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총(石叢) 이상구(李相龜) 선생(下)...향토문화 발전 위한 일념으로 평생 헌신적 후원
석총(石叢) 선생의 발자취와 공적, 지금도 문화현장 일선 곳곳에서 면면히 작동해
선애경 문화전문 기자 / 2021년 07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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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2년 10월, 본지에 게재된 추모사에서의 이상구 선생 사진. |
-신라문화동인회 연구지 ’천고‘ 51호(1983년)에 게재된 석총 이상구 회장의 ‘보경사 탐방기’中.
↑↑ 문화행사 방명록에 글씨를 쓰고 있는 석총 선생. |
주목받지 못하는 음지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조력하고 후원하는 역할자가 그리운 시대다. 힘든 이웃을 돌보며 물밑에서 지역사회에 공헌하고 문화적으로 빛나는 경주로 발전시키는 일에 전력을 쏟은 석총 선생은 가고 없다. 경주의 산하 어디에도 석총 이상구 선생은 부재중이지만 그의 발자취와 공적은 지금도 문화현장 일선 곳곳에서 면면히 작동하고 있다. 경주문화의 눈부신 창달에 혁혁한 공적을 남기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향토문화 발전을 위한 일념으로 평생을 헌신적으로 후원했던 석총 선생의 일생은 오늘, 경주의 훌륭하고 따뜻한 배경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지역사회를 가꾸고 사랑하는데 일생을 바친 그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선생은 격동의 시기, 그 시대 멋을 간직한 지식인으로서 식견과 안목 또한 뛰어난 당대 신사였다. 그런가하면 자신은 검소하면서 이웃과 공익을 위해서는 넉넉하게 쓴 이였다. 화려한 주연에 가려졌지만 빛나는 조연과도 같았다. 이렇듯 지역사회를 위한 다방면의 공로와 봉사활동에 대한 보상은 1989년 제1회 경주시문화상 문화부문 수상으로 이어졌지만 선생의 유지를 존중하고 받들어 더욱 확장시켜나가야 하는 것은 우리 후손들의 몫이라 하겠다.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에 종신토록 경주의 각종 문화단체에 조력하고 후원해 온 선생의 발자취는 지난호(제1492호, ‘석총(石叢) 이상구(李相龜) 선생 (上)편’)에서 짚어보았다. 이번호에선 선생의 따님이신 이 령 선생과의 인터뷰와 지인들의 기억 속 석총 선생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어보았다.
↑↑ 1974년 용담정 답사에서의 석총 선생(검정색 넥타이를 매고 있다). |
-“동기부여와 움직임을 마련해 함께 활동하면서 후원을 통해 도모할 수 있는 힘을 북돋워주시는 행보를 이어가신 듯합니다”
지난달 서너 번, 석총 선생이 살던 성건동 고택에서 선생의 유지를 받들며 살고 있는 따님이신 이 령 선생(72세, 선생의 자제 7남매 중 셋째)을 만날 수 있었다. 귀하고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130여 년 세월에도 잘 지어진 옛 모습 그대로 관리된 한옥에는 석총 선생의 손길과 체취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 했다. 선생이 생전에 거처하던 이 오랜 한옥집에선 지역민과의 ‘공생’을 실천하던 검박하고 고졸한 생활철학이 아직도 손에 잡힐 듯 따스하게 전해졌다. 선생은 정원의 낙엽을 쓸어버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낙엽 위를 밟고 다니기를 좋아한 로맨티스트였다고 한다. 선생이 머물렀다고 하는 단아한 사랑방에서 인터뷰가 진행되었는데 따님이신 이 령 선생이 내놓은 작은 찻상에도 석총 선생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는 품위와 아취가 배어나왔다.
“이 방이 아버지께서 기거하시던 방입니다. 마주보이는 정원의 화초를 보시고 글씨도 쓰시던 방이지요. 요사이는 아버지 방에 오지 못했는데 이렇게 있으니 좋으네요” 선생이 생전에 살았던 집에서의 인터뷰는 진했고 감동적이었다.
크나큰 석총 선생의 공적과 헌신적 봉사에도 유족들은 몸을 낮추며 겸양의 미덕을 견지했다. 나지막하게 조각조각 퍼즐을 끼워 맞추듯 석총 선생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선친의 경주 사랑과 대외적 활동에 대해 그간 우리 자식들이 지나치게 간과해왔다’는 생각을 했다면서...,
↑↑ 석총 선생의 성건동 고택에서 살고 있는 따님이신 이 령 선생. |
“1961년 이 집으로 이사온 후 60년간 이 집에서 가족들이 생활했습니다. 선친께선 엄혹한 시절, 경주를 아끼고 사랑하는 분이셨습니다. 일찌감치 경주문화예술의 현장에 기반을 닦아놓으신 것 같습니다. 경주 관료로서의 직함을 가진다거나 사학자로서 역할 하셨다기 보다는 동기부여와 움직임을 마련해 함께 활동하면서 후원을 통해 도모할 수 있는 힘을 북돋워주시는 행보를 이어가신 듯합니다. 아버지께서 경주에서 진행하는 일들을 굳이 표현하지 않으셔도 저희가 지켜보았던 바로는 재밌고 신기한 일들이 매우 많아서 동화 같은 기억으로 남아있지요. 당시는 아버지께서 추진하시는 일들을 다 알지 못했지만요”
↑↑ 병풍으로 제작된 석총 선생의 글씨. |
-석총 선생의 집은 문화예술인들의 아지트이자 사랑방
“아버지 하시는 일에 어머니(최귀생, 1939년 결혼)는 아내로서 할 수 있는 일에 기꺼이 내조하셨습니다. 봉황대 맞은편 현재의 ‘새빛병원’ 자리가 옛 집이었는데 많은 문화인들을 일일이 다 대접하곤 하셨어요. 아버지께선 여러 사람을 모을 수 있는 구심적 역할을 하셨던 것이지요. 서라벌 예술제(신라문화제 전신)는 1954년 한국전쟁 후 매우 힘든 시절에 개최돼 많은 예술인들이 문학이나 예술적 예향으로서의 경주를 찾곤 했는데 타지에 있는 문화인들을 선친께서 경주로 불러내리기도 하셨습니다. 서라벌문화제를 준비하는 거의 모든 자금은 아버지로부터 나갔고요(웃음)” 당시 석총 선생의 집이 문화예술인들의 아지트이자 사랑방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연유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 석총 선생이 살던 성건동 고택은 130년 세월에도 잘 지어진 옛 모습 그대로 관리되고 있다. 이곳에서 선생의 가족들이 단란한 한 때를 보내고 있다. |
-“함께 누리고 같이 번영하자는 분이셨지요” // “열심히 일하시고 번 돈으로 후원”//신라 인면와 경주에 반환하도록 하는데 일조하기도
“변호사라는 직책으로 오히려 나서지 않으신 것 같아요. 이웃의 어려움을 해결해주시려고 노력하시던 분이셨어요. 그러면서도 경주의 문화창달을 위한 소비를 하셨고 가족에겐 검소함을 가르치셨습니다. 윤리와 도덕에 반하는 사건은 변론을 거절하셨고 상대방과 먼저 화해하기를 권유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약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법익을 수호하시며 감싸 안는 직업이었지 군림하시던 분이 아니었고 국선변론 하시던 기억이 나요. 저희 7남매에게도 매우 인자하시고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으셨죠. 암으로 병상생활을 하던 중에도 너털웃음을 짓고 당당한 몸가짐을 끝내 보여주셨습니다. 어머니께서도 쉴 틈 없이 집안 대소사를 갈무리하시면서도 늘 온화하셨구요”
“우리 7남매 서울서 공부시키신거 밖에 없으셨죠. 당시 아버지의 위상이 높았어도 이재에는 밝지 않으셨습니다. 땅을 사거나 재산을 늘린 일이 없으셨으니까요. ‘함께 누리고 같이 번영하자’는 분이셨지요. 모든 일을 추진함에 있어 혼자 하신 것을 내세우기보다는 함께 같이 한 것을 즐거워하신 분이셨어요” “서예가로 전시를 하신 적은 없었어도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 글귀를 써 낸 전시회에 참여하신 적이 있었어요. 항상 지필묵을 갖춰놓으시고 신문 광고지 한 장도 모아두고 뒷면에 쓰시며 함부로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 성건동 고택에 걸려있는 당호 ‘석총산방’. |
“제2회 서라벌예술제였을 겁니다. 화랑원화선발대회때 우리집에서 후보들이 사진을 찍고 그 분장용품을 다락방에 보관하곤 했던 기억이 나요” “청마 유치환 선생을 경주여중으로 모셔서 경주로 오도록 피력하셨지요. 경주 발전을 위해서라면 전국 어디든 그들을 찾아가 만나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 알게 모르게 예인들과의 관계도 돈독하게 유지하고 경주의 향토미술가에게 후원도 하시고 그들의 작품도 소장하곤 하셨죠. 그러나 막대한 부를 이어받아 후원하신 것이 아니라 열심히 일하시고 번 돈으로 후원하셨기에 다 감당하기 힘드셨을 겁니다. 어머니께서 쓰신 추모의 글에서도 그 정황이 잘 나타나지요. ‘초대문총지부장 시절 서라벌 문화제 규모도 크게 잡아놓고 기관단체 기부금 기다리는 동안 돈은 밖에서 다쓰고 집안 살림은 내게 맡겨 외상 가져오라는 급한 호통에 어쩔줄 몰랐지요. 낮에는 밥시중, 밤에는 술시중, 나는 외상 독촉에 조이고 당신은 빚갚느라 욕보고...’라고 쓰셨죠”
“당시 민가에서 뒹굴어 다니던 신라 석물들이 곳곳에서 발견되면 주민들은 아버지에게 알렸고 한걸음에 달려가 그 석물들을 수습해 관계각처에 알맞게 배치해 놓으셨다고 합니다. 경주박물관에 갈만한 석물은 기증도 하시고요” “경주시가 일본 나라시와 자매결연을 맺을 때도 아버지가 이를 추진하셨고 결연 당시 일본에 가셔서 주선하셨습니다. 또 신라 인면와를 경주에 반환하도록 하는데 일조하기도 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속세의 영화에는 뜻이 없고 오로지 향토의 발전에만 뜻을 두었습니다’
선생은 1990년 9월 변호사를 사직하고 10월 공증인 사무소를 개업했으나 그해 12월 담도암 진단을 받고 1992년 동천동 한 아파트로 거처를 옮겨 치료에 전념했으나 1992년 10월 14일 오후 8시 자택에서 향년 73세를 일기로 별세한다.
지역사회 거목을 잃은 슬픔은 지역신문을 비롯해 여러 기관과 단체에서 애끓는 추모사를 남겼는데 그 중 아래는 선생을 추모하며 1992년 10월 본지에 기고한 ‘고 석총 이상구 선생을 추모하며’ 라는 글에서 신라문화동인회 김태중 회장이 쓴 추모사 일부다.
↑↑ 1960년 남산에서의 석총 선생(맨 앞 오른쪽 첫 번째). |
‘장례는 17일 하동 선영 아래로 상주를 비롯해 대명문답게 많은 복인이 따랐고 문화사회 각 단체가 망라되었는데 특히 신라문화동인회에서는 60명 전원이 참석했다. 호상인 수봉학원 이사장이며 경주시 문화원장인 이상렬 씨는 고인의 생전의 공적을 추모하며 공적패와 장문의 애도사를 헌정해 조객을 애도케 했으며 반사회문화장(半社會文化葬)이 되었다’며 ‘“이 고장을 잘 가꾸어서 세계최고의 문화촌을 건설하는 것이 내 꿈”이라 했던 경주의 큰 인물 석총은 향년 73세를 일기로 애석하게도 우리 곁을 떠났다’고 썼다. 또 학교법인 수봉교육재단, 재단법인 월성이씨 화수회, 사단법인 경주문화원 등이 함께 쓴 추모사 일부도 발췌해본다.
‘옥골선풍 그 모습을, 선비 풍채 그 풍도를 영영 뵙지 못하다니 서럽고도 원통하오이다. 공은 재야 법조인의 다망한 가운데 평생을 두고 연학과 수양에 힘쓰니 학문은 동서를 겸하고 지식은 고금을 통했으며 실로 만인의 귀감이었으며 속세의 영화에는 뜻이 없어 오로지 향토의 발전에만 뜻을 두었습니다. 크고 작은 향토의 문화사업단체 구성은 석총공을 빼고 어찌 논할 수 있겠으며 제1회 경주시문화상을 받으니 조그마한 보답이었습니다’
↑↑ 1956년 석굴암에서의 석총 선생(앞줄 왼쪽 두 번째). |
-“신라문화를 살리는 일에 헌신적으로 앞장섰던 분이셨습니다”// ‘광고지 한 장도 그냥 버리지 않으시던, 댓돌의 신발을 늘 가지런히 정돈하시던’
김윤근 전 경주문화원장은 “주로 겨울에 가면 은주전자에 정종을 덥혀서 한 잔씩 주시고 세배를 나누었던 추억이 있습니다. 신라문화동인회의 전신이었던 신라문화동호회는 경주 문화를 지키고 가르치고 공부하자는 취지로 1956년 창설됐습니다. 답사를 기획하고 활발히 활동하던 가운데 정치, 권력, 역사에도 비판적 시각을 가했더니 이 동호회를 해산시켜버렸습니다. 1~2년 동안 잠정 해체되었다가 동인회로 이름을 바꿔 다시 결성했었지요. 이상구 회장님은 비판적 시각을 견지한 야인이셨습니다. 이런 시각은 오늘의 제게도 큰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이 회장님은 운치있게 사시면서도 신라문화를 살리는 일에 헌신적으로 앞장섰던 분이셨습니다”라고 추억했다.
막내따님 이 원 씨의 추모글(1993년)에서는 뵌 적 없는 선생의 인품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광고지 한 장도 그냥 버리지 않으시던, 댓돌의 신발을 늘 가지런히 정돈하시던, 항상 적당했던 넥타이 길이, 한 잔 하신 아버지의 호탕하신 웃음소리가 들리던 사랑방, ‘남의 불행을 기뻐하면 안되지’ 하시던 지나가는 말씀 한 구절..., 한 번도 언론으로 강조하신 적 없지만 당신의 평소 생활 모습이 바로 당신의 주의(主義)였습니다’
전면에 나서지 않았던 선생과 그의 가족들의 한결같은 성품 탓일까. 지금까지 선생에 대한 특별한 조명이 없었던 것은 만시지탄이었으나 석총 선생에 대한 편린들을 끌어 모으는 작업은 감사한 기회였다. 석총 이상구 선생을 조명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던 이 령 선생(따님)과 가족을 필두로 신라문화동인회, 경주문화원 조철제 원장, 김윤근 전 경주문화원장님께 마음 깊이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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