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촌에 심어졌던 닥나무들의 실체 그리고 눈부신 기억!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10월 17일
공유 / URL복사
↑↑ 새하얀 창호지로 단장된 최부자색 사랑채 별채.

↑↑ 박근영 작가
내가 초등학교 때 교촌에는 닥나무가 많았다. 닥나무가 심겨 있던 모습을 가늠하려면 지금과는 완전히 달라진 40년 이전의 교촌을 되살릴 필요가 있다. 가장 먼저 복구시킬 기억은 봇도랑이다. 지금 남천교 앞에서 요석궁으로 들어가는 교촌 외곽도로가 그때는 버스 한 대 지나다닐 정도의 좁은 길이었고 그 길 옆으로 봇도랑이 흘렀다. 

이 봇도랑은 봄이면 능수벗꽃이 만발한 반월성 서편 남천, 흔히 문디 바위라 부르는 바위 위쪽 200여 미터 지점에 만든 보막이를 통해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다. 그 봇도랑은 우리 집 앞을 질러 국당이라는 동네를 통해 지금의 남천 방앗간을 지나 계속 흘러 서천으로 통했다.

 당연히 이 사이의 논이며 밭에 물을 대는 아주 중요한 수원이었다. 닥나무는 이 봇도랑이 흐르는 수변에 많이 심겨 있었다. 그때는 닥나무가 교촌에 심겨 있었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고 그 이유를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다.


교촌에 심었던 닥나무는 알고 보니 꾸지나무였다. 최부자댁 괴밭의 닥나무도 꾸지나무였음이 틀림없다.

나는 닥나무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방금 말했듯 우리 동네에 닥나무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릴 때는 닥나무가 무슨 용도로 쓰이는 나무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어렴풋이 종이를 만드는 데 쓰는 나무라는 것을 얻어들은 것도 같지만 용도에 대해서 분명히 안 것은 닥나무가 우리 동네에서 거의 사라지고 없을 때인 고교시절이었다.

대신 닥나무는 아이들 장난감 칼 만드는데 기막힌 재료였다. 나무 재질이 부드러워 자르기 쉬웠고 나무껍질이 다른 나무와 달라 나무를 자른 후 한쪽 끝의 껍질을 손톱으로 잡아 죽 당기면 껍질이 훌렁훌렁 잘 벗겨져 하얀 속이 쉽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칼을 만들 경우 손잡이 부분은 껍질을 남기고 칼날 부분은 하얀 속이 드러나도록 껍질을 벗기면 얼핏 보기에 멋진 장난감 칼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문제는 껍질이 부드러운 만큼 속도 지나치게 물러서 몇 번 칼을 마주치면 쉬 부러지곤 했다.

그 닥나무가 교촌에 왜 그렇게 많이 심어져 있었는지를 알게 된 것은 경주최부자를 취재한 후였다. 최부자댁에서 만든 특산품 중 하나가 바로 한지였기 때문이다. 그 한지의 원료가 바로 닥나무였으니 교촌에 닥나무가 많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나의 닥나무에 대한 오해를 하나 풀고 넘어가겠다. 어릴 때부터 닥나무를 지천으로 보면서 자랐으니 나는 닥나무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믿었다. 그런데 ‘The 큰 바보 경주최부자’ 책이 나오고도 몇 년이나 지난 후 경주고도보존회에 함께 참여하는 권은민 변호사와 황병길 국장 등과 같이 모임을 하다가 닥나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때 황병길 국장이 인터넷에서 닥나무 사진을 찾아서 보여주며 “닥나무가 다른 나무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이런 데서 어떻게 종이 재질이 나오지요?”하며 의문을 표했다.

그때 본 닥나무에 어이가 없었다. 내가 알던 닥나무와 하늘과 땅 차이였기 때문이다. 나는 대뜸 ‘누가 사진을 잘 못 올린 거지!’라고 확신에 차서 말했다. 다시 검색해 본 황병길 국장이 무슨 소리냐며 닥나무라고 올라온 사진들을 좍 펼쳐서 보여주었다. 닥나무 전문가라고 불려도 시원치 않을 내가 전혀 엉뚱한 닥나무 사진을 보면서 기막혔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내가 어릴 때 본 닥나무를 설명할 길도 막막해 어쨌건 간에 내가 알던 닥나무는 인터넷의 그 닥나무가 아니라고 우기며 이야기를 끝냈다. 그 자리에는 아내도 함께 있었는데 남편의 체면과 권위가 무너지는 듯해 적잖이 당혹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뒤에 다시 찬찬히 다시 알아본 바 내가 어릴 때 가지고 놀았던 닥나무는 정확히 닥나무가 아니고 ‘꾸지나무’였다. 꾸지나무 역시 한지의 주원료로 쓰는 나무인데 경상도 지역에서는 굳이 꾸지나무라 부르지 않고 닥나무라 부른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교촌에 닥나무가 많았던 이유는 당연히 최부자댁에서 생산하는 특산품 중 하나가 한지(韓紙)였기 때문이다. 최부자댁에서는 예로부터 서책을 매우 중하게 여겼다. 정무공(1568~1636)의 아들인 2대 최동량(1698~1664) 공만 해도 아버지이신 정무공의 일대기를 기록하기 위해 엄청난 편찬작업을 일으켜 ‘잠와실기(潛窩實記)의 기본을 만들어 냈다.



최부자댁은 종이를 많이 쓰는 집안이었다. 봄이 되면 집집마다 새로 창호지를 바르는 풍경이 장관이었다.

비록 벼슬을 살지는 않았지만 최부자댁은 정무공 이래 6대인 최종률 공 때부터 꾸준히 생원 혹은 진사를 배출해온 선비의 집안이다. 더욱이 최언경 공은 스스로 과거를 포기하는 대신 서당을 열어 후학을 지도한 분이었다. 최언경 공의 호인 ’남강‘을 딴 남강서당에서 후손에게 남겨 준 책만 해도 700여권에 이르렀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최부자댁이 교촌으로 이사 온 8대 최기영 공 때부터는 향교를 지원하고 사마소를 증축하고 돕는 등 지방교육과 향리의 언론문화 창달에 많은 지원을 해 왔다. 또 선비의 집안답게 책을 사 모으고 필사하는 데도 남다른 공을 들였다. 대표적인 일로 일제강점기에 위당 정인보 선생과 육당 최남선 선생이 우리 집에 일 년 넘게 머물면서 경주의 역사를 집대성한 동경통지(東京通志)를 편찬했는데 이를 만드는 과정에서 들어간 종이의 양만 해도 가늠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영남대 도서관에 문파 선생님이 기증한 서책이 7000여권이나 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이 약 5000권에 이른다. 이중에는 필사본도 엄청나게 섞여 있다. 책을 필사한다는 것은 단순히 필사한 만큼의 종이만 드는 것이 아니다. 쓰다가 글씨가 틀리거나 잘 못 필사하면 그 종이는 다시 써야 한다. 책 한 권 필사하려면 그보다 몇 배의 종이가 들어가야 했을 것이다.

더구나 한지는 한옥이 주된 주거문화였던 시절 집안의 벽과 방문을 바르는 벽지나 창호지 역할을 톡톡히 해 낸 중요한 생활필수품이었다. 최부자댁만 90칸의 한옥인데다 교촌에 퍼져 사는 최부자댁 권속들의 집 칸수가 모두 합해 수천 칸이 되었다. 과거에는 창호지를 일 년 주기로 한 번씩, 아예 문짝을 다 떼 내어 새로 바르는 것이 연례행사였다. 벽과 장판도 몇 년에 한 번씩은 걷어 내고 새로 깔았다.

특히 최부자댁은 바닥장판을 다른 집처럼 풀칠해서 붙여 바르지 않았다. 흙 위에 ‘초도질’이라고 해서 먼저 종이를 풀칠해 발라놓고 다음으로 창호지에 콩기름을 칠한 후 말려서 이를 두세 겹 덧댄 후에 끝자락만 바닥에 붙여 깐다. 이렇게 하면 방바닥이 쿨렁쿨렁 쿠션감이 생겨 좋기는 한데 장판용으로 들어가는 한지가 훨씬 많았다. 

이 초도질은 내가 어릴 때 우리집에서도 깔았던 장판 방법이었다. 어릴 때는 무심코 봐 넘겼던 초도질이 사실은 최부자댁 장판 까는 방법을 어머니가 그대로 따라 한 것이었음을 뒤늦게 알아차린 것이다. 초도질한 장판은 며칠 동안은 비릿한 콩기름 냄새로 거북스럽기도 했는데 냄새가 빨리 사라지라고 방에 군불을 넣기도 했다. 특히 겨우내 군불을 때다 보면 아랫목 쪽은 콩기름 기운이 뜨거운 기운을 머금고 아궁이쪽일수록 거무스레하다가 윗목으로 가면서 붉으스레하게 변색되어 광택을 내곤했다. 그래서 교촌의 기와집들은 방바닥만 보아도 아랫목이 어느쪽인지를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초도질도 그렇지만 매년 봄이 한창일 무렵에 교촌에만 나타나는 진풍경이 있었다. 집집마다 방문을 다 떼내고 묵은 창호지를 걷어내고 새 창호지를 바꾸는 작업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묵은 창호지는 문짝째 통풍이 잘 되는 곳에 세워두고 물을 흠씬 뿌려 불린다. 종이가 충분히 불면 날카롭지 않은 칼이나 사금파리로 종이를 긁어낸 후 다시 말린다. 문짝이 말랐다 싶으면 풀 먹인 한지를 문짝에 맞게 다시 붙인다. 풀먹인 종이를 쓰는 것은 이렇게 해서 문짝에 한지를 붙이면 풀이 마르면서 종이가 탱탱하게 탄력을 얻기 때문이다. 마른 후의 종이가 어찌나 탄력이 좋은지 잘 마른 종이를 손톱으로 톡톡 치면 마치 쇠를 두드리는 것처럼 청아하게 ‘탱탱’ 소리가 났다. 

한 해 동안 바람을 막아주던 문짝이 누르스름한 헌 옷을 벗고 하얗고 짱짱한 새 옷으로 갈아입은 모습은 그야말로 눈이 부셨다. 그런 장관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교촌의 기와집들, 열린 대문 안으로 연례행사로 되풀이되어 들려다 보였다. 이런 굉장한 기억을 가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이렇듯 생활용품으로 쓸 한지만 해도 엄청났을 것이니 최부자댁에서 가용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라도 종이를 만들 법했을 것이다.

최염 선생님의 회고에 따르면 용도에 맞게 한지의 종류도 다 달랐다. 축(祝)이나 지방(紙牓) 혹은 편지글을 쓰기 위한 한지는 최상급 종이였다. 그 외에 주로 글씨를 쓰는 질 좋은 한지를 시작으로 창호용, 장판용, 도배용 등이 모두 다르게 제작되었고 언제나 질 좋은 한지들이 풍족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한지 제작소가 있어야 했는데 지금의 내남면 박달리에 최부자댁 전용의 종이 공장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때는 가내수공업 형태의 종이였지만 생산량은 꽤 많은 편이었다는 말씀이었다.

다음 편에서는 최부자댁이 한지를 만들었던 더 큰 이유를 쓰겠지만 나로서는 최부자댁이 한지를 생산했던 그 사실보다 닥나무를 가지고 놀았던 어린 시절과 해마다 하얀 광택을 내던 문짝들의 진풍경이 더 소중하게 남아 있다. 내가 경주최부자 책을 쓰게 된 것은 정말이지 필연으로 여겨질 뿐이다.

X
URL을 길게 누르면 복사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