없고 사라진 것을 좇는 것이 때로는 미련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매번 없고 있음에 의미를 두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러기에 그저 ‘없음’으로 갈음하며, 무(無)에서 다시 무(無)를 좇는 것에 굳이 의미를 따지지 않기로 했다. 바닥이 드러난 덕동호를 거닐다 수많은 돌무지를 보았다. 돌들은 누가 부러 쌓아놓은 듯 어떤 균형을 이루었다. 어느 날, 돌무지 앞에서 마주친 중년의 남성이 내게 말했다.

“돌덧널무덤(석곽묘)과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묘)이예요. 옛날 신라인들의 집단무덤, 일종의 공동묘지 같은 것이지요. 이곳에 총 100여 기의 무덤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바닥 곳곳에 깨진 토기와 기와 조각이 널브러져 있었다. 나는 그것들의 이야기를 듣고자 흙 속에 묻힌 조각들을 들추었다. 천년 세월 동안 부식된 흔적이 역력했다. 세월의 틈바구니에서 아련하게 살아남았을 시간을 살폈다. 과거를 건져 올리는 일이 때로는 아플 때도 있다. 죽은 자는 육신의 한 톨 뼛조각도 없이 사라졌어도, 그들을 추모하기 위해 쌓아 올린 돌들은 무너지고 깨졌을지언정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멀리 떠밀려가지도 못한 돌들은 아직도 주변을 맴돌며 죽은 이의 슬픔을 추모하고 있는 듯했다.


↑↑ 덕동댐 저 산 아래 어디쯤에 고선사 터가 있었다고 촌로가 일러주었다.


수몰된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덕동호 사람들

시래골을 빠져나와 더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다. 무서우리만치 험한 길이었다. 간간이 민가가 나타났지만, 어둑어둑 날이 저무는 산길은 스산했다. 어두운 곳에서 산비둘기가 날고, 토끼와 고라니가 화들짝 놀라 달아났다. 굽이치는 곳마다 토함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의 지류가 나타났다.

정신없이 달리니 덕동경로당 앞이다. 촌로들이 종일 앉았다 떠난 의자는 모두 덕동호를 향해 놓여 있었다. 덕동호를 한 바퀴 돌며, 어느 곳에서든 모든 것이 덕동호를 향해있다는 것을 느낀다. 의자도, 사람도, 집도, 논밭도…. 그립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일상에서 나도 모르게 바라보게 되는 것.

깊숙한 골짜기까지 닿아있는 덕동호는 침묵한 듯 수많은 이야기를 펼쳐 놓는다.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저 깊은 곳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모를 것이다. 그저 길 따라 아름다운 운치만 말할 것이다. 때로는 깊은 안개에 푹 젖어 고독을 즐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을 것이다.

그들에게 귀띔하고 싶다. 입을 굳게 다문 호수 밑에 1300년 전에 살다 간 신라 사람들의 발자취가 있다고. 매일 어디까지 물줄기가 뻗어 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장중한 느낌을 자아낼 정도로 고요하고 도도한 덕동호도 파란만장한 역사를 적잖이 숨기고 있다고.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곧 덕동호의 수위는 한층 더 가득 찰 것이고 노출된 모든 과거의 공간들은 물속에 잠길 것이다. 망향병을 달래려 덕동호 산기슭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짙고 푸른 물속을 들여다보며 오래오래 옛날을 회상할 것이다.

과거의 흔적은 지워졌지만, 길은 물살도 지우기 힘들었는지 아직도 간간이 남아 흔적을 드러낸다. 굽이진 길을 따라 시선을 뻗으면 어느새 집들이 되살아나고, 키 작은 초등학교와 고선사 삼층석탑도 나타난다. 아름드리나무가 그늘을 키우고, 그 아래 아이들이 모여 입씨름을 하며 왁자하다. 산 아래엔 층층이 논과 밭이 펼쳐지고, 곡식과 풀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바닥은 스스로 수몰될 채비를 한다. 물속에 잠긴 것들을 그리워하며 촌로들은 다음 가뭄을 기다릴지도 모른다. 몇 겹의 바람마저 잠든 덕동호의 저녁은 평화롭게 저문다. 어둠이 장막을 치니 적막하기까지 하다. 인적이 드물어 더 쓸쓸한 덕동호의 섭섭함이란 이런 것일까.

물결만 바라보아도 고향 생각이 절로 난다던 사람들. 물속에 고향을 담그고 떠나온 사람들에게 세월은 아득해졌다. 그들이 말하는 ‘가슴 먹먹함’의 의미를, 고향을 잃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한평생, 아니 그 이전 먼 조상 때부터 정(情)을 들인 땅을 물속에 가두었다. 고향의 고샅길, 개울물과 숲이 자꾸만 물결에 아른거린다고 했다. 수몰된 마을은 선연한 기억으로 찾아오곤 했다. 물과 그 물의 끝엔 여전히 추억이 살고 있기에.


↑↑ 망향정에 걸려있는 사진, 고향을 잃어버린 수몰민과 망향정.


경주국립박물관 뒤뜰로 옮겨진 고선사 삼층석탑

경주국립박물관으로 향했다. 뒤뜰 고선사 삼층석탑 앞에 섰다. 탑의 균형 잡힌 몸체가 밤인데도 웅장하게 드러났다. 나는 ‘아!’ 하는 탄식을 쏟아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원효대사의 염원이 깃든 고선사 삼층석탑은 고요히 뒤뜰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고선사 터에서 가져왔다는 머리 잃은 서당화상비 귀부와 함께 옛 고선사는 이러저러했다고 이야기를 늘어놓는 듯했다.

잘 다듬어진 잔디 사이로 몸을 옮긴 석탑이 한없이 쓸쓸해 보인다. 도시의 세련미 속에 석탑은 얼마나 더 고독할까. 황룡산과 토함산과 괘정산 아래, 원래의 풍경이 존재하는 그 자리에서 지천으로 날아다니는 곤충 떼와 잡풀들과 더불어 석탑은 더 아름다웠을 것이다. 주머니에 넣어둔 사진을 꺼낸다. 산과 들판이 한데 어우러진 곳에 탑은 터를 지키는 우람한 장군과도 같다.

나를 내려다보는 탑에서 수백 년을 거스른 소리가 들린다. 지저귀는 새소리, 원효스님 염불소리, 밤새 밤을 지키다 어디론가 날아가는 부엉이. 이것이 어느 가뭄 진 봄, 내가 목격한 고선사 터 삼층석탑의 전부다. 박물관을 돌아 나오며 뒤를 돌아본다. 비에 젖은 석탑이 비를 맞으며 계절의 웅장함을 더한다.


박시윤 답사기행에세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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