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새댁의 새로운 발견, 우물파던 날과 172년 된 상량문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3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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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식 카페로 바.

↑↑ 박근영 작가
설 지나고 두 주 후 경주에 다녀왔다. 마침 최부자댁 관련 콘텐츠 제작에 동영상이 필요해 교촌에 들렀다가 뜻밖에도 내가 다섯 살 때부터 살던 집이 멋진 한식 카페로 변한 것을 알았다. 이 집은 최부자댁에서 ‘구새댁’으로 부르던 집으로 아버지가 이 집을 사오신 것이 1969년, 지금으로부터 무려 55년 전이었다. 

당시 큰아버지와 아버지 두 분이 함께 이 집을 사셨는데 형님인 큰아버지는 안채를, 아버지는 사랑채를 쓰기로 하고 집을 샀다. 그런데 정작 사랑채는 집이 작고 그나마 초가집이어서 우리가 이사 오기 전에 초가를 벗겨내고 기와집으로 고쳐서 이사 왔다. 다행히 비록 초가집일망정 어지간한 기와집 못지않게 구조가 좋아 크기는 작아도 반듯한 기와집의 면모로 바꿀 수 있었다.

이 집에 살면서 내가 가진 큰 기억이 두 개 있다. 하나는 이사 온 이듬해 직선거리로 불과 50m 남짓 이웃한 최부자댁 사랑채가 불타던 모습이고 또 하나는 우물을 파던 기억이다. 두 기억이 모두 대단했던 것이 최부자댁 사랑채의 불은 커다란 무서움 때문이었고 우물 파던 기억은 그 어마어마한 공사로 인해 한 달 가까운 불편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최부자댁 사랑채에 대한 불 이야기는 이 연재를 시작하던 첫 회에 대략의 내용을 써두었으니 여기서는 생략한다. 그렇다면 우물을 파던 기억은 과연 어땠을까?



6살 아이에게 막걸리를 퍼먹였으니 탈이 날 밖에... 우물 파던 시기에 고통스런 추억이 생겼다.

우리 집에서 우물을 팠던 이유는 요석궁과 관련이 있다. 당시 요석궁은 지금과 달리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요정이었다. 1965년 6월,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 일본 관광객들이 우리나라로 물밀듯 밀려왔다. 경주는 특히 배를 타고 부산으로 들어온 일본 관광객들이 몰려들던 곳이다. 마땅한 음식점이 없던 그때, 요석궁은 낮에는 고급 한정식집으로 밤에는 여성 접대부를 동원한 요정으로 이름을 떨쳤다. 요석궁에는 수십 명의 여성 접대부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주로 교촌의 여러 집에 나뉘어 하숙하며 생활했다.

그런데 큰댁에서 그 여성 접대부들에게 하숙을 치면서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 이사했을 때는 담도 없었고 우물은 당연히 함께 썼다. 그런데 접대부들이 하숙하면서 딸 셋 가진 어머니가 걱정으로 안절부절했다. 그럴 만했던 것이 접대부들이 머리에 노란 물을 들이고 야한 옷을 입고 다니는 데다 여름철에는 숫제 우물에서 상반신을 벗고 머리를 감는 등 어머니 입장에서 자녀 교육상 엄청난 문제가 생긴 꼴이었다.

결국 이 일로 큰댁과 우리집 사이에는 담이 처졌고 담 가운데 1미터 정도 통로를 터서 물을 길으러 다니는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그때 물 길러 다닌 사람은 주로 어머니나 형, 누나들인데 담만 있었지 접대부들과 맞닥뜨리는 것이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나만 해도 우물에서 반쯤 벌거벗고 등물하는 접대부들과 수시로 만났다. 어머니는 결국 우리 집에도 우물을 파야 한다고 아버지를 설득해 그 어려운 우물 파기를 시작했다.

우물을 모르는 분들은 그냥 우물 둘레만큼 땅을 파면 되는 줄 알 뿐, 우물 파는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본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과정을 바로 코앞에서 지켜본 아이였다. 그것은 정말 엄청난 토목공사였다.

우물 파는 과정은 이렇다. 우선 지관이 와서 물이 날 만한 곳을 찾는다. 이 지관이 어떻게 물이 나오는 땅을 찾아내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분이 집 전체를 꼼꼼히 살펴본 후 화장실과 가장 멀리 떨어진 대문 근처로 자리를 잡았다. 그런 다음 좋은 날을 받아 인부들을 동원해 땅을 파기 시작했다. 땅은 우물의 반경보다 최소한 3~4배는 더 넓게 팠다. 우물 폭이 1미터 정도였는데 실제로 땅을 판 것은 4~5미터 넓이로 팠던 것이다. 물이 나오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다시 어른들 허리 이상 물이 깊어질 만큼 더 판다. 그래야 물이 저장되는 일종의 ‘통’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렇게 넓게 판 후에는 바닥에 지름 20cm 내외의 호박돌을 켜켜이 두껍게 깐다. 어느 정도 돌을 깔고 나면 그때부터 우물 넓이만 제외하고 둘레를 동그랗게 돌로 채운다. 이렇게 해야 우물이 무너지지 않고 돌이 지하수를 걸러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새로 판 우물은 예상보다 지하수원이 깊었다. 지관의 자신과 달리 5미터쯤 땅을 파도 물이 나오지 않자 이 험난한 일을 계속해야 하는지 갈등이 잠시 일었다. 그러나 기왕에 시작한 일을 물릴 수도 없다고 판단한 아버지는 계속 우물을 파기로 결정했다. 결국 9~10미터 깊이로 파들어가자 물이 터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땅을 파는 데만도 거의 보름 이상 걸렸다. 물이 터졌을 때 환호하던 장면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깊은 땅속에서 ‘물 터졌다!’ 소리를 지르던 인부 아저씨의 목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이렇게 우물을 파는 과정에서 웃지 못할 촌극이 일어났다. 우물을 거의 마무리할 무렵의 어느 날, 공사가 잘 진행되는 것이 기뻤던 아버지가 ‘막걸리 파티’를 열어주셨는데 그게 나에게 아주 고통스러운 추억을 안겨준 것이다.

공사에는 사촌 형들이 달려와 십시일반 거들었다. 말이 형이지 나보다 10~15살 많은 형들이었다. 이 형들이 장난삼아 나와 나보다 한 살 터울의 사촌 동생 하나를 붙들어 놓고 술 마시기 내기를 벌인 것이다. 고작 6살, 5살 된 아이들에게 ‘누가 잘 마시는지 보자’며 막걸리를 먹였으니 탈이 날 밖에...!

내 기억에 작은 사발에 예닐곱 잔은 거푸 마셨을 것이다. 아니, 마셨다고 느끼는 기억이 희미하게 남았을 뿐, 정신을 잃고 말았다. 겨우 깼을 때는 밤이 깊었고 머리가 깨지는 듯 아팠다. 눈뜬 나를 보고 어머니가 사촌 형들을 일컬어 노발대발하셨고 꿀물을 받아마신 나는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그로부터 두통과 메스꺼움에 시달리며 몸을 추스르기까지 이틀은 지났지 싶다. 그 어린 나이에 술에 푹 절여졌기 때문일까, 우리 삼 형제 중 내 술이 제일 센 것은 그때 영향일 것이다.

우물이 완성되고 무슨 제사 비슷한 것을 지내고 공사에 참여한 인부들과 동네 사람들을 불러서 우물 판 턱을 냈던 기억도 난다. 그때는 좋은 일이건 굳은 일이건 항상 술추렴이 있게 마련이었는데 우물 판 것이 그중 큰일이고 좋은 일이었지 싶다. 이 우물은 다행히 수량이 풍부해 가뭄에도 물 마른 날이 없어서 동네 사람들이 다른 우물에 물이 마르면 우리 집으로 달려올 정도로 십분 제 기능을 발휘했다.


↑↑ 함풍 계축년이 뚜렷하게 적힌 지붕의 상량문.


함풍 연호 발견, 172년 전 최부자댁에서 지은 집에서 부모님과 추억을 떠올렸다.

카페가 된 집에서 또 하나 기록할 만한 일이 있다. 카페를 둘러보는데 카페 주인이 집 대들보 적힌 상량문(上梁文)을 가리켰다. 거기에 ‘함풍삼년계축사월이일유입주상량(咸豐三年癸丑四月二日由立柱上樑)이라 쓰여있었다. 함풍은 청나라 9대 황제 문종(1831~1861)의 연호다. 조선이 중국에 사대하던 시절이었으니 청나라 연호를 쓴 것으로, 함풍원년은 1850년에 해당한다. 그 해인 계축년, 사월이일에 기둥의 상량문을 썼다는 기록인 것이다. 함풍 3년이면 조선의 철종 4년, 1852년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무려 172년 전에 이 집이 지어졌다는 것이다.

집에 와서 이 일을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그 상량문은 이사하고 지붕을 기와로 고칠 때도 그대로 있었다고 말씀하셨다. 상량문 쓰는 일이 한옥에서는 당연하던 때고 그때는 오래된 고택들이 많았을 때니 아버지께서 굳이 나에게까지 말씀해 주시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최부자댁을 연구하는 나로서는 이처럼 반가운 발견이 또 없었다.

결국 이틀 후 부모님을 모시고 다시 집을 찾았다. 연로하신 부모님이 한때 가족의 추억이 깃든 집이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해하셨기 때문이다.

최가람 사장의 배려로 바뀐 집에서 지붕을 다시 이던 일이며, 우물 파던 일, 동네에서 가장 큰 감나무에 얽힌 추억과 어머니 정성으로 꽃밭과 텃밭 만들던 이야기 등 귀한 옛일을 회고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전, 교촌의 모든 기와집들이 최부자댁으로 쓰이던 시절, 이 집에는 조선의 내로라 하는 사람들이 드나들었을 것이며 조선의 흥망성쇠와 일제강점기와 해방기 최부자댁의 많은 사연들이 스며 있을 것이다.

이 집은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살다가 지금의 교촌 초입, 미정당이 있는 터의 집으로 이사 가면서 세를 놓았다. 뒤에 이 집은 유명한 한국화가 박대성 화백이 사서 누님께 맡겨 교동된장집으로 사용되었다. 교동된장 이후 지금의 최가람 사장이 ’삼백년집‘이란 한식 카페로 바꾼 것이다. 정성 어린 비빔밥과 특화된 한식 디저트 등으로 새로운 교촌의 명소가 될 듯싶다. 무엇보다 행복이 가득 실린 집인 데다 경주최부자댁, 172년의 내력이 깃든 집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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