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거십훈 & 물건값 깎지 말고 파시에 장 보지 말라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3월 07일
공유 / URL복사
↑↑ 복원된 최부자댁 사랑채 별채.

↑↑ 박근영 작가
최부자댁을 취재하고 연구하면서 찾은 또 하나의 큰 성과는 가거십훈(家居十訓)과 최부자댁에만 전해오는 몇 가지 오래된 가르침이다. 이들 가르침은 육훈이나 육연에 비해 결코 가볍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육훈과 육연에 주목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 뜻이 깊고 가르침의 이유도 명확하게 보며 따로 이 부분을 발췌해 보았다.



가거십훈에는 화랑의 세속오계를 거의 다 넣어두었다. 경주라는 인문적 특성이 반영되었을 법하다.


가거십훈은 문자 그대로 집에 있을 때 지키는 열 가지의 가르침인데 그 내용은 생각할수록 최부자댁 선인들의 지혜가 돋보인다. 가거십훈은 다음과 같다.

인륜을 밝혀라(明人倫) 2. 부모에 효도하라(事親孝) 3. 임금에 충성하라(愛君忠) 4. 가정을 잘 다스려라(宜室家) 5. 형제간에 친해라(友兄弟) 6. 친구를 믿어라(信朋友) 7. 여색을 멀리하라(遠女色) 8. 술에 취함을 경계하라(戒酗酒) 9. 농업과 잠업에 힘써라(課農桑) 10. 경학을 공부하라(講經學)

이런 교훈이 정해진 데는 유교의 덕목이 상당 부분 영향을 미쳤겠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신라 화랑도의 세속오계(世俗五戒)를 거의 다 넣어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당연히 경주라는 인문적 특성이 반영되었을 법하다.

가거십훈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여색을 멀리하라는 말과 농업과 잠업에 힘쓰라는 가르침 등이다.

여색을 멀리하라는 말은 옛날 양반 본위의 부잣집에서는 상당히 의미 있는 가르침이다. 권세 있고 돈 많은 남자들이 가지는 특색 중 하나가 여색을 탐하는 것이었고 조선시대는 공식적으로 축첩을 허용한 일종의 일부다처제 국가였기에 본인이 능력만 되면 첩을 맞는 것이 흉이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색을 멀리하라고 한 것은 당시로선 매우 신선하다. 그래서일까 최부자댁은 손이 귀해 두 번이나 양자를 들인 적이 있었을지언정 처첩의 문제로 골머리를 앓은 적은 거의 없었다는 것이 최염 선생님의 회고였다.

그렇다고 모든 선조들이 일부일처로만 살아온 것은 물론 아니다. 대표적으로 한양에서 벼슬살이하다 낙향한 한 분이 첩실의 몸에서 났지만 집안에서 누구도 그분을 서자로 여기지 않았고 족보에도 일부러 ‘서’자를 쓰지 않아 개인을 존중했다. 그러다가 문파 선생님 대에 이르러 일거에 이런 전통이 사라져버렸는데 상해 임시정부에서 재무부장을 하신 최완 선생을 제외하고는 문파 선생님을 비롯한 모든 형제들이 첩실을 두는 일이 생겼고 이후 후대에서도 첩을 두는 일이 다반사가 되고 말았다.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조상 전래의 훈육을 지키지 않은 탓에 최부자댁 부의 기운이 쇠했다고 말한다.

농업과 잠업, 특히 농업에 힘쓰라고 한 부분이 그 시대의 특성을 반영한 가르침이다. 농경사회에서 농사란 당연히 힘써야 할 최고의 덕목이니 달리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잠업은 명주를 만드는 기초 작업으로 근대 이전까지 매우 중요한 고부가가치 산업이었다. 아무리 질 좋은 명주를 만들고 싶어도 양잠하는 사람들이 없다면 명주를 생산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 잠업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몸소 행한 분이 2대 최동량(1958~1664) 공인데 역시 조금이나마 시대를 앞서간 것은 틀림없고 그런 면에서 아들인 최국선(1631~1682) 공이 부를 일으킬 최소한의 정신적, 경제적 밑거름이 되어 주었을 것이다.

이 가거십훈 이외에도 육훈과 비슷한 비중으로 내려오는 가훈이 몇 개가 더 있다. 육훈이나 육연이 유명해져서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게 보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집안을 다스리거나 세상과 소통하는 면에서 육훈에 못지 않은 지혜가 숨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양입위출(量入爲出)하라’는 교훈이 있다. 이 말은 ‘들어오는 양을 보고 나가게 하라’는 말로 쉽게 설명하면 수입에 맞추어 지출하라는 의미이며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욕심내지 말고 근검절약하라는 말도 된다. 많은 경우, 작은 부를 이룬 사람들은 그 부를 바탕으로 더 큰 일을 벌이다가 오히려 부를 잃고 좌초한다. 그러나 들어오는 수입에 맞추어 지출하면 쉽게 망하지 않는다. 더구나 만석꾼이 수입을 헤아리는 것은 상당한 세심함이 필요하다. 도처에서 농작물과 특산물이 들어오기 때문에 조금만 방심해도 수입을 과대하게 여길 수 있고 그래서 함부로 돈을 쓰다가 결국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로 가산을 탕진한다. 흔히 부자가 3대 가기 힘들다는 말은 바로 양입위출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생긴 속담이라 봐도 과언이 아니다. 부를 이룬 사람이나 그 2세까지는 부를 이루는 과정도 알고 그 규모도 정확하게 알지만 아무런 고생 없이 그 혜택을 누리는 손자는 재산을 믿고 함부로 써대기 때문에 부를 유지하기 힘든 것이다.

갑질이 난무하는 시대, 함께 살아가는 세상 위해 최부자댁 지혜에 눈뜨고 귀 기울여야!
‘물건값 깍지 말고 파시(罷市)에 장보지 말라’는 가르침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갑질논란이 난무하는 우리 시대 육훈보다 더 신중히 들어야 할 교훈일 수도 있다.

물건값을 깎지 말라고 한 것은 소비자 중심이 아닌 생산자의 노고를 십분 이해하려는 전향적인 모습이다. 전성기의 최부자댁은 고정적인 식솔들이 50여명이고 하루 과객만 해도 무려 100여명에 이르는 대식구였다. 무엇이건 엄청나게 소비하는 집이므로 고기며 과일이며 야채며 생선을 막론하고 최부자댁에 물건을 대려면 물건값을 낮추어서라도 거래를 트고자 했을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요즘 정부나 기업들처럼 ‘최저가 입찰’ 같은 것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원성을 쌓는 일임을 최부자댁 조상님들은 누구보다 분명히 알았고 가훈을 통해 대대로 이를 금지함으로써 다방면의 생산자들과 상생하는 바탕을 마련해 온 것이다.

‘파시에 물건 사지마라’는 말도 이러한 교훈이 당연한 연장선에 있다. 파시(破市), 즉 시장이 끝나는 시간이 되면 물건을 빨리 팔아치우기 위해 값을 내려서 팔기 마련이다. 가격도 내려 가지만 물건의 질도 한창때보다는 현격히 떨어진다. 특히 냉동이나 냉장 시설이 없던 시절 고기나 생선 등은 파시가 되면 절반 이하로 가격이 떨어지지만 고기가 상할 수도 있어서 생산자나 소비자나 부담을 안기 마련이다. 반면 파시에 물건을 거래하면 생산자는 떨이로 물건을 남기지 않아서 좋고 소비자는 저렴한 가격으로 물건 살 수 있는 장점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최부자댁 조상님들은 물건이 가장 좋을 때를 골라서 사면 물건을 파는 사람은 제값을 받아서 좋고 물건을 사는 사람은 최고의 상품을 살 수 있기 때문에 서로 효용이 높아진다고 판단하고 이를 장려하고 실천했다. 이것은 사실 부자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역발상이기도 하지만 부자이기 때문에 솔선수범해야 하는 사회적 의무기능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부자가 이러한 사회적 기능을 무시하면 이른바 빈익빈부익부(貧益貧富益富)의 사회불평등구조와 상호신뢰가 무너지는 도미노 현상이 형성된다. 소비자가 소비력을 이용해 자꾸만 싼 가격으로 생산단가를 후려치고 생산자는 가격을 맞추기 위해 질 낮은 상품으로 소비자를 현혹하게 된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상품의 질을 정해 두면 생산자는 좋은 물건을 싼 가격에 공급하다 결국 수익을 맞추지 못한 채 도산하고 만다. 그러면 그 원망은 고스란히 소비자에게 돌아가게 되고 이로써 사회적 분노가 자라나 불신풍조가 가속화되는 것이다.

더 심각한 사회문제는 부자 혹은 재벌들이 자신들의 소비력을 믿고 생산까지 함으로서 기존의 생산자들을 일거에 몰아내는 재벌독점구조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그야말로 오늘날 대부분 대형마트의 현주소이기도 하고 재벌들의 맨얼굴이기도 하다.
나는 가끔씩 최부자댁 선인들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 지 궁금할 때가 있다. 갈수록 전통 재래시장은 기능이 쇠퇴하고 동네 상권은 전방위에 걸쳐 대기업이 독점하고 부자들은 수시로 이곳저곳에서 횡포를 부리며 갑질논란을 일삼고 있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양입위출은커녕 대책 없이 쓰고 닥치는 대로 벌며 자신을 살찌워준 일반대중을 우습게 보고 함부로 업신여기는 것이다. 최부자들이 보시면 기절초풍하실지 모른다.

최부자댁이 소작농들이나 백성들에게 늘 겸손했던 것은 아무리 청부 아니라 무슨 부자라도 혼자서는 결코 부자가 될 수 없다는 명확한 사실을 깊이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개간지를 일궈도 백성들과 함께 일구었고 소작도 백성들이 함께 했기 때문에 12대 400년 혹은 10대 300년 넘게 부자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누구는 백성들을 개돼지라 부르며 망발을 일삼았지만 백성은 결코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고작 수십 년 혹은 한두 대에 걸쳐 부를 이루고 유지했다고 세상이 다 제 손안에 있는 것처럼 군림하려 든다면 과거에는 화적당이 그들을 가만두지 않았고 지금은 소비자가 그 부를 순식간에 앗아갈 것이다. 함께 살아가는 즐거움을 다 같이 누리는 아름다운 세상이 되기 위해 최부자댁 지혜에 눈뜨고 귀 기울여야 한다.

X
URL을 길게 누르면 복사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