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조선문화 산책<1>-영광대(影光臺)에 담겨진 의미

조철제 (향토문화연구소 소장)

경주신문 기자 / 2008년 08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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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가을 어느 날 경주 지역의 명망 높은 선비들이 모두 사마소(司馬所)에 모였다. 당시 사마소는 월정교 북단에 있었다. 문천(汶川) 북쪽에 있다 하여 문정(汶亭) 또는 문양정(汶陽亭)이라 부르기도 했다. 처마 아래로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황금빛으로 물든 들녘엔 오곡이 익어가고, 손에 잡힐 듯 도당산이 저만큼 자리하고 있었다.
ⓒ 경주신문

사마소란 생원시나 진사시에 합격한 문사들이 모여 시를 짓고 한담하며 지방 풍화(風化)에 이바지할 목적으로 창건되었으나 임란 때 소실되었다. 1741년에 이르러 진사 이덕록, 손경걸, 유의건 등의 노력으로 중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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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소는 2개 동의 건물이 있다. 본체에 해당하는 풍영정(風詠亭)은 갓 사마시에 합격한 젊은 신진 사류가 주로 사용하였고, 그 서쪽의 병촉헌(炳燭軒)에는 원로 선비들이 애용하고 있었다. 이들 노소의 선비들은 엄격한 자리 구별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수시로 합석하여 글을 읽고 시문을 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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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들에게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한 가지 숙제가 있었다. 사마소 앞 문천에는 신라 때 축조된 월정교 석재가 어지럽게 하천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운반할 수 있는 작은 돌은 인근 주민들이 가져가 섬돌이나 주춧돌로 사용하였고, 남은 것은 움직이기 어려운 베개 모양으로 생긴 침석과 큰 돌만 흩어져 있었다.

사마소 선비들은 월정교에 사용된 잘 다듬어진 이들 석재를 사마소 경내로 운반하여 적당한 높이의 대(臺)를 쌓고 싶었으나 여러 해를 두고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내 이날 모인 선비들은 공사를 시작하기로 하고, 인부를 동원하여 침석 몇 개를 사마소로 옮겨 대를 쌓으니 꼬박 7일간의 공정이었다. 그리고 이 대를 영광대(影光臺)라고 이름지었다. 이는 송나라 주희의 시에 나오는 ‘천광운영공배회(天光雲影共徘徊)’를 줄여 쓴 말이다. 하늘의 빛과 구름 그림자가 함께 어른거린다는 뜻으로, 옛 사람의 책 속에는 훌륭한 글귀와 경계로 삼아야 하는 내용을 같이 내포하고 있다는 말이다.

독서를 통해서 사람의 심성을 함양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글씨는 문과에 합격하고 사헌부 지평을 지낸 사류재(四留齋) 이규일(李圭日)이 썼는데, 강경한 서체로 유명했었다. 기문은 사마시에 합격하고 경상도 소모사(召募使)를 역임한 정헌(定軒) 이종상(李鍾祥)이 지었으며, 이 일을 주관한 사람은 역시 문과에 급제하고 경주 부윤을 역임한 노석(老石) 이능섭(李能燮)과 이종상의 아우이며 사마시에 합격한 오포(梧圃) 이호상(李琥祥) 등이었다.

영광대(影光臺)는 이렇게 해서 세워졌다. 대라고 하지만 침석 몇 개를 포개 쌓는데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경주 최고 엘리트들의 정신세계가 아로새겨진 집성체이다. 낙성식 하는 날 많은 문사들이 모여 시를 지어 노래한 글이 전하고 있다.

이종상은 영광대기(影光臺記)에서 ‘이 돌은 신라 때 월정교가 되었다가 지금 영광대로 우뚝 섰다. 다시 천년 뒤에 뉘 집의 진석(鎭石)으로 사용될 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월정교로 있었을 때 군왕을 위한 가악의 소리를 들었고, 영광대가 되어선 문인들이 정사(政事)를 위한 여가에 음영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기술하였다.

월정교가 무너진 뒤 천년 만에 영광대가 건립되었고, 다시 천년 후에 어떠한 모습으로 변할지 모른다고 이종상은 말했다. 그러나 영광대는 세워진 후 150년도 못되어 사마소마저 옮겨간 빈터에 홑몸으로 옛 선인들의 꿋꿋한 자세를 잃지 않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제 다른 석재들과 아울러 월정교 복원이란 이름으로 다시 부재로 활용되어 천년 세월이 지난 후에나 볼 수 있을지 모를 위기에 처해 있어서 안타까울 뿐이다. 적어도 이것만은 현 사마소의 경내로 이건함이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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