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아파트!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1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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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성철 교수
동국대 파라미타 칼리지
우리 한국인들은 국가에 대한 자부심이 차고 넘친다. 야구나 축구 등 외국과 겨루는 국제 대회를 보면 무슨 말인지 안다. 한국어에 대한 자부심은 또 어떻고. 지금 전국이 “아파트~ 아파트~”로 시작되는 중독성 강한 멜로디를 흥얼거린다. 한국인들이 즐기는 술 게임에서 힌트를 얻어 만들었다가 대박을 친 노래라고 한다. 

인터뷰 진행자가 아파트(APT)가 혹시 아파트먼트(apartment)를 말하는지를 묻자 여가수는 “아니, 아파트(apatue)!”라고 교정해 줬단다. 끝의 음을 길게 빼는 한국인 특유의 발음 그대로 말이다. 이건 한국인 영어니까 한국인처럼 발음해야 해 하는 느낌이랄까. 문득 예전에 미국인들이 ‘맥도널드’를 일본인처럼 ‘마꾸도나루도’라고 발음하던 게 기억난다. 이게 소프트 파워(soft power)다.

이런 상황이 적어도 한국을 방문한 외국 사람들 눈에는 이해하기 어려울 거다. 한국인들의 영어 공부에 대한 집착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로 보이는 아이들이 학원 버스를 쉼 없이 오르내리는 모습은 일상이다. 자기 몸통만 한 가방을 멘 채 오늘 배운 영어 표현을 마중 나온 엄마한테 자랑한다. 단어 한두 개를 발음하던 애 입에서 어느새 문장이 줄줄 흘러나오면 엄마 얼굴은 만족감으로 환해진다. 아이들이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길 바라는 만큼 영어학원 건물은 높아만 간다. 학령인구의 감소와는 상관없는 현실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영어 공부를 멈추질 않는다. 능숙한 영어는 승진이나 보다 나은 직업을 보장해 준다. 이처럼 영어가 든든한 취업 보증수표로 취급받다 보니 영어를 쓸 일 없는 평범한 회사원에서부터 대기업 회장에 이르기까지 영어에 매달린다. 급기야 영어 발음을 좋게 해주는 수술(설소대절제술: lingual frenectomy)을 해주는 의사도 있다고 뉴욕타임스는 소개하고 있다. 턱과 혀를 잇는 부분을 절개하면 혀가 좀 더 위로 말려 올라가서 영어 발음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지만, 이런 터무니없는 수술 없이도 서구권에서 자란 한국인들 영어는 완벽하다.

괴상망측한 모습은 이게 다가 아니다. 중학교에서 영어를 처음 접한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대학교 학비 수준의 영어유치원이 즐비하다. 학원마다 미국, 영국, 호주,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다양한 출신의 원어민 선생님들이 있고, 미국식 악센트에 대한 수요가 많아 영국인 선생님도 미국식 발음으로 학생들을 가르친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소수이긴 하지만 영국식 악센트가 좀 더 지적이고 고급지다(?)는 이유로 선호하기도 한다. 원어민 선생님에 대한 수요가 많다 보니 “숨 쉬고 있는 백인이기만 하면 언제든지 채용”된다는 어느 원어민 강사의 인터뷰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여전히 학교 수업은 의사소통 능력보다 문법에 치중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학원은 그나마 나은 편이지만 학원 생태계도 묘한 게 한국답다. 학부모들은 자기 자식이 영어를 잘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상급반으로 올려달라고 끊임없이 요구하고, 학원 운영자도 더 난해한 단어와 긴 지문으로 구성된 레벨 시험으로 기존 학생들은 통제하고, 신규생들 자존심에 생채기를 내서 충성스러운 고객으로 만든다. 부모와 학원도 물론이거니와 학생들도 자기 수준보다 훨씬 어려운 지문과 씨름하다 보면 엄마 잔소리를 안 들어서 좋다.

가수 싸이 덕분에 이제 빌보드 같은 유명 차트엔 한국어 가사 그대로인 노래(아니면 한국어와 영어가 섞여 있는)들이 제법 많다. 반가운 소식이다. 걸그룹 멤버들은 오래전부터 자신의 목소리로 한국어를 가르쳐왔다고 한다. “말 편하게 해요”, “우리 서로 말 놓자” 등의 표현도 배울 수 있다고. 외국 팬들은 이런 방식을 ‘돌민정음(아이돌이 가르쳐 주는 훈민정음)’이라고 부른단다. “한국어를 배울 수 있게 한 하이브 에듀(방탄소년단 소속사의 자회사)는 정말 창의적이야!”, “블핑(블랙핑크)이 가르쳐준다니 한국어가 재밌겠는걸” 같은 댓글에서 한국어를 알고 배우고 싶어 하는 그들의 열망을 읽는다. 

이처럼 연예인들이 민간 외교관의 역할을 톡톡히 하는 배경에는 외국어를 배우는 그들의 건강한 태도도 한몫한다. 어차피 언어는 소통하기 위한 도구이니까. 하지만 한국에서 영어는 정치적이고 계급적이다. 누구나 영어는 잘하고 싶어 하지만, 설령 잘해도 혀를 왜 저렇게 굴리냐? 눈치 주는 곳이 한국이다. 우리 아이들 눈에 안 튀게 하려고 그 비싼 영어유치원엘 보낸 건 아니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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