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양주에서 만난 통일신라 최고의학자 최치원 선생

이진락 /위덕대 겸임교수

경주신문 기자 / 2011년 08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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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외국가면 애국자가 된다고 한다. 타지에서 고향사람을 만나도 반가운데 특히 타국에서 고국 사람을 만나면 그보다 반가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번 여행에서 그 보다 더 기뻤던 일은 고향 사람들은 물론 고국 사람들도 조차도 별로 그 사람의 진가를 잘 알아주지 않는데도, 머나먼 타국 땅에서 이국인이 그 분을 더 알아주고 기념관을 지어주고 그 분의 행적을 소개하는 전시물을 관광객들에게 사시사철 보여주고 있다는데 있었다.
수 년 전에 중국의 양주사람들이 경주를 찾아와서 양주에 최치원기념관을 지었으니 경주와 교류하고 싶다고 했을 때 나는 ‘아하! 중국 사람들 장사속이 빨라서 중국을 찾는 한국관광객들을 조금 유치해 보려는 심사구나!’ 라고 여겼었다. 천년고도 경주의 자존심에 중국의 왕조의 수도였던 ‘서안’이나 ‘낙양’ 정도라면 몰라도 조그만 중소도시 같은 ‘양주시(揚州市)’는 별로 중요히 여기지 않았다. 체면치레로 경주의 시장과 의장 그리고 경주최씨 문중에서 한 두 번 방문하였고 경주시와 양주시간의 서예협회에서 서예교류전을 하는 정도 이외엔 경주사람들에겐 양주시라는 존재감이 별로였던게 사실이다.
모처럼의 중국여행길 테마를 중국문화의 원류지이자 어쩌면 중국문화 정수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코스를 정했다. 부산에서 상해에 도착하자말자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들르는 상해임시정부기념관을 관람하고 차를 몰아 소흥으로 달렸다.
경주남산 포석정 유상곡수의 원류지가 바로 소흥에 있는 난정인데 왕희지가 지은 정자이다. 소흥은 춘추전국시대 월왕 구천에 의해 건설된 월국의 도읍지이자, 세계적인 문학작품 ‘아큐정전’을 쓴 루신(魯迅), 중국의 첫 총리 주은래(周恩來), 중국 근대화와 여성운동의 시초인 츄우진, 모택동으로 칭송받았던 교육자이자 사상가인 차이웬페이 등 유명인사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중국은 그 분들의 생가들을 잘 보존하고 관리하며 수 많은 국내외 관광객들의 발길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아직도 왕희지의 서법박물관이 있고 그의 필체를 모방한 서예작품을 팔고 있으며, 사시사철 흐르는 유상곡수을 보면서 포석정에도 실제 물이 흐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소흥에 기원을 둔 월극(Yue Opera)은 경극 다음으로 유명한데, 대표작으로 ‘홍루몽’, ‘양산백과 축영태’등은 너무나 잘 알려진 작품이다.
중국은 항주에다 송(宋)문화테마파크인 송성을 만들었고 그 중에 으뜸인 “송성가무쇼(宋城千古情)”는 제1막 항주의 빛, 제2막 금과철마(영웅 악비의 무용담), 제3막 아름다운 서호 아름다운 전설(백사와 뇌봉탑의 사선춤, 양산백과 축영대의 나비춤), 제4막 세계는 항주에서 모인다 라는 줄거리인데 한국돈으로 약 60억원이 투자되고 300여 명의 출연진이 동원되는 대작으로 365일 관광객들의 발길이 넘친다. 그 뿐인가? 북경올림픽 개폐막식 연출로 더 유명해진 장예모 감독의 ‘인상서호(印象西湖)’는 계림 양삭의 ‘인상 유삼저’와 함께 연간 300억 원 이상의 이익을 창출하는 세계적인 공연으로 자리 잡고 있다. 아름다운 보문호수와 경주세계문화엑스포 공원을 갖춘 경주야말로 문화관광 도시로서 가야하고 쫓아야 할 이상적 모델이 아닌가 싶다. 불과 3년여 만에 “ 중국에 가서 항주를 보지 않고는 중국의 아름다움을 보았다고 할 수가 없고, 항주에 가서 서호(西湖)를 보지 않으면 항주에 갔다 왔다고 할 수가 없고, 서호에 가서 인상서호를 보지 않으면 서호에 갔다 왔다고 할 수 없다.”는 말까지 생겨난 인상서호! 갑자기 경주의 안압지 공연이 떠오르고 경주세계문화엑스포 공연이 떠올랐다. 뭔가 조금은 아쉬웠다. 아니 많이 아쉬웠다. 1998년에 처음 시작한 문화엑스포는 몇 년 뒤 세계적인 테마문화공원을 만든다고 자화자찬했거늘, 그동안 수 천억 원의 예산이 들어갔고 2년, 3년에 한 번씩 요란하게 떠들건만 불과 서너 달 잔치가 끝나고 나면 사람들의 뇌리에서 쉽게 잊혀지는 공연들과 행사들... 요즈음 중국 웬만한 관광지 입장료는 우리돈으로 만 원 정도이고 인상서호나 송성가무쇼 등은 입장료가 3만5천원에서 4만원을 홋가해도 내외국인 입장객이 줄을 서는 반면 사실상의 입장권예매를 강매하다시피 하는 국내 어느 행사와는 비교가 되기도 한다. 수 많은 국민들 중 상해 소주 항주여행 한 번 정도 안하신 분들이 없을 정도이다. 그 중에 최근에 다녀오신 대부분은 항주의 송성가무쇼와 인상서호를 거의 한 번씩 보았을 것이다. 최근에는 국내여행사들이 황산 여행상품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했고 경주의 양동마을을 연상케하는 ‘홍춘(宏村)’과 ‘서제(西遞)’를 추가시켜서 국민들의 문화관광 수준을 한층 업그레이드 시켰으니 그 분들이 다시 경주를 찾을 때 어떤 감회를 느낄지 고민해야 할 처지가 되어 버렸다. 물론 자부심이 강한 경주인들의 마음에야 양동마을을 홍춘이나 서제에 비할 바가 못된다고 하겠지만 송나라 때 기원한 800년 900년 역사를 가진 이 두 마을은 중국의 보기 드문 고대 민가 건축군으로 수많은 관광객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아름다움이야 양동마을의 한옥이 더 한 수준 위라고 자화자찬하고 싶지만, 중요한 것은 그 곳에 사는 주민들이 생활하면서 집집마다 관광상품 가게를 겸하고 있는 점, 그리고 민박으로 짭짤한 수입으로 올리고 있어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후 수입이 더 늘어나 주민불만이 적다는 점이 흥미로왔다.
소흥, 항주, 황산, 서제, 홍춘을 거쳐 신라왕자 김교각 스님의 등신불이 안치된 구화산 월신보전을 참배한 발길은 아름다운 호수의 도시 지주시(池州市)에서 하룻밤을 지새고 KBS역사스페셜에서 흑치상치 장군의 비석을 발견했던 남경박물관을 향하는 도중에 지도책에 태백(太白)이라는 도시가 나오길래 수소문하여 찾아가보니 바로 당나라 시인 이태백(李太白)의 묘였다. 당현종과 양귀비가 사는 구중궁궐에서 그 유명한 ‘청평조(淸平調)’등 수많은 시를 지었으나, 황음무도한 생활에 젖은 세도가를 멸시하다 모함받아 귀양살이와 유랑생활을 하다 762년에 안휘성 당도(當途)에서 병석에 누워 기구한 일생을 마쳤는데, 후대 사람들은 그의 무덤이 있는 곳을 태백이라 불렀고 지금은 안휘성 당도시(當途市) 태백현(太白縣) 태백촌(太白村)에 그의 묘소가 있는데 그 곳에는 그의 시를 당대의 유명 서예가들이 쓴 글들을 비석에 새긴 수 많은 작품들이 전시된 비림(碑林)이 함께 있어서 찾는 이의 발길을 오랫동안 머물게 한다. 태백묘의 비림을 보면서 경주에도 아름다운 공원 어느 곳엔가 신라의 아름다운 향가들을 경주의 향토서예가들의 정성스런 작품으로 쓰고 그 작품들을 경주의 석공들의 손으로 새겨서 ‘신라향가비림’을 만들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러나 이번 여행길에서 가장 큰 감동은 2004년에 새로 지은 건물로서 외형은 서울의 중앙박물관에 비길만한 현대적인 건물의 양주박물관에서 였다. 최치원기념관을 먼저 갈까하다 우선 예의상 그 도시의 박물관을 먼저 찾아보자고 들렀었다. 고고학적인 유물이야 서안, 낙양, 북경, 상해박물관에 비할 바 못되지만 현대식 건축물에다 “양주중국조판인쇄박물관/양주박물관” 두 제목이 특이하였다. 알고 보니 양주시가 100여 년 전 서양 열강의 침략 이후 새롭게 발전한 상해, 홍콩, 마카오 등 항구도시 이전에 당나라 때부터 명나라 청나라시기에는 가장 경제가 활성화된 항구도시인 동시에 역대 국립 인쇄국이 있던 곳이었다. 서예, 그림, 문학, 사상의 중심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중국문화의 중심지요, 특히 근대에는 아직까지 중국의 실력자인 강택민의 고향이라 박물관 현관 로비에 강택민의 글씨가 조각되어 있고, 정말 어마어마한 규모의 조판인쇄(雕版印刷)전시관을 지어놓았다. 그 안에 전시물 중 몇 몇 역사적인 인물에 대한 초상화와 활동상황을 전시해놓았는데. 가장 눈에 띄는 두 역사적인 인물로 일본에 불교를 전하여 일본 나라시 당초제사에 모셔진 감진(鑒眞)스님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 옆에 ‘桂苑行人 東國儒宗 신라인 최치원’을 초상화와 함께 소개해 둔 것을 보고 한 동안 발길을 옮길 수가 없었다. 32페이지짜리 양주박물관 도록책의 앞쪽 6페이지에 자랑스럽게 등장하는 최치원 선생의 활약상을 고국과 고향의 사람들은 잊고 있다. 아니 알고는 있어도 국사 시간에 몇 줄 배우는 정도 지식밖에 없었는데, 어쩌면 중국사상문화의 진수를 보존하는 양주시의 현대적인 박물관의 가장 눈에 잘띄는 곳에 소개되어 있고, 최치원기념관까지 별도로 지어서 존경심을 아끼지 않는 중국 양주사람들에게 고마움과 존경을 표하고 있었다. 귀국하면 최치원선생의 혼이 살아 쉼쉬는 경주남산의 상서장과 낭산 자락의 유적지를 더 자주 찾아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양주의 최치원기념관도 알고보니 단순히 한국관광객들을 끌기위한 것이 아니라 양주인물 강택민의 힘을 바탕으로 엄청난 발전을 거듭하는 양주의 문화예술시설 확충의 일환으로 지어졌고 무엇보다도 중국인들의 최치원 선생의 활동상에 대한 진심어린 존경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중국양주박물관에는 최치원선생의 “빈공진사최치원”이라는 제목으로 “당나라 말기에 12세에 중국에 들어온 소년 최치원은 18세에 이름을 얻고 22세에 회남절도사 아래 서기로 부임했다”고 적고 있다. 또한 “ 황소의 난을 진압하는 군사작전에 공을 세웠고, 계원필경집을 남겼으며 884년 귀국하였으나 고국의 어지러운 정치상황에 좌절을 느껴 은거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어찌되었던 어느 중국문화답사길 보다도 양주박물관에서 만난 최치원 선생의 초상화를 보면서 경주인의 자랑스러움과 그동안 돈만 밝히는 장사꾼의 이미지로 중국사람을 조금은 무시했던 마음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자랑스런 신라인! 최치원 선생은 아직도 중국 양주에서 살아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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