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총(石叢) 이상구(李相龜) 선생 (上)… 문화발전의 선각적 횃불 드높여

“이 고장을 잘 가꾸어서 세계최고의 문화촌을 건설하는 것이 내 꿈”

선애경 문화전문 기자 / 2021년 06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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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5회 신라문화제 ‘문화해설의 밤’ 행사에서 이상구 선생(앞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

‘석총(石叢)은 결코 문화예술 방면의 딜레땅뜨(호사가)가 아니고 프로(장인)였지만 그가 행한 문화계의 막강한 스폰서 역할 때문에 그 진면목이 가려져 온 것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1992년 당시 경주고등학교 권윤식 교사가 쓴 ‘석총 이상구 선생의 사십구재를 맞으며’ 중에서)’.

석총 이상구(1920~1992) 선생의 이름 앞에는 ‘제1회’, ‘창립’, ‘초대회장’ 이라는 수식어가 자주 눈에 띤다. 선생이 살았던 격동기의 경주가 문화 적 미몽기였을 때 선생은 새벽처럼 선각적인 문화의 횃불을 드높이 밝혔다. 경주문화의 눈부신 창달의 오늘에 선생의 혁혁한 공적이 굳건한 배경이 된 것이다.

↑↑ 이상구 선생 부부.

선생은 입버릇처럼 “이 고장을 잘 가꾸어서 세계최고의 문화촌을 건설하는 것이 내 꿈”이라며 향토문화 발전을 위한 일념으로 평생을 헌신적으로 일했다. 신라문화제 태동의 밑거름이 된 서라벌 예술제 추진과 후원, 신라문화동인회 초대회장, 문총 경주지부 초대회장 등 선생의 활동 영역은 비단 문화 부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수봉학원 이사로서 교육계에도 공헌했고 국제로타리 경주클럽 회장, 경주 궁도회 호림정 사두 등 수많은 단체의 장을 역임하면서 이 지역 발전과 번영을 위해 봉사해왔다. 당시 법조계에 몸담으면서 경제적 영화도 누릴 수 있었겠지만 이 고장의 문화 창달을 위한 산모역할을 기꺼이 자청했던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후원자로서는 당대 으뜸이었지만, 지역 문화계에 끼친 공로와 영향력에 대해선 거의 조명되지 않았었던 차제였다. 이에 선생의 삶을 재조명해야 한다는 의견이 분분했다.

이상구 선생에 대한 기록이나 자료는 부족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선생에 관해 본지에 기고한 글들이 남아있어 그나마 선생을 기리는 자료로 재구성할 수 있었다. 이번호에선 선생에 대한 기록과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해 보았다. 하편으로 이어지는 다음호에선 선생의 따님이신 이령 여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선생의 발자취와 추억담, 에피소드 등을 다룰 예정이다.

↑↑ 1989년 제1회 경주시문화상 문화부문에서 수상한 석총 선생(오른쪽 두 번째).

-‘서라벌 예술제(신라문화제의 전신)’...이상구 선생(당시 변호사)이 사비로 경비 부담, 예술제 치르고 빚으로 집을 옮겨야 했을 정도

본지 출처인 글에서 서라벌 예술제(신라문화제의 전신)를 태동시킨 일원이자 사재를 털어 후원했던 이상구 선생에 대한 기록이 있어 소략해본다.

‘서라벌 예술제는 1954년 민간주도의 전국규모 예술제로 신라문화제 태동의 밑거름이 된다. 신라문화제가 태동하기 8년 전 1954년 가을 경주에서는 순수 민간단체가 주도한 전국 규모의 서라벌 예술제가 열린다. 전국문화단체 총연합회 경주지부(지부장 이상구)가 신라예술을 숭모하고 민족의 얼을 되찾는 동시에 전쟁으로 얼룩진 앙금을 씻어내려는 목적에서 이 행사를 개최한 것이다.

 
↑↑ 불두를 대신해 익살스럽게 젊은 한 때를 보내고 있는 석총 선생.
이 예술제는 보여주기 식 행사가 아니라 시민은 물론 전 국민이 참여한 예술제였다. 원화화랑 선발대회를 시작으로 열린 이 행사는 양주동 박사, 이한구 교수, 조지훈 교수, 구상 시인 등을 초청해 강연회를 열었다. 문학부, 음악부, 미술부, 사진부, 궁도부, 체육부 등으로 나누어 각 부서에 맞는 전국대회를 열면서 화랑제, 원효대사제, 연등제, 유림선비 상견례, 가장 행렬 등을 아울러 실시했다. 이 예술제의 모든 경비는 당시 문총 경주지부장이었던 이상구 변호사가 사비로 부담했고 김준식, 박종우, 홍영기 등과 윤경렬, 이종용, 오경환 등이 함께 일을 도왔다.

 당시 이상구 변호사는 예술제를 치르고 나서 빚으로 집을 옮겨야 했을 정도의 큰 희생을 치렀다고 전해진다. 이 예술제는 경주에서 열린 전국규모의 행사로 순수한 민간단체에서 열렸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향토문화 발전을 위한 일념에서 이상구씨가 사재를 쾌척하며 헌신적으로 주도한 이 예술제가 밑거름이 되어 현재의 신라문화제를 태동시켰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한편, 당시 서라벌예술제를 개최하는 취지문(1954년 8월)에서는 “우리는 오늘 생의 미각을 잃은 동류(同類)에게 안유(安遊)의 시공을 마련하고자 한다. 일찍이 민족문화가 발상한 성지요, 아름다운 유적들이 천년 풍우에도 그대로 명맥을 이어가는 서라벌에서 이제 향불을 피우고 축전을 올려 선인의 유덕을 기리고자 한다”라고 그 취지를 밝혀두었다.

↑↑ 성건동 자택의 선생이 기거하던 방에 걸려있는 선생의 글씨.

-1949년부터 40년간 경주에서 변호사로 활약, 향리에서 ‘향토자료전시회’ 주관

1992년 12월, ‘석총 이상구 선생의 사십구제를 맞으며’라는 본지 제145호 기고글에서 당시 경주고등학교 권윤식 교사는 선생을 이렇게 회고했다.

‘석총 선생이 어린 시절, 서당접장인 친척할아버지의 권유로 천자문을 배웠고 어릴때부터 명석한 두뇌를 가져 보기 드문 준재였음을 알 수 있었다. 이는, 그의 숙부가 그를 특히 총애해 가정형편이 어려운 석총에게 쾌히 학비를 부담해주면서 유학(1943년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부 졸업)을 시켜주었던 이유였다. 이후 광복과 동시에 고시 1기생으로 법조계에 진출했지만 법관생활은 불과 3개월여, 1948년 부산지법 진주지원 판사직을 사임하며 1949년부터 40년간 경주에서 변호사로 활약했다. 석총은 당시 ‘판사 월급이 겨우 쌀 한 말 값 정도였는데 그 수입으로는 객지에서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어서’라는 것이 남들이 동경하는 영예로운 자리를 물러난데 대한 변이었다. 청렴하고 강직하면서도 옹고집인 석총의 인품을 이 한마디가 충분히 대변한다 하겠다. 해방직후, 향리에서 ‘향토자료전시회’라는 이색적인 행사를 주관했는데 본인의 소장품을 위시해 인근 마을을 두루 다니며 모은 각종 민속자료들을 전시해 촌민들에게 관람시켰다. 그것은 이들에게 문화재의 가치와 소중함을 일깨워 주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당시 누가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었겠는가. “전시회를 마치고 전시품의 일부와 부근 유적지에서 발굴한 많은 유물들을 그 학교에 기증했는데 온전하게 남아있을지 몰라”하며 웃었지만 그 일을 벌인 동기가 석총이 평생토록 펼쳐 온 모든 문화활동과 상통하는 것이기에 중요한 일화라고 생각한다. 석총은 동경 유학시절, 전후 최고재판소 판사였던 진야(眞野)씨의 서사로 일한 적이 있는데 그는 골동품에도 일가견이 있었고 우리나라 고미술에 심취해 우리민족의 우수성에 감탄했다고 한다. 특히 석총에게 각별한 애정을 표했으며 두터운 교유가 이뤄진다. 그의 권유로 유종열(柳宗悅) 콜렉션엘 들르게 되고 석총은 큰 충격을 받는다. 고려청자, 이조백자는 물론, 합죽선이나 은장도 등 민속물에 이르기까지 그 넓은 공간에 가득 메워진 광경을 보고는 이 귀중한 문화유산들이 일본땅에서 영원히 상실될 운명에 울분이 치밀었던 것 일 게다. 이로써 석총이 왜 조국이 해방되자마자 민속자료전시회를 열게 되었는지가 설명될 것 같다’

↑↑ 경주 궁도회 호림정을 창설해 회장을 역임하고 ‘호림정’이라는 현판 글씨를 직접 썼다.

-유치환, 조지훈, 박목월, 김동리, 윤이상, 박봉수, 김준식, 윤경렬 등과 교우//문총 경주지부 초대회장, 신라문화동인회 초대회장 등 역임하는가 하면 발군의 서예가로 비범한 예인

‘석총의 문화재에의 관심은 이렇듯 나라와 겨레에 대한 애정에서 싹텄다고 할 수 있다. 변호사로 경주에 정착한 1949년부터 그의 문화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데 먼저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경주지부를 탄생시키는 산파 역할을 담당한다. 한국전쟁 당시 경주에도 많은 피난민들이 왔는데 그 중에는 문화예술인들도 더러 있었다. 청강 김영기 화백, 청마 유치환 선생처럼 직장을 구해 생활하는 이들도 있었고 피난수도인 부산이 가까웠기에 조지훈, 박목월, 김동리, 윤이상, 홍효민 등이 자주 들르곤 했다. 석총은 지홍 박봉수, 관성 김준식, 고청 윤경렬 등 토박이 예술인은 물론, 이들 피난 문화인들과도 자주 술판을 벌이거나 담소하곤 했다. 청강의 주선으로 월탄 박종화 선생(당시 문총 회장)과 상의해 문총 경주지부를 결성하고 회장직을 맡아 1961년까지 이 단체를 이끌었다.

↑↑ 신라문화동인회 옛 현판.

1956년부터는 신라문화동인회 회장직에 있으면서 1987년 고청 윤경렬 선생에게 그 자리를 넘기기까지 30년간 소위 총통(總統) 회장으로 공헌한 일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동인회는 자체적으로 공부도 하면서 시민문화강좌를 개설하고 경주박물관에서 학생을 가르쳐왔다.

1985년 9월 동아일보에서는 ‘신라문화동인회는 윤경렬 선생과 당시 진홍섭 경주박물관장 등이 한국전쟁 후 보호의 손길을 잃은 채 방치되고 있는 문화재 한 조각이라도 유실되는 것을 막고 보호하기 위한 시민모임을 만들자는데 의견을 모아 태동됐다’고 했다.

이상구 회장은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사적 6호인 흥륜사 터에서 ‘영묘사(靈妙寺)’라는 명문 기와 조각을 찾아내 사지의 내력을 밝힌 것이나 ‘안압지(雁鴨池)’라는 이름은 조선조 때부터 생긴 이름이며 당초는 ‘월지(月池)’였다고 밝혀내 학자를 통해 발표한 일 등은 잊을 수 없다”고 회고한 바 있다.

↑↑ 성덕대왕신종에 관해 쓴 선생의 글씨.

특기할 것은 어느 모임, 어떤 행사에서나 따르게 마련이었던 그 예산의 부족을 오로지 그의 사재로 충당해왔기 때문에 고희를 넘기고도 “생존을 위해 변호사직을 떠날 수가 없다”며 고소를 머금기도 했다.
또 석총이 발군의 서예가란 점을 아는 이는 극히 드물다. 그것은 그가 쓴 글씨를 좀처럼 남에게 내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주고교의 권오찬 교장은 “이 지역을 통틀어 석총의 필치를 능가할 사람이 없다”는 찬사를 했고 고청도 “그 유려하고 활달한 운필을 보고 있노라면 가히 명인의 경지를 실감케 한다”고 말하는 것을 미루어 보더라도 그가 분명 비범한 예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고장을 잘 가꾸어서 세계 최고의 문화촌이 되게 하는 것이 나의 변함없는 꿈”이라고 역설하던 석총의 유지를 받들어 이를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우리가 취할 자세가 아닐까’.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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