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왜 소의 모가지에 방울을 달았을까?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10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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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촌과 맞닿아 있는 놋전 지도.

↑↑ 박근영 작가
“야, 쏴라! 저쩌 저 저노마, 저노마만 맞추면 댄다!”

고무줄 새총을 장전하며 동네 형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이고 백 번 싸바라 맞는강. 너거는 다 죽었다 카이!”

돌맹이를 피한 놋전 대장쯤 되는 형이 도리어 이쪽으로 활을 쐈다. 그러나 재랍(말린 대마 줄기)으로 만든 화살은 바람에 날리며 엉뚱한 곳에 떨어졌다. 서로를 향해 잡아먹을 듯 으르렁거리던 아이들이 서로 활을 쏘고 새총을 쏘다가 그것도 지겨웠는지 ‘맞플레이’로 붙자고 소리지르기 시작했다. 맞플레이는 모두 논바닥으로 나가 제대로 싸워보자는 말이었다.

“함 댔나?” “그래 댔다. 함 붙자!” 이런 말이 떨어지자 양쪽에서 각가 15~6명씩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손에 손에 대나무나 소나무, 버드나무, 닥나무, 가시가 비쭉비쭉 솟은 아까시나무 작대기를 휘두르며 논바닥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와~~’ 하는 함성에 맞추어 서로 작대기를 휘두르며 싸우기 시작했다. 대개는 위협만 하는 정도였지만 그중에는 작대기에 맞아 머리가 터지고 손을 다치는 아이들도 있었다. 신기한 것은 어느 한쪽에서 누가 피라도 흘리면 그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고 그러면 또 약속이라도 한 듯 슬금슬금 전쟁판을 걷는다는 것이었다.

그런 일들이 두어 달에 한 번씩 무슨 정기 행사처럼 벌어졌다. 딱히 원한 맺힌 일도 없는데 정기전을 치르기라도 하는 듯 이런 전쟁이 벌어졌다. 겨울철, 눈이라도 올라치면 양쪽 아이들이 다시 논바닥에 나와 눈싸움을 벌였다. 우습게도 논에 누가 똥물을 퍼부어 놓아 아이들이 던지는 눈에 덜 삭은 똥물이 묻어 눈싸움을 마치고 나면 너나 할 것없이 온통 구린내를 풍기고 다녔다. 교리와 놋전 아이들은 그런 일을 일상으로 달고 살았다.

솔직히 말하면, 어릴 때는 놋전이라는 마을 이름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 놋전, 놋전 부르면서도 왜 그 골목과 마을을 놋전이라 불렀는지 알 생각도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어릴 때 생각으로는 그 마을이 매우 성가신 마을이라는 것뿐이었다.

어쭙잖게 아이들 전쟁놀이를 꺼냈지만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내 어릴 때만 해도 놋전에 그만큼 사람도 많았고 아이들도 많았다는 사실이다.



놋전은 최부자댁에 놋그릇을 대던 사람들이 살면서 만들어진 거리, 수요 늘어나면서 장인들 몰려

이처럼 놋전 거리는 내 어릴 때까지만 해도 놋전의 명성을 흔적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지금의 교촌한옥마을에서 구 황남초 가는 농로가 있었는데 내가 황남초 다니던 시절만 해도 소달구지 한 대가 지나갈 정도의 좁은 길이 나 있었을 뿐이다. 동네에서 가장 서쪽에 자리잡았던 우리집에서 가다 보면 샘터 포도원이라는 포도밭이 있었다. 그 포토밭 뒤쪽은 전부 논이었고 논길을 따라 난 길 맞은편으로 집들이 있었다. 그 길을 7~80미터쯤 더 지나면 지금의 놋전2길 골목이 나왔다. 이 놋전2길 앞뒤로 마을이 띄엄띄엄 펼쳐져 있었는데 대략 30호 정도 되었다. 그 골목의 집들은 내가 초등학교 때 지은 집도 있었지만 대개는 그 이전부터 내려오던 초가집에 새마을 운동으로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집들이 대부분이었다.

놋전이 놋전으로 불리게 된 것은 오래전 이 골목에 유기그릇을 만들던 집들이 많아서 붙은 이름이란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고교 시절쯤이었다. 그러나 놋전의 전모를 알게 된 것은 역시 경주최부자 책을 쓰면서였다.

“놋전은 원래 우리 집안에 유기그릇을 유기 장인들이 살면서 놋전이 되었네. 거기서 놋그릇을 만들어서 교촌 우리집안에 공급하면 운반비도 적게 들고 때맞추어 주문받기도 쉬웠기 때문에 거기서 놋그릇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지!”

최염 선생님께 이 말씀을 처음 들을 때의 감흥은 유별난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줄창 지나다니던 놋전의 의문이 순식간에 풀렸기 때문이다. 더구나 놋전이 다른 이유도 아닌 최부자댁에 놋그릇을 대던 인들로 인해 만들어진 곳이라니 이 역시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데 최염 선생님 말씀 속에서 아주 재미있는 부분이 있었다.

“그 동네가 놋전이 된 것은 기본적으로 우리 집안의 놋그릇 수요가 많아서이지만 거기에는 풍수가들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네!”

교촌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황소가 엎드려 있는 듯한 모습이라고 한다. 그런데 자칫 황소가 일어서서 떠나버리면 지력이 쇠해져 좋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소의 목에 쇠방울을 달아 소가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게 했는데 바로 그 목 부분이 놋전 일대이고 놋그릇 만드느라 뚱땅거리는 소리가 바로 그 쇠방울 소리 역할을 했다는 설이다.

이 동네가 유기로 유명해진 것은 최부자댁에서 그만큼 많은 유기를 사용하고 주문했기 때문이다. 이 앞 장에서도 수시로 말했다시피 사시사철 제사와 행사가 끊이지 않던 최부자댁이었다. 중요한 손님이 오면 반드시 유기를 사용하여 대접했다. 봉송할 때도 중요한 집들은 반드시 놋함이나 놋그릇에 음식을 담아 보냈다. 또 살림을 나는 자녀나 후손들에게도 일일이 놋그릇을 맞추어서 보냈다. 그러니 최부자댁 수요만으로도 어지간한 유기전 몇 개는 풍족하게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였다. 

이런 이유로 교촌 근처에 유기전이 생기다 보니 자연스럽게 유기를 찾는 사람들이 이 동네로 찾아 들었고 수요가 늘어나다 보니 유기를 생산하는 사람들도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해 마침내 놋전 거리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결국 놋전리는 최부자댁과 유기적인 관련을 맺으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으니 서로의 관계가 매우 이상적으로 전개된 예라 할 수 있다.


소가 누운 교촌에 쇠방울 격 놋전, 2차 세계대전, 스테인레스 출현이 최부자댁 흥망과 맞물려

아쉽게도 놋전 거리는 제2차 세계대전이 종국으로 치다르며 거의 폐쇄되다시피 했다. 유기의 주원료는 구리와 아연, 주석 등이다. 이는 총알이나 포탄 탄피의 주원료와 일치한다. 때문에 2차 대전 중 일제는 시중에 나도는 구리나 아연 같은 원료들이 유통되지 못하도록 철저히 단속했으며 우리 민족이 전통적으로 제사에 유기를 많이 쓰는 점을 노려 집집마다 놋그릇을 공출하는 대대적인 수탈 작업을 하기에 이르렀다. 최부자댁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상당히 많은 양의 유기를 빼앗겨야 했고 이런 유기를 조금이라도 보전하기 위해 우물에 그릇을 빠뜨리거나 땅을 파고 묻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야 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놋전이 무사할 리 없었다. 결국 놋전은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황폐화 되었고 전쟁이 끝났을 때 일부나마 복구되어 다시 놋그릇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시 한번 거리가 살아나는 듯했으나 스테인리스라는 주방계의 새로운 강자가 나타나 다시 도태의 길을 걸어야 했다.

스테인리스는 예전에 스텡이라 불리며 삽시간에 우리나라 가정의 주방을 차지하고 말았다. 스테인리스강(stainless steel)은 이름인 스테인(stain=얼룩) 리스(less=없음)에서 보듯 녹이 쓸지 않은 반짝반짝한 그릇이었다. 10.5~11%의 크롬이 들어간 강철 합금으로 몰리브덴이나 니켈 등의 금속도 포함되어 있다. 지금은 발암물질이 검출되고 건강에 그다지 좋지 않다고 여겨져 조금씩 사용을 자제하거나 발광물질을 사용하지 않는 추세로 바뀌었지만 처음 나왔을 때는 그 인기가 가히 폭풍노도였다.

놋그릇은 건강에는 좋지만 관리하기 매우 어려운 그릇이다. 산화가 잘 되어 두어 달만 쓰면 노르스름한 광택이 사라지고 푸른 녹이 생기거나 검게 변하고 녹 냄새까지 나서 일 년에 몇 번씩 닦아야 쓸 수 있었다. 녹을 닦는 것도 양잿물을 풀어서 닦거나 가는 모래를 마른 짚에 묻혀 문질러서 닦아야 하니 아낙네들의 고초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 어머니도 놋그릇 때문에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었다. 지푸라기에 양잿물을 묻혀 놋그릇을 박박 문지르면 파릇하게 끼었던 녹들이 검은 녹물이 되어 긁혀 나왔다. 시꺼멓게 얼룩진 놋그릇을 물에 씻으면 샛노란 얼굴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 놋그릇은 내가 초등학교 1~2학년 쯤에 모두 우리 집에서 대거 사라졌다.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니가 놋그릇 대신 반짝반짝 광이 나는 스텡그릇을 밥상에 올리기 시작하셨기 때문이다.

그 무렵이 바로 스테인레스 업자들이 무슨 대단한 인심이라도 쓰는 양 과대선전하며 놋그릇과 스테인레스 그릇을 1:1로 맞교환해주면서 놋그릇을 싹쓸이하던 시기였다. 우리집처럼 제사를 모시지 않는 가정에서는 사용하기 불편한 놋그릇을 내놓고 광택이 반짝반짝 나는 스테인리스를 얼씨구나 하고 바꾼 것이다. 그게 19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반의 일이었다.

놋전이 사라진 것은 그런 시대적인 흐름에도 영향을 받았겠지만 최부자댁의 쇠락과도 관련이 깊어 보인다. 먼저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며 놋그릇을 거둬들이던 시기가 문파 선생님이 전재산을 압류당하여 신탁통치 받던 막바지 시기고 해방으로 놋전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을 때는 일제로부터 되찾은 땅으로 다시 부자로 살았고 1960년대 후반, 스테인레스가 보급되면서부터 놋전에서 놋그릇이 사라질 무렵은 대구대학이 영남대학으로 강제 합병되며 최부자댁 부도 끝을 맺게 된 시기와 맞물린다.

최근 교촌이 교촌한옥마을로 재단장되면서 경주시가 놋전 부근에 다시 유기공방거리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추진한다는 소문이 들린다. 놋전이 과거와 같은 영화를 누리기는 힘들겠지만 다시 소의 목에 놋방울을 달게 된다면 경주최부자댁 정신과 명성이 세상을 향해 더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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