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9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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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


                                           김복희


​쌀 씻는 소리
오이를 깎는 소리
수박을 베어 무는 소리
미닫이문이 드륵드륵 닫히는 소리

딱 하나면 가져갈 수 있다면
무엇을 가지고 갈까
앞으로 내가 듣지 못할 것
남도 듣지 말았으면 하는 것
하나만 선택할 수 있다면……

조용히 우는 소리
틀어 놓은 텔레비전 위로
막막한 허공의 소리
손톱으로 마른 살갖을 긁는 소리
죽은 매미를 발로 밟는 소리

이것 중에 무엇이 좋을까
잠시 고민했다

이런 거 맞나요?
나는 물었고
대답은 없었다
누가 벌써 대답을 가져간 것일까
다 두고 갈 수는 없나요?
아주 조용했다
누가 벌써 가져간 게 확실했다

가질 수 있는 것을
가지지 않을 때의 기쁨

잠든 사람이 따라 하는
죽은 사람의 숨소리
죽은 다음에도 두피를 밀고 나오는 머리카락 소리
벌려 놓은 가슴을 실로 여미는 소리

세상에서 소리를 하나… 데리고 갈 수 있다면
어떻게 할래?



소리 하나 들고 우린 먼 곳으로 가는 걸까

↑↑ 손진은 시인
단정한 듯 입체적인 시다. 그것은 먼저 “딱 하나면 가져갈 수 있다면/무엇을 가지고 갈까”, “세상에서 소리를 하나… 데리고 갈 수 있다면/어떻게 할래?” 유사한 듯 다른 화자의 물음을 핵심으로 시가 구성되고 있다는 점부터 그렇다. 2연 초반부와 마지막 연에서 배치된 그 물음이 나머지 구절을 끌고 가는 형식을 구사한다. 소리의 선택지는 쌀 씻고 미닫이문이 닫히는, 일상적인 소리(1연)에서, “손톱으로 마른 살갗을 긁는” 죽음에 다가가는 마른 생의 고적한 소리(3연), “벌려 놓은 가슴을 실로 여미는” 죽음 이후의 소리(7연)로 진전된다.

이런 세계를 표현하려고 시인은 이에 걸맞은 독백도, 주체와 객체가 피드백하거나 중간을 걷는 화법도 자재로 구사한다. 예컨대 소리를 하나 선택하고 “이런 것 맞나요?/나는 물었고/대답은 없었다”에서 내가 대화하는 대상은 산 자이기보다 죽은 자, 천사, 귀신에 더 가깝다. 현실과 환상, 삶의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는 화법이다.

그렇다면 제목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라 딴청을 피우는 이유는 무얼까? 그건 “앞으로 내가 듣지 못할 것/남도 듣지 말았으면 하는 것”(2연)이라는 전제에 합당하기 때문이다.이런 가벼움 속에 놓인 깊이, 여백이 그녀의 시에는 있다. 우리 시단의 새로운 자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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