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야기가 전해오는 천년고찰 기림사(15)

기림사에 왜 매월당영당이 있을까?

하성찬 시민전문 기자 / 2022년 12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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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월당 영당에 봉안한 김시습의 영정.

↑ 하성찬 시민전문기자
김시습의 이름 ‘時習’은 논어 첫 구절 ‘學而時習之 不亦悅乎’에서 따 왔으며, 승명(僧名)은 설잠(雪岑), 호는 매월당(梅月堂)이다.

그는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글을 알았고 세 살 때 시를 지었다. 이 소문이 세종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나이 5세 때 세종께서 김시습을 불러 지신사(知申事)를 시켜 이렇게 물었다.

“童子之學 白鶴舞靑空之末(동자지학 백학무청공지말)”
너의 공부는 백학이 푸른 하늘 끝에서 춤추는 듯하구나.
이에 김시습이 대답하였다.
“聖主之德 黃龍飜碧海之中(성주지덕 황룡번벽해지중)”
임금님의 덕은 황룡이 푸른 바다 가운데를 뒤집는 것 같습니다.

이 말을 들으시고 세종께서 이렇게 하명하였다.
“학문을 더욱 가르치고 길러 나이 장성하고 학업이 성취되기를 기다려서 내가 장차 크게 쓰겠노라”
그리고는 비단 오십 필을 상으로 주어서 스스로 가지고 가게 하였다. 어린 김시습이 무거운 비단을 가지고 갈 수 없어 그 끝을 허리에 둘러 끌고 나갔다. 이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이 조선에 진동하여 이름 대신 오세(五歲 : 다섯 살)라고 불렸다.

‘재승박덕(才勝薄德)’이라는 말이 있다. 재주가 뛰어나나 덕이 부족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김시습에게는 이 말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지와 덕을 모두 갖춘 인물이었다.

세조가 계유정난으로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했을 때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목숨을 잃은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응부, 유성원 등을 사육신, 목숨을 잃지는 않았으나 세조에게 등을 돌린 채 평생 단종을 추모하며 일생을 산 김시습, 남효온,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등을 생육신이라고 한다.

김시습은 사춘기 무렵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가정적인 역경이 시작되었다. 어머니의 산소에서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한 그는 아버지의 재혼으로 외가에 맡겨졌다. 그러나 곧이어 그를 돌봐주던 외숙모마저 죽고, 아버지마저 중병에 걸리는 등 고난이 계속되었다. 그 와중에 결혼을 했으나 결혼생활 또한 순탄치 못했다.

그를 큰 인재로 쓰겠다고 약속한 세종이 승하한 후 일어난 정치적 혼란은 그가 장차 관료로 나가 나라 일을 할 뜻을 잃어버리게 만들었다. 21세 때 삼각산 중흥사에서 공부를 하던 김시습은 수양대군(훗날 세조)이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하던 공부를 접고 책도 모두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그 후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고 사육신이 죽자 아무도 돌보지 않던 그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묻어주었다.

이후 승려로 여러 사찰을 전전하던 중 경주 남산의 용장사에 주석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집필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연유로 1670년에 용장골에 그의 사당이 세워졌다. 그 후 이 사당이 허물어져 개축하려 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여 훼철되고 말았다. 이를 애석히 여긴 경주 유림이 기림사 주지스님께 부탁하여 기림사로 옮겨 세워 초상을 봉안하고 사당에 딸린 논밭을 매각하여 넘겨주니 이때가 1878년이었다.

기림사의 경내를 들러보고 나오다가 입구 부근에서 오른쪽 언덕으로 고개를 돌리면 몇 동의 건물이 있는데 가장 오른쪽으로 보이는 건물이 ‘매월당영당’이다.

대개 큰 사찰에 조사당이란 건물이 있다. 불교에서 하나의 종파를 세운 스님이나 사찰의 창건주 또는 역대 주지스님 등을 기리기 위하여 그분들의 진영이나 위패를 모신 전각이다. 그러나 그런 범주에 속하지 않는 인물을 위한 사당이 절에 있다는 것은 매우 기이한 일이다.

본래 이 영당은 산신각 뒤쪽으로 좀 더 올라간 곳에 있었으나 너무 낡아 무너질 염려가 있자 경주 유림의 요청으로 1996년에 경주시가 새로 현 위치에 옮겨 지었다.

이곳에 있는 김시습의 영정은 강원 김씨 종친회에서 부여에 있는 무량사에 모신 김시습 영당에 있는 자화상을 모사하여 다시 봉안한 것이다.

2006년에 세운 「함월산기림사 사적비」에 이런 기록이 있다.
‘생육신의 한 사람이었고 불승(佛僧)으로서도 행적이 뚜렷한 매월당의 제사를 이때부터 지방유림과 함께 기림사에서 봉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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