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부자댁 오랜 부의 비결-걸림돌을 디딤돌로!!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11월 07일
공유 / URL복사
↑↑ 경주최부자댁 사랑채 전경.

↑↑ 박근영 작가
최부자댁을 취재하면서 특별히 궁금했던 점이 있다. ‘부자 3대 가기 힘들다’는 말도 있는데 어떻게 최부자댁은 12대 혹은 10대라는 그 오랜 세월 동안 부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었다. 최부자댁을 연구한 학자들은 그 이유로 나눔과 상생 정신으로 백성들과 교감한 것, 육훈과 육연, 가거십훈 등 가훈으로 자손들에게 잘 교육하고 이어갔기 때문이라 분석한다. 그러나 그게 현실적으로 부를 잇는 것에는 다소 모자라는 느낌이었다. 자손이 10대를 넘기다 보면 뜻밖의 풍파가 생길 수도 있고 특히 상속으로 부가 흩어지기도 할 것이다.



외동아들 혹은 양자로 대를 이을 만큼 자손이 귀해! 
부가 흐트러지지 않고 오롯이 이어지는 효과

이에 대해 최염 선생님의 분석은 매우 솔직하고 통찰력 있게 보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으나 우리 집안은 자손이 귀해서 대부분 외동아들이었어요. 다시 말해서 재산이 한 명의 아들에게 오롯이 전승되어 따로따로 나누어지지 않았음을 의미하지요. 심지어 8대조 때와 5대조 때는 아들 자손이 없어 양자를 들이기도 했으니 얼마나 자손이 귀한 집안인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여기서 잠깐, 조선시대 상속제도를 보자. 조선은 중기까지만 해도 재산상속에 있어 장자 위주도 아니고 남녀를 차별하지도 않았다. 심지어는 적서 간의 차별도 없었다. 균분상속을 원칙으로 똑같이 나누어 준 것이다. 이는 경국대전에 명시된 엄연한 사실이다.

한 가지 더 눈길을 끄는 것은 가부장적, 즉 남성 위주의 결혼생활도 조선 중기 이후에 안착된 문화일 뿐 조선 중기 이전에는 결혼한 남자가 데릴사위처럼 처가에 얹혀사는 경우도 흔했다는 것이다. 경주의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 선생이 외삼촌인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敦) 선생의 집에 머물며 공부한 것이나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30) 선생이 어머니의 고향인 강릉에서 자란 것 등은 좋은 예다. 이런 제도는 법 자체로는 조선 말기까지 그대로 이어져 바뀌지 않았다.

그러다 17세기 이후 승중자(承重子) 즉 제사를 모시는 후손에게 재산을 더 주고 결혼한 여식에 대한 재산분배를 관습적으로 없애기 시작했다. 18세기에 이르면서 이러한 차별은 더 심해졌고 1990 현행 재산 상속법이 시행되기 이전까지 마치 관례처럼 정착됐다.
이런 제도와 관습 역시 최부자댁 부가 흐트러지지 않고 유지된 비결로 작용했다. 가계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 말에 대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최부자댁의 시조인 정무공 최진립 장군은 아들이 모두 6명이었다. 그 셋째가 최부자댁 가계를 만든 최동량 공이다. 

러나 이때는 부자가 아니었다. 최동량 공의 아들인 최국선 공은 외동이었다. 잘 알려져 있듯 최국선 공 때부터 황무지 개간과 모내기 등 특별한 방법으로 부자로 살기 시작한다. 최국선 공은 아랫대는 2형제다. 그중 최부자 가계인 둘째 최의기 공이 분가하면서 일차로 재산이 나누어진다. 그러나 마침 최의기 공은 과거에 번번이 낙방함으로써 벼슬살이보다는 가업을 키우는 일에 전념하게 되고 아버지인 최국선 공 때보다 더 많은 부를 일으키게 된다. 만약 최의기 공이 과거에 붙어 벼슬했다면 경주최부자 신화는 애초에 최부자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로부터 최승렬 공, 최종률 공까지가 외동이었다. 그러나 최종률 공에게는 후사가 없어서 10촌 형인 최종만의 아들 최언경을 양자로 들인다. 물론 촌수에서 드러나듯 이 최언경 공 역시 정무공의 후손이다. 최언경 공의 뒤를 이은 최기영 공도 외동인데 지금의 교촌으로 이사를 오신 분이다. 그러나 최언경 공부터 교촌으로 옮기는 준비가 착실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최기영 공의 다음 대인 최세린 공도 2형제인데 이때는 마침 장자상속이 대세를 이룰 때였다. 재산이 장자인 최세린 공에게 대부분 이어졌다.

최세린 공도 후사가 없었다. 그래서 조카인 최만희 공을 양자로 들였다. 최만희 공은 슬하에 현식·현교 2형제를 두었는데 역시 장자 위주의 상속이 행해졌다. 최현식 공 다음 대는 형제가 많아 4형제를 두었는데 그중 장자가 문파 최준 선생님이셨다. 이때 역시 장자위주 상속이 이루어져 문파 선생님이 재산의 전권을 장악하고 독립운동과 대구대학 설립이라는 큰일을 거리낌 없이 해내실 수 있었다.

위에서 보듯 최부자댁은 최국선 공을 제외한 9대 중 무려 5대가 외동이거나 양자를 들여왔고 형제가 많았을 때도 겨우 2형제뿐이었다. 이렇듯 초기에는 자손이 귀한 집안이다 보니 부가 잘 상속되었고 뒤에는 장자 위주의 상속제도로 부가 나누어지는 것을 막아준 셈이다.

이런 가계를 눈여겨보면 최부자댁이 몇 번의 위기, 걸림돌을 현명하게 극복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먼저 최의기 공이 과거에 낙방한 것에 기죽지 않고 오히려 귀(貴)를 버리고 부(富)를 선택한 것이 눈에 띈다. 최부자댁이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말라’는 가훈을 내린 이유가 부와 귀를 모두 바라는 것은 과한 욕심이므로 그것을 경계하도록 가르친 것이다. 그 모범이 바로 최의공이었을 것이다. 과거 낙방의 걸림돌을 가문의 300년 부의 디딤돌로 만든 것이다.

걸림돌을 디딤돌로 만든 또 다른 사례가 두 번에 걸쳐 양자를 들인 일이다. 집안의 대가 끊어질 위기를 훌륭한 양자를 들임으로써 오히려 탄탄히 다진 기회로 삼은 것이다.

“소 멕이다 늦었심더. 아제집에 오는데 잘 차래 입어야 댑니꺼?”

그런 의미에서 최언경 공을 양자로 들일 당시의 일화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위에서 말했듯 최부자댁은 두 번의 양자를 들였다. 그중 9대 최세린 공은 조카를 양자로 데려왔으니 큰 어려움이 없었을 테지만 그 윗대인 6대 최종률(1724-1773) 공은 고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좀 기발한 양자 선발을 시도했다. 최종률 공은 객관적으로 양자를 고를 방법을 고심한 끝에 큰 잔치를 열고 후보가 될 만한 친척 집안의 자제들을 모두 불러 모으게 했다.

이미 2대에 걸쳐 독자로 집안이 이어졌으니 조카뻘 되는 후손들은 7촌 이상 11촌까지, 다시 말해서 2대 최동량 공의 가계까지 올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잠깐 언급하자면 지금은 4촌만 넘어가도 먼 친척으로 여기는지 모르지만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10촌 혹은 11촌은 정말 가까운 친척이었다. 이 책을 읽은 50대 중반 이상의 독자들은 어렸을 때 종형이니 재종형, 재재종형 같은 말들을 쉽게 들었을 것이다. 종이 4촌이고 재종은 6촌이고 재재종은 8촌이다. 이 정도는 완전히 한 집안이고 10촌 12촌도 가까운 친척으로 여겼다.

어쨌거나 조카들은 알아도 그 깊은 면면을 일일이 알 수 없었던 최종률 공은 잔치를 열고 조카들을 불러들여 그 됨됨이를 자신의 눈으로 직접 점검하기 시작했다. 잔치를 연 이유는 잔치 속에서 사람들을 대하는 요령이나 기품을 보기도 하고 술을 마셨을 때의 모습도 살펴보고자 해서였을 것이다. 그에 부응하듯 대부분의 조카들이 시간에 맞추어 목욕재계하고 말쑥하게 차려입은 다음 잔치 마당에 들어섰을 것이다. 행동거지도 신중하게 해서 종률 공의 눈에 띄기 위해 안간힘을 썼을 것이다.

이렇게 모두 잘 차려입고 조신하게 굴고 있었으니 종률 공 입장에서 선뜻 누군가를 고르기 힘들었을 것이다. 종률 공이 고심을 거듭하면서 조카들을 둘러보고 있었지만 후사를 잇는 일인 만큼 쉽게 결정할 수 없어서 속앓이만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뜻밖의 조카가 늦게 들어왔다. 그 조카는 일을 하다 왔는지 잘 차려입지도 않았고 몸에는 땀이 나서 다른 조카들과 사뭇 달라 보였다. 종률 공이 늦게 온 이유와 땀 흘리는 이유를 물었다.

“소를 먹이는데.... 마침 소가 얼매나 열심히 풀을 뜯는지, 쪼매라도 더 멕일라꼬 기다리다가 이래 늦었심더”

조카의 대답이었다. 종률 공이 또 물었다.

“그라믄, 옷이라도 좀 갈아입고 오지 그랬더나?”

조카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아제 집에 조카가 오는데 옷은 잘 차려입어서 머할라꼬요. 일하다가 그냥 왔심더”

종률 공은 이 조카야말로 자신의 뒤를 이어 집안을 이끌 만하다고 생각하고 마침내 그를 양자로 삼았다. 이 조카가 7대 최부자 최언경(1743-1804) 공이다.

기왕에 최언경 공에 대한 일화가 나왔으니 하나만 더 이야기해 두고 싶다. 종률 공은 만년에 진사시험에 합격하게 된다. 영조(1724-1776) 대왕이 80세 되던 해를 기념하기 위해 치러진 별시에서 진사시험에 급제한 것이다. 그러나 종률 공은 식중독으로 의심되는 병에 걸려 성균관에 들어간 지 사흘만에 급사(急死)하는 참변이 일어났다. 부랴부랴 상경한 언경 공이 아버지의 시신을 상여에 메고 오는데 한양에서 경주까지 각각의 동리를 지날 때마다 그 동리의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상여를 져 주어서 경주까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고 전한다. 그 일을 보면 어려운 일을 당한 집안에 대해 여러 곳의 군민들이 측은지심을 발휘했다고 할 수도 있지만 당시만 해도 경주-서울 간에 경주최부자의 덕행과 명성이 그만큼 알려졌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이후 최언경 공은 ‘서울은 원한의 땅이다’ 며 서울로 가서 과거를 보지 않았다. 대신 그 자신 유학을 장려하기 위해 서당을 짓고 온갖 책자를 구한 다음 후학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그게 바로 이조마을에 있던 남강서당의 효시였다. 남강은 최언경 공의 호다.

 최언경 공은 서당을 만들기 위해 이전까지 집안에 내려오던 서책과 따로 사들인 700여 권의 서책을 서당에 배치했는데 그 이후 대를 거듭하면서 귀한 서책을 보는 족족 구입하여 서당에 제공했다.

이 이야기에서 보듯 최부자댁이 중시한 것은 겉치레가 아닌 평상시의 행동거지와 사람 냄새가 나는 속내였다. 여기에 걸림돌을 디딤돌 삼아 위기 국면을 돌파한 지혜도 돋보인다. 최부자댁에서 배울 수 있는 또 다른 긍정의 모습이다.


X
URL을 길게 누르면 복사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