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강의 무예수련장 사정(射亭)을 기록한 인와 이술현 선생

경주신문 기자 / 2020년 07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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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욱 시민전문기자
경북고전번역연구원장
안강출신의 청안이씨 인와(忍窩) 이술현(李述賢,1736~1822)은 조부 수졸재(守拙齋) 이두경(李斗經)과 외조부 귀호(龜湖)선생에게 학문을 배웠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경주부윤 조명정(趙明鼎,1709~1779)이 그의 재능을 괄목하였고, 1765년(영조41)에 진사시에 합격하지만 벼슬보다는 부모봉양과 수신제가에 집중하였으며, 부윤 이익운(李益運,1748~1817)이 그의 효행을 칭송하였다.

부윤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1724~1802)는 “인와는 영남의 훌륭한 선비이다. 나와 함께 교유하였고, 말은 과묵하면서 경솔하지 않고, 함부로 말하지 않았다(李述賢嶺之莊士也 從余遊 其言訥 若不能出諸口)”며 굳건한 행실을 칭찬하였다. 인와는 이계를 찾아가서 부친께서 임종(臨終)에 남기신 가르침을 따라 ‘인와’라 호를 지은 연유를 말하고, 인(忍)에 대한 의미를 더해줄 것을 청하였고, 이계는 「忍窩記」·「贈兵曹參判李公彭壽旌閭記」등을 지었다.

안강의 청안이씨 집안은 대대로 의를 숭상하며 나라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목숨바쳐 일어났으며, 동호 이방린(東湖 李芳隣,1574∼1624.)·이유린(李有隣)·이광린(李光隣) 삼괴정(三槐亭)의 세 인물이 대표적이다. 특히 인와는 의병장 두촌(杜村) 이팽수(李彭壽,1520~1596)의 후손으로, 두촌의 아들 역시 병자호란에서 의를 지켰다. 인와는 전란을 겪지 않아 선대처럼 몸을 일으키지는 못하였지만, 조부의 유사(遺事)를 정리하였고, 의가 잊혀질 것을 걱정해 1783년 정조임금에게 두촌 선대의 정려를 받아 정문(旌門)이 세워지고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증직되게 일조하였다.

『승정원일기』정조 7년 계묘(1783) 8월 29일(무자) 기록에 “진사(進士) 이술현(李述賢)의 상언으로 인하여 하교하기를 ‘이와 같은 절의(節義)가 지금까지 민몰(泯沒)된 것은 어찌 조정의 흠결이 아니겠는가. 경주의 이팽수가 목숨을 바친 사적을 도신에게 분부하여 믿을 만한 글을 참고하고 사림의 여론을 널리 채취하여 이치를 따져 장문하게 하라’하였다”

향사례는 주나라의 향대부가 3년마다 어질고 재능 있는 사람을 왕에게 천거할 때, 그 선택을 위해 활을 쏘는 유교의식에서 비롯되었으며, 활 쏘는 행위는 효제충신(孝悌忠信)하며 그 뜻을 바르게 한다(定其志)는 의미를 갖는다. 인와는 의가 살아 숨쉬는 안강에 살면서 선대의 위업을 계승하고 문무(文武)를 겸하는 활 쏘는 장소 사정(射亭:활 쏘는 장소)에 대한 기억을 글로 풀었다.

-안강사정기(安康射亭記)
안강은 오래된 고을로 안강현의 남쪽 큰 들판에 예전부터 사정(射亭)이 있었다. 선비들이 활 쏘는 기량을 닦는 곳이었으나, 중간에 없어진 지가 40년이나 된다. 순조임금께서 즉위하신지 11년 신미년(1811)에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고 … 다음 해 이 나라를 바로잡았다. 큰 경사를 칭송하니 실로 만세무강의 아름다움이었다. 고을 사람을 불러 모으고, 고을의 한결같은 뜻으로 사정(射亭)을 다시 세울 것을 도모하였다. 나(이술현)에게 그 일의 기록을 부탁하였고, 나도 활 쏘는 정자가 있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옛날 하·은·주 성대한 시절에 상(庠)·서(序) 학교를 설치하고, 현송강문(絃誦講文:거문고를 타면서 시를 읊조리고, 글을 짓는 일)할 뿐만 아니라 또한 사계절 내내 활쏘기를 익히는 습사(習射)의 풍속이 있었으니, 지금 향사례(鄕射禮)의 풍속으로 뚜렷하게 상고할만하다. 자고로 『중용』에 활쏘기는 군자의 자세와 유사한 점이 있다(射有似乎君子) 그리고 공자께서 활쏘기는 덕을 관찰하는 가르침이 있다 등 여기저기 전하는 기록과 백가(百家)의 글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으니, 어찌 활쏘기로 무(武)를 익히고, 글로 서(書)를 익혀서 나라에 일이 없을 때는 문(文)으로 다스리고, 나라에 일이 있을 때는 무(武)로 방어하는 장구(長久)의 술책을 함께 하지 않겠는가? 무릇 어찌하여 말세 이래로 문(文)을 귀하게 여기고 무(武)를 천하게 여기는가? 멀리 시골 선비들의 집안조차 활을 잡고 화살을 찬 선비가 끊겨 없어지고 겨우 이것만 남았으니, 어찌 옛 성인께서 학교를 세운 뜻이었겠는가?

오늘 여러 사람이 나라의 경사를 맞이하여 습사의 의미를 흥기하니 매우 성대한 일이다. … 오른손은 아이를 감싸듯 굽히고, 왼손은 태산을 버티듯 펴는 법은 환한 깨달음이요, 버드나무 잎을 뚫고 이[虱]를 맞추는 신묘함은 마침내 무과급제에 이름을 올리게 하니, 한편으로는 입신양명(立身揚名)의 방도이고, 한편으로는 한병간성(翰屛干城)의 방비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은가? 비록 그렇더라도 사람의 마음이 처음에는 부지런하였다가 마지막에는 게을러지니, 잠깐 하다가 잠깐 그만두는 자는 끊임 없이 흐르는 물과 같아야 할 것이다. 가령 이곳 정자를 유람하는 자들 가운데 습예(習藝)의 마음이 없고, 오직 경치만 감상하며, 때로는 술 때문에 풍속을 잃는 허물이 있다면 이는 명성만 있고 실상은 없는 것이니, 어찌 오늘날 정자에 오르는 의미가 있겠는가? 여러 사람이 그것을 공경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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