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윤의 절터 기행[14] 경주 임천사 터

임천사 연못에서 기우제를 지내니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10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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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경주박물관 뒤뜰 야외전시실에 전시된 임천사 터 석조물.


임천사 터를 찾아서

북천(北川, 알천) 천변에 서있다. 황룡동 깊은 골짜기에서 발원한 북천 물줄기는 덕동호와 보문관광단지의 보문호를 지나 시내를 적시고 황성동 황성대교 언저리에서 서천인 형산강으로 가 섞인다. 옛날엔 홍수가 잦았던 북천(알천)이지만 이제는 점점 말라 바닥을 드러내는 일이 잦다. 1975년 북천 상류에 경주의 식수원인 덕동호가 건설되면서 더욱 말랐다. 지금은 하천 산책길과 체육시설을 갖추어 말끔한 모습이지만, 한때는 맑은 물비린내와 물안개가 일고 무성한 물풀 사이 새들이 둥지를 틀거나 물고기들이 산란하며 종(種)을 잇는 자연 그대로의 하천이었다.

북천 천변을 찾은 건 통일신라 때의 사찰 임천사 터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경주 시내에서 보문호 방향으로 가다 보면 동천동 헌덕왕릉(憲德王陵, 사적 제29호) 남쪽 북천(알천) 천변 어딘가에 임천사 터가 있었다고 전한다. 말만 들었을 뿐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 앱이나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곳, 옛 터에 무엇이 남아있을까마는 완전한 소멸을 이루어 아무것도 남겨진 것 없는 터에 무작정 서 보고 싶었다. 세상 어디 영원한 것이 있던가. 생겨난 때가 있으면 더하고 덜하고의 차이가 있을 뿐 소멸하는 때가 있지 않은가.



천재지변 유독 많았던 성덕대왕 대와 임천사

성덕대왕(聖德大王, 691~737, 신라 제33대 왕) 때 유독 천재지변이 잦았다. 703년(성덕왕 2) 7월, 영묘사에 불이 난 것을 시작으로 같은 달 서라벌에 홍수가 나 많은 백성이 물에 빠져 죽었다. 이태 뒤 705년(성덕왕 4) 5월, 가뭄이 들었다. 왕은 노인들에게 술과 음식을 내려 민심을 안정시켰다. 706년(성덕왕 5)에는 냉해가 닥쳐 곡식이 제대로 익지 않아 흉년이 졌다. 707년(성덕왕 6) 정월에는 가뭄이 들어 백성들의 삶은 더욱 곤궁해져 굶어 죽는 백성이 많았다. 굶주림에 시달리며 농토를 버리고 유랑하는 백성이 늘었다. 708년(성덕왕 7) 지진이 일었다. 709년(성덕왕 8) 또다시 심한 가뭄으로 농사가 되지 않았다. 714년(성덕왕 13) 심한 가뭄과 전염병으로 많은 백성이 죽었다. 715년(성덕왕 14), 또다시 가뭄이 들었다. 정월부터 6월까지 비가 오지 않았다. 임천사는 신라 때 기우제를 지내던 곳으로 전해진다.《삼국사기》에는 715년 성덕대왕 때 가뭄이 들자 임천사에서 비가 내리도록 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8 성덕왕 본기 14년(715년) ​
十四年六月 大旱王召河西州龍鳴嶽居士理曉 祈雨於林泉寺地上則雨浹旬
십사년유월 대한왕소하서주용명악거사이효 기우어림천사지상칙우협순
정월부터 6월까지 크게 가물었다. 왕이 하서주(河西州, 지금의 강릉) 용명악(龍鳴嶽)에 사는 음양 풍수가인 거사(居士) 이효(理曉)를 불러 임천사(林泉寺) 연못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게 하니 비가 열흘 동안 끊이지 않고 내렸다.

이듬해 6월에도 가뭄이 들어 같은 방법으로 제를 지내니 비가 내렸다고 한다. 오랜 가뭄에 천문을 읽은 이효의 영험함인지, 임천사의 영험함인지는 모르나 기도가 통해 비가 내렸으니 얼마나 복된 일인가.


↑↑ 북천 천변 평지에 자리 잡은 헌덕왕릉이 물에 잠기는 일이 잦았다. 능 둘레 버팀돌인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 중 쥐, 소, 범, 토끼, 돼지 상 5개만 남았다.


북천 범람하면 물에 잠기던 헌덕왕릉

헌덕왕릉의 위치는 천림사(泉林寺) 북쪽으로,《삼국사기》와《삼국유사》에 기록된 장지와 일치한다. 조선시대에 편찬된《신증동국여지승람》의 <경주부> ‘능묘조’에도 헌덕왕릉이 마을의 동쪽인 천림리(泉林里)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 왕릉 묘제를 연구한 이근직에 따르면 헌덕왕릉은 역사의 기록과 실제 위치가 동일한 8기(선덕여왕릉, 태종무열왕릉, 문무대왕릉(대왕암), 성덕왕릉, 원성왕릉(괘릉), 흥덕왕릉, 경순왕릉) 중 하나라고 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0, 헌덕왕 본기 18년 (826)
十八年十月 王薨諡日憲德葬于泉林寺北(왕훙시일헌덕장우천림사북)
헌덕왕 18년(826) 겨울 10월, 왕이 죽었다. 시호를 헌덕이라 하고 천림사 북쪽에 장사 지냈다.


[삼국유사] 왕력
陵在泉林村北(능재천림촌북)
능은 천림촌 북쪽에 있다.


《삼국사기》는 기우제를 지낸 곳을 임천사로 기록했고, 헌덕왕(憲德王, 신라 제41대 왕, 809~826)의 죽음과 능 조성과 관련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동일하게 천림(泉林)이라는 지명을 쓰고 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임천사(林泉寺)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천림사(泉林寺)는 한자의 나열만 다를 뿐, 모두 헌덕왕릉의 남쪽 천변에 있다 하므로 같은 곳이다.

헌덕왕릉은 깊은 소나무 숲에 쌓여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울울창창한 소나무 사이로 들면 나무와 나무 사이 유연한 곡선의 봉분이 보인다. 능 주변은 풀이 무성하고 조금만 더 들어가면 마을과 능을 잇는 길이 나타나는데 근래 비가 오지 않았으나 물이 빠지지 않아 질척거린다.

옛날부터 비가 많이 오면 북천은 자주 범람했다. 북천 천변 평지에 자리 잡은 헌덕왕릉이 물에 잠기는 일이 잦았다. 능을 감싸고 있던 석물도 쓸려갔다. 능 둘레 버팀돌인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 중 쥐, 소, 범, 토끼, 돼지 상 5개만 남았을 뿐 나머지는 면석만 남았다. 능 안내문에 의하면 조선 영조 18년(1742)에 북천이 범람하면서 능의 십이지신상 중 일부가 유실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능을 지키던 서역인 무인상은 현재 경주고등학교 정원에 있다. 일화에 의하면 홍수 때 떠내려간 것이라 한다.



원성왕과 북천

지금은 수량이 많지 않지만, 알천은 관리하기 까다로운 강이었다. 북천은 옛날부터 범람이 잦았다. 때로는 누군가의 운명을 가르기도 했다. 원성왕(元聖王, 신라 제38대 왕)이 즉위할 때의 일이다. 선덕왕이 죽자 나라 사람들이 김주원을 받들어 왕으로 삼으려 했다. 북천 건너에 살던 김주원을 대궐로 맞아들이려 할 때, 북천 물이 갑자기 불어 건널 수가 없었다. 김경신(원성왕)이 먼저 월성 대궐로 들어가 즉위했다. 김주원을 따르던 신하들이 모두 새로 등극한 임금에게 엎드려 절했다. 왕이 되지 못한 김주원은 지금의 강릉 지역인 명주로 가 유력한 호족이 되었다.

월성에서 분황사를 지나 북천 건너 능 남쪽 제방에 절터가 있었다. 말끔히 정비된 북천 천변에서 임천사 터의 흔적은 이제 찾을 수 없다. 715년 임천사에서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그전에 창건한 것이리라.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모르나 절터에서 나온 석조물들을 수습해 북천가에 모아두었었다. 그러나 1991년 태풍으로 많은 비가 쏟아졌고 북천 물이 불어 잠겼다가 일부가 유실되었다. 이후 경주박물관 뒤뜰 야외 전시장으로 옮겼다.


↑↑ 금학산 끝자락 바위에 경주 알천제방수개기(慶州閼川堤防修改記)가 있다. 1707년(숙종 33) 무너진 제방을 보수했다는 내용을 새겨 놓았다.


알천제방수개기

헌덕왕릉에서 남쪽으로 조금만 이동하면 금학산 끝자락 바위에 경주 알천제방수개기(慶州 閼川堤防修改記)가 있다. 움푹 꺼진 곳에 자그마하게 자리 잡은 바위라 지나치기 쉽다. 잦은 홍수가 발생하자 1707년(숙종 33) 무너진 제방을 보수했다. 당시 부역을 지휘한 사람들의 이름과 보수한 내용을 ㄷ자형 바위에 새긴 비문이다.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516호로 지정되었다.

북천을 벗어나 국립경주박물관으로 향한다. 뒤뜰 야외전시실에 수많은 석물이 연대별로 전시돼 있다. 특별히 임천사 터 석재를 찾느라 애를 먹었다. 돌고 돌기를 반복하다 지칠 무렵 자그마한 안내판이 보였다. 임천사 터에서 출토된 석조 유물은 가을볕 아래 고요히 잠을 청하고 있었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사람들의 소란도 세상의 어떤 소음도 들리지 않는다. 익어가는 가을의 정취 속에 고요만 맴돈다. 석재 위로 노랗게 물든 낙엽이 하나, 둘 떨어져 잠을 청한다.




박시윤 답사기행에세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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