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최계종崔繼宗선생 별장 ‘육의당 六宜堂’
충의를 버림이 없었던 육의당<六宜堂>… ‘여섯때마다 절경’<朝暮 春夏秋冬>
선애경 기자 / 2013년 05월 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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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구에도 심도있는 자문을 구해주신 최계종 선생의 12대손 최종식 선생이 육의당 선생을 봉안하고 있는 묘우인 석호정사 앞에 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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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가 시원하니 봄경치가 아릿답고/ 호수가 평온하니 거울처럼 열었네/ 중략.../ 온갖 잡념 모두다 쓸어가는 곳/ 삼공자리 바꾸어도 즐겨옴직 한 곳이라/ 여기 오르니 한없는 생각 일어나는데/ 봄날은 안타깝게 먼저 기우네//
이 시는 육의당六宜堂 최계종崔繼宗 선생과 나이가 비슷했던 전식全湜 선생이 경주 부윤으로 내려와 육의당六宜堂을 찾아 읊은 시다.
육의당은 외동읍 제내리(못안리)에 위치해 있다. 외동읍과 울주군 치술령의 북쪽 견불산과 마주한 곳에 호수 ‘토상지吐上池’가 있고 거기 육의당이 있다. 토상지는 오래전부터 이곳에 있었는데 육의당은 바로 이 호상에 세운 것이다. 여러 그루의 소나무가 고사했음에도 400년 수령의 몇 그루가 육의당을 에워싸고있어 단촐하고 검박한 육의당의 고색古色을 돋보이게 했다. 이름 모를 새들의 한가로운 지저귐은 제내리 봄날 오후의 평화를 더욱 여유롭게 하고.
↑↑ 육의당은 약 400여년 된 가옥으로 창건된 이후 후손들에 의해 4차례의 중건과 중수를 거치면서도 고졸한 대청 상부의 가구수법 등을 잘 간직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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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의당, 최계종 선생이 지은 ‘별서(별장)’
육의당은 조선시대의 가옥으로 1991년 경북유형문화재 제263호로 지정 되었다. 조선시대 육의당六宜堂 최계종崔繼宗(1570~1647) 선생이 1619년(광해군 11)에 지은 별장으로 선생의 호를 따서 이름 지었다고 전한다.
‘육의당’은 선생이 은거하던 집이고 경주 향중이 선생을 높이 모시는 서원을 둬야 한다는 간청에 의해 ‘석호정사’를 창건한다. 매년 봄 음력으로 3월 중경에 향사를 받들고 있다. 현재 육의당은 석호정사의 강당으로 쓰이고 있다.
-한차례 중건과 수차례의 중수
육의당이 정자로 규모가 갖춰진 것은 차남 백사공에 의해서다. 백사공은 구례현감에서 돌아와 육의당에 머물면서 그 규모를 증수했다. 여기에서 날마다 명사들과 함께 시가를 읊으면서 자적하고 후진을 양성하는 터를 제공했다. 이후 육의당을 세운지 100여년이 지나자 건물이 기울어지고 상해 오세손五歲孫 최달징이 일가와 함께 중수하기로 하고 자재를 새것으로 교체하고 병신년(1776, 영조52년)에 육의당을 새로 세운다. 이것이 육의당의 한차례 중건이다.
1890년 다시 중수하는데 이는 후손 최세한 등이 주간했다. 정자가 당시 많이 퇴락되어 보수에 따른 비용이 많이 들었다. 이를 충당하기 위해 종친들이 돈을 모아 갹출하고 인근 이웃 마을 사람들도 이일에 동참했다고 한다. 다시 40여년이 지난 1930년, 육의당이 퇴락해 후손 최정섭 등의 노력으로 중수한 기록이 있다.
이후 한차례 1977년에 다시 중수되어 오늘에 이른다. 육의당의 소유주는 백사 선생의 주손인 최장식 어르신이다. 최계종 선생의 문중에서는 육의당과 석호정사를 관리하고 있다.
↑↑ 육의당은 여섯가지 마땅함이 있다라는 뜻으로 ‘아침과 저녁의 경치가 다르고 춘하추동 네 계절의 절경이 각기 다른 특이한 곳’이라는 의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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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의당六宜堂 최계종崔繼宗 선생은
선생의 자는 경승이고 호는 육의당, 본은 경주다. 최계종 선생은 23세 당시 임진왜란 때 숙부인 최봉천, 형兄인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 장군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열박령咽薄嶺 노곡 계연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후 갑오년(1594) 무과에 급제하고 의병을 창의한 공으로 서생포 수군첨절제사를 거쳐 충청도 남포현감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임란이후 광해군의 난정으로 나라가 크게 어지럽자 ‘나라를 그르친 임금아래 관직을 하지 않겠다’고 해 벼슬을 거역한 죄로 함경도로 귀양을 가게 된다. 이런 와중에 충주에서 ‘한음’ 이덕형 선생이 ‘노모를 모시기 위해 벼슬을 마다한 것이지 항거한 것이 아니다’고 해 귀양을 면한다.
이후 선생은 모든 관직에 나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관직을 버리고 이곳 육의당 별장에서 일생 동안 은거하며 지냈다. 당시 형 정무공은 여러 고을의 벼슬을 역임하는 것에 비교된다.
최계종 선생의 12대손 최종식崔鍾植(86)선생은 “육의당은 여섯가지 마땅함이 있다라는 뜻으로 ‘아침과 저녁의 경치가 다르고 춘하추동 네 계절의 절경이 각기 다른 특이한 곳’이라는 의미”라고 했다.
육의당에서 선생은 항상 시를 음영하며 소요하다가 여생을 마치니 향년 78세였다. 선생은 광해군 이후 벼슬에 뜻을 버리고 낙향해 자연질서의 변화속에서 자신의 삶을 발견하고 성현의 글에 심취했던 것이다. 아울러 차남인 백사 최동언과 함께 시서를 토론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고 전한다.
↑↑ 석호정사의 제수를 보관하는 전사청에는 늙은 소나무가 드리워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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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석호정사石壕精舍’창건, 육의당 선생 봉안
육의당에 향사하려는 논의는 후손들 중심으로 오래 전부터 진행되어 왔다고 한다. 마침내 후손 최정섭은 1922년 향의를 주도해 당시 83냥의 기금을 조성해 향사에 갈음하는 계회를 조직해 운영하다가 조상을 숭상하는 후손들의 열정과 성의에 따라 1993년 육의당을 강당으로 해 ‘석호정사石壕精舍’로 격상시키고 육의당 왼쪽 노송이 우거진 언덕에 묘우를 창건한다. 주향은 육의당 선생으로 모시고 차남인 백사 선생을 배향하고 봉안했다.
최종식 선생은 “석호정사에는 최계종 선생의 차남 백사白沙 최동언의 신위와 함께 배향 되어있다. 백사 선생은 사마시에 합격을 해 성균관 진사를 지낸 분이다. 구례현감 당시 월봉도 저축장려하여 구례현을 위해 기증할 정도로 인품이 뛰어난 이였다”고 강조했다.
석호정사에는 묘우인 상의사尙義祠와 제수를 보관하는 전사청에는 늙은 소나무가 드리워져 있었다. 묘우의 삼문은 정명문貞明門이라 한다.
-흔치 않은 별서別墅건축의 미 지녀
최종식 선생은 “육의당은 약 400여년 된 가옥이다. 중수는 여러번 하고 중건도 한차례 했다”고 하면서 “창건 이후 후손들에 의해 4차례의 중건과 중수를 거치면서도 영쌍창이 남아 있고 고졸한 대청 상부의 가구수법 등을 잘 간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육의당은 구릉지대에 동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장방형으로 토석담장을 둘러쌓은 마당 안에 동남향으로 ‘-’자형으로 육의당을 앉혔고, 앞쪽에는 사주문, 뒤쪽에는 협문(일각문)을 내어 외부와 통하게 하고 있다. 평면은 정면 4칸, 측면 1칸이지만 측면은 좀 긴편이고, 중앙 2칸이 우물마루를 깐 마루방이며, 마루방 양측에는 1칸 온돌방을 대칭적으로 배치했다. 양쪽문의 가운데 기둥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좌측 온돌방 배면의 중방간 위쪽 처마 밑에는 벽장이 있다. 마루방과 온돌방 앞쪽에는 모두 쪽마루를 두었으며, 양측방은 온돌방이다. 기단은 거칠게 다듬은 화강석을 2단으로 쌓고 자연석 초석을 놓아 기둥을 세웠는데, 마루방 앞쪽 중앙기둥만은 둥글게 세웠다. 건물의 정면과 대청의 뒷면에는 쪽마루를 설치했다.
육의당은 특이하게 미닫이창과 출입문을 내고 있다. 대청과 온돌방 사이 경계의 건물 앞쪽 칸에는 3분합 들문을 달고 뒤쪽 칸에는 외짝 들문을 달았다.
화강석으로 2단 쌓기한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대청 중앙 한 곳에만 둥근 기둥을 세우고 나머지는 모두 네모진 기둥을 세웠다. 지붕은 양측에 바람과 비를 막으려고 잇대는 널빤지, 즉 풍판을 단 맞배지붕이다.
육의당은 산자수명한 곳에 지은 흔치 않은 별서건축으로 비록 그 규모는 작지만 중간 문설주(문짝을 끼워 달기 위하여 문의 양쪽에 세운 기둥)가 남아 있는 영쌍창 등은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으로 창호 형식에 볼거리가 있는 건물이다.
노구에도 심도있는 자문을 구해주신 최계종의 12대손 최종식 선생은 지금까지 석호정사의 향사나 관리에 주관이었고 문중의 대표자 중 한 사람으로 활동했다. 경주향교의 전교를 역임했으며 지금은 경주향교의 고문으로 재직중이다. 그리고 자문을 맡아주신 후손 최종식 선생이 쓴 ‘석호정사지石壕精舍誌’와 조철제 선생의 ‘경주문화논총, -석호정사(육의당)편-’에서 참고자료로 발췌 인용한 부분이 있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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