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大愚), 큰 바보들의 스스로 낮춘 이야기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1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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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부자댁에서 기념촬영 중인 젊은 관광객들과 최부자댁 현판들이 보이는 사랑채.

↑↑ 박근영 작가
나의 역저 ‘The 큰 바보 경주최부자’는 4년 넘는 인터뷰와 자료 조사 끝에 쓴 책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제목을 정하는데 무려 1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그 이유는 이 책을 쓰는데 결정적인 회고와 구술을 해주신 최염 선생님께서 당신의 이름이 들어가는 책에 조상님들을 향해 감히 ‘바보’라는 단어를 쓸 수 없다고 염려하신 때문이다. 

그래서 각계의 전문가들께 검증을 받아 이름을 결정하는데 1년이 걸렸다. 당시 경주최부자 선양회 회장이셨던 조동걸 교수님과 서울대 법대 교수이셨던 박병호 교수님 등 사계의 권위자들께서 ‘큰 바보’를 쓰는 게 합당하다는 말씀을 해주셨는데도 그 제목을 쓰시는 것을 망설일 정도이셨다.

내가 이 제목에서 ‘큰 바보’를 고집한 것은 단순히 내 최부자댁의 큰 뜻을 표현하기 위한 선택만은 아니었다. 나는 이 제목이야말로 역대 최부자댁 선조들께서 미리 확정해 놓은 제목이라 믿었다.



대우헌, 둔차..., 세파를 초월해 힘을 기른 놀라운 지혜의 증거들

최부자댁을 찾는 사람들은 사랑채에서 몇 개의 현판을 마주하게 된다. 용암고택(龍庵古宅) 대우헌(大愚軒), 둔차(鈍次) 그리고 문파(汶坡) 등의 현판들이다. 이제는 인터넷에 그 현판의 의미들을 해석하는 글들이 꽤 있긴 하지만 대부분 방문객들은 진정한 뜻을 알지 못한 채 집만 보고 한쪽에 세워 둔 육훈과 육연에 대한 안내만 읽고 돌아가기 십상이다.

물론 육훈이나 육연도 중요하지만 나는 최부자댁 윗대 조상님들의 지혜가 이 현판에 그대로 반영되었다고 확신했다. 그 현판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아무래도 대우헌(大愚軒)일 것이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큰 바보가 사는 집이란 뜻이다.

바보란 모자라는 사람이다. 사리분별에 어둡고 어수룩하여 제 앞가림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바보다. 그런데 큰 바보는 그런 바보들을 뛰어넘는 더 바보라는 뜻이다. 과연 이 속에는 무슨 의미가 담겨 있을까?

대우(大愚)는 9대 세린(世麟 1791~1846) 공의 호다. 세린 공은 정조(1752-1800) 말엽에 태어나셔서 순조(1790-1834)를 거쳐 헌종(1827-1849) 말엽까지 사신 분이다. 세린 공이 이런 호를 가진 것은 어쩌면 당시의 시대상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때까지도 당쟁이 끊이지 않았고 특히 외척들이 발호하며 조정의 기강이 최고조로 흔들리던 시절이다. 굳이 벼슬살이하며 살얼음판을 디딜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 시기는 실사구시를 중시하는 학풍이 세간에 유포되어 벼슬살이보다는 경제와 실용을 중시하는 관념이 성장할 때다. 

한편으로는 납속(納粟), 공명첩(空名帖) 등의 남발로 인해 철옹성 같았던 양반 본위의 신분질서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여기에 천주교가 전국에 암암리에 유포되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런 시대, 세린 공은 생원과에 합격해 조정으로부터 참봉에 제수되기도 했지만 스스로 사양하고 끝내 벼슬길로 나가지 않고 조용히 학문에 전념하고 조상들의 행적을 모아 책을 엮는 것으로 평생을 소일하신 분이다. 아울러 조상 대대로 이어오던 가난 구제와 접빈객을 잠시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대우라는 호의 이면에는 신분질서의 혼란과 가치체계의 혼동이라는 시대 속에서 그저 알아도 모른 척, 보고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하는 바보스러움이 더 현명하다는 깊은 뜻이 숨어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는 내 것을 풀어 남을 돕고 대의를 위해서는 작은 손해쯤은 기꺼이 감수하는 대범함도 숨어 있다.

불교에 조예가 있는 분들은 대우라는 말에서 선종의 중요 분파인 임제종을 창시한 임제 스님의 일화를 떠올리기 십상이다. 임제 선사가 황벽 선사를 만나 가르침을 얻던 도중 깊은 깨달음을 주신 또 한 분의 선승이 대우, 즉 큰 바보 선사인 것이다. 대우 선사 역시 자신을 낮추거나 버림으로써 보다 근원적인 선의 깊이를 깨우칠 수 있었을지 모른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안다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어서 자신을 낮추면 낮출수록 더 깊은 깨우침과 가르침이 자신에게 흘러 들어옴을 당대의 선승이 몰랐을 리 없을 것이다.

또 하나 눈길을 잡는 것이 둔차(鈍次)다. 둔차는 11대 최현식(鉉軾 1854~1928) 공의 호다. 이 호는 ‘둔한 둘째’ 혹은 ‘아둔한 다음 사람’ 정도의 뜻을 가지고 있다. 최현식 공은 철종(1831-1863) 대에 태어나 고종(1852-1919) 대, 그러니까 암울하고 긴박했던 근대사의 전 과정을 겪은 분이다. 어떻게 보면 부자로서 왕조가 뒤바뀌고 나라가 외침에 통째로 넘어가는 가장 위협적인 시대를 산 분이다. 그만큼 앞에 나서는 것이 조심스러운 시대였고 스스로 낮추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한 시대를 산 셈이다.

이런 시대에는 굳이 똑똑하게 보이거나 선두에 섬으로서 불필요한 구설에 오르거나 다른 이들의 목표, 요즘말로 타겟이 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한 걸음 물러나 있음으로 오히려 전체를 명확하게 볼 수 있다는 교훈도 이 속에 실려 있다. 오로지 일등이 아니면 안 된다고 기를 쓰는 요즘 세태와 비교해보면 한편으로는 소극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험악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관조적 자세임을 감안하면 상당히 현명한 생각으로 볼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일등 아닌 사람들이 훨씬 많고 굳이 일등이 아니라도 세상을 살아가는 다양하고 훌륭한 방편이 있을 진데 기를 쓰고 일등만 고집하는 세태의 야박함이나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에서 한발 물러나 조금은 느긋하게 여유를 가지라는 교훈적 의미도 들어 있다.

최현식 공의 둔차라는 호의 의미는 최부자댁 가계를 잇는 장면에서 또 한 번 두드러지게 표현된다. 최현식 공은 아들인 문파 선생님이 만 열아홉 살이 되던 1904년에 집안의 전권을 모두 아들에게 물려주신다. 그 이유도 놀라운 것이었다. 최현식 공은 자신보다 아들이 훨씬 강고한 독립정신을 가지고 있었고 식견과 배포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자신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생각을 하고 스스로 가주의 자리를 물러났던 것이다. 다시 말해, 문파 선생님이 집안의 전권을 쥐고 독립운동에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최현식 공의 믿음과 지원이 바탕이었다는 말이다. 

최현식 공은 자기 당대에 훌륭한 독립지사들과 교유하며 그 사고의 틀을 제공했음은 물론 재산권까지 전부 아들에게 넘김으로써 독립운동의 여건을 다진 셈이었다. 아들에게까지 ‘둔차’라는 뜻을 스스로 지킨 둔차 최현식 공의 철학적 기반이 아니었다면 과연 문파 선생님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스스로 둘째 되기를 서슴지 않았던 둔차 공이야말로 어쩌면 그 시대 가장 먼저 깨우친 선각자가 아니었을까?


의친왕 이강 공이 지어준 문파, 만 20세에 집안의 전권을 쥔 놀라운 이력

문파(汶坡)는 마지막 경주최부자 문파 최준(崔浚 1884~1970) 선생님의 호다. 이 호는 고종황제의 둘째 아들 의친왕 이강(1877-1955) 공이 지어준 것이다. 경주최부자댁은 남산 앞을 가로지르는 남천 변에 자리잡고 있다. 

이 남천은 옛날에는 모기내로 불렸고 그게 한자로 문천(蚊川)이다. 경주의 유명한 3기8괴 중 문천도사(蚊川倒沙-모기내의 모래는 거꾸로 흐른다)의 전설을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이강 공은 이 문천 앞 언덕에 사는 사람이란 뜻으로 문파라는 호를 짓고 모기 문(蚊)자가 거슬린다고 여겨 모기 문자 대신 내이름 문(汶)자로 바꾸어 문파라는 호를 지어준 것이다. 물은 예로부터 만물의 근원으로 여겨졌고 하천 역시 주변 생명의 젖줄이라 여길 때 문파가 가진 의미 역시 그런 뜻으로 쓰이지 않았을까. 여기에는 또한 낮게 흐르는 내와 같이 늘 겸양하라는 의미도 숨어 있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문파 선생이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하고 전 재산을 희사해 대학을 설립한 것도 이 호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사랑채에 걸려 있는 현판 중 하나인 용암고택(龍庵古宅)이란 현판은 8대 최기영(1868-1834) 공의 호 용암(龍庵)에서 비롯되었다. 용암이란 용의 암자를 뜻한다. 고택은 오래된 집이란 뜻이다. 과거 선비들이 호를 지을 때 스스로를 낮추어 자기가 태어나거나 살았던 동네 이름을 써서 지었다. 이를테면 이황 선생의 퇴계(退溪)도 선생이 살던 집 골짜기 이름이고, 율곡(栗谷) 역시 이이 선생이 살던 마을 이름인 밤나무골에서 따온 것이다. 이조리에 용바위라고 있는데 이 용바위에 집이 있었다고 이런 호를 지었다는 해석이 있다.

이렇듯 최부자댁 선조들은 험난한 시대 속에서 스스로를 낮춤으로써 화를 제거하고 평안을 추구했음은 물론 그 평안에서 얻어진 여력(餘力)을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과 나라를 구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것에 썼다. 바보스럽게 보이고자 했지만 결코 바보가 아닌, 늘 둘째가 되고자 했지만 끝내 둘째가 되지 않은 최부자댁 조상님들의 지혜는 세상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아주 무겁다.

솔직히 말하면 이 책의 제목이 일찍 정해졌다면 어쩌면 대박이 났을지 모른다. 이 책의 제목을 정하지 못해 망설이던 그 1년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대통령이 하야하는 엄청난 격변의 시대였다. 그 주인공이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의 비리 중 하나로 지목된 것이 영남대학교에 희사되었던 경주최부자 댁 재산이었고 그 재산이 불법적이고 강제적으로 넘어간 사실을 온갖 신문과 방송 매체에서 내놓고 떠들고 있을 때였기 때문이다. 그런 중요한 순간이 다 지나고 결국 대통령이 내려가고 한참이나 지난 다음에야 책이 나왔으니 최부자댁에 대한 세상의 관심도 덩달아 시들해져 버렸다.

그러나 인생만사새옹지마(人生萬事塞翁之馬)라는 말이 있듯 그 책 제목에 끝내 ‘큰바보’가 아닌 다른 이름을 넣었다면 평생 후회가 남았을 것이다. 경주최부자 조상들은 대를 이어가면서 세상에서 가장 큰 바보 역할을 자처한 분들이다. 그런 분들에게 큰바보라는 찬양이 빠진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팥앙금 없는 찐빵’이고 ‘물 없는 오아시스’ 아닐까? 나는 그 제목에서 책의 골수를 찾았다고 지금도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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