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대 진사 12대 만석…? 최부자는 얼마나 부자였을까?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3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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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0석 들어간는 최부자댁 곳간.

↑↑ 박근영 작가
부자와 부자 아닌 사람들의 공통점 세 가지가 있다. 첫째, 누구나 차지하고 자는 잠자리는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활개를 치고 자도 한 평도 안 되는 공간 안에서 잠을 잔다. 둘째, 세 끼 먹는다. 물론 없어서 두 끼 먹는 경우도 있고 일부러 두 끼를 먹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평균은 세 끼다. 셋째, 계절 따라 옷을 입는데 어떻든 입을 수 있는 옷의 가짓수에 별 차이가 없다.

최부자댁 윗대 어른들은 겸허하고 검소한 생활을 실천해 오신 분들이다. 부자라고 해서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고 기를 쓴 사람도 없고 사치와 허례가 심했던 것도 아니다. 최부자댁이 대대로 소작농들은 물론 자신들과 상관없는 백성들과 상생해온 이면에도 바로 이런 ‘별 차이 없음’이 주는 이해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9대 진사 아닌 9첩 진사, 12대 아닌 10대 부자. 정무공 최진립 장군은 정신적인 상징!!

여기서 잠깐, 최부자댁에 대한 오해 두 가지를 풀고 가겠다. 흔히 ‘9대 진사 12대 만석’이라는 세간의 이야기다.

먼저 9대 진사다. 이게 사실과 다소 다르다. 정무공께서는 무과를 하셨고 최동량 공, 최국선 공은 음서로 벼슬을 하였기에 진사와 거리가 멀다. 4대 최의기 공과 7대 최언경 공은 진사시나 생원시를 보지 않았고 12대 문파 선생은 과거제도가 없어진 시대에 사셨으니 과거를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었다. 다른 분들은 진사 혹은 생원시에 합격했으니 굳이 대수를 따지면 6대 진사(생원)라고 해야 옳다. 반면에 6대 부자인 최종률 공 이후 최부자댁에서 생원 혹은 진사 직첩을 받은 분들이 모두 아홉 분이다. 사람들이 이 숫자와 대수를 혼동하여, 9첩 진사라고 해야 할 것을 9대 진사로 말한 것이다. 그러나 벼슬하지 않거나 벼슬이 사라진 시대 최부자 8대 중 6대에 진사가 난 것만 해도 대단한 학풍이다.

12대 부자는 최부자댁의 정신적 지주로 일컬어지는 정무공 최진립 장군으로부터 최부자로 인식해서일 뿐 실제 부자로 산 분들은 집안을 이룬 최국선 공 때부터 마지막 부를 정리한 문파 최준 선생까지 10대다. 그러나 정무공의 철학이 후손들에게 미친 영향이 최부자 정신의 뿌리라고 생각한다면 12대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할 수 있다. 만석이라는 표현도 만석 가까웠다는 뜻일 뿐이다. 마지막 부자이신 문파 선생이 재산을 물려받았을 당시가 6000석이었고 뒤에 9600석으로 불리셨으니 이만하면 만석이라고 할 만할 것이다.

이런 재산에 대한 설명 역시 최염 선생님의 말씀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이전에 만석을 넘었는지 어떤지는 세세히 알 수 없지만 대체로 이 정도였을 것이라 짐작하셨다. 최염 선생님은 이런 부분에서 확고하셨다. 세상이 모두 9대 진사 12대 만석이라고 알고 있어도 ‘조상님들께서 필요 이상으로 미화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명료한 철학을 가지고 계셨다.

한편 조선시대는 물론이려니와 마지막에 스스로 모든 부를 독립운동과 대구대학설립에 희사하신 문파 선생에 이르도록 최부자댁보다 더 많은 부를 가진 집이 생각보다 많았다. 경주만 해도 문파 선생 당대에 최부자댁에 필적할 만한 부자가 몇 집이나 되었으니 전국적으로 치면 헤아릴 수 없이 많았을 것이다. 특히 평야가 발달한 호남, 경기 일대에는 같은 시대 5만석, 10만석 부자들도 적잖이 있었다. 그럼에도 최부자댁이 주목받는 이유는 첫째, 부의 형성과정이 남달랐기 때문이고 둘째, 부를 후대에 전하는 방법이 특별했고 셋째, 부를 독차지 하지 않고 함께 나누려는 의식이 있었고 넷째, 부를 훌륭하게 끝맺음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최부자댁을 공부하면서 든 의문 중에서 가장 원초적인 것이 있었다. 최부자댁이 과연 얼마만큼 부자였을까 하는 것이었다. 최부자댁이 만석지기 부자였다면 그것은 분명히 쌀농사를 짓는 논에 관한 표현일뿐 그 외 토지, 다시 말해 밭이나 산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 이외에도 최부자댁의 부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정말 궁금했다.


선산과 사는 집터, 9600석 논, 수십만 평 임야를 전부 독립운동과 대학설립에 희사하신 문파 선생님!

그중에서 우선 만석에 대한 것부터 따져 보면 이렇다. 물론 만석 자체도 엄청난 재산임에는 틀림없다. 여기서 잠깐 석이나 섬에 대한 개념을 알아보자.

일제 강점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가마니가 없었다. 석이나 섬의 개념을 썼다. 섬은 볏짚으로 엮은 전통적인 자루를 말한다. 한 섬은 한 석과 같은 의미로 쓰인다.

일제 강점기가 시작된 1900년대 초, 일본의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쌀을 수탈하기 좋도록 가마니가 처음으로 들어왔는데 섬보다는 작고 만들 때 볏짚도 덜 들어가 이후 일반적인 자루로 널리 보급되었다. 섬은 구조가 성기어 낱알이 굵은 쌀이나 보리 같은 곡식만 담는 것에 비해 가마니는 구조가 촘촘하고 야물어 조나 수수까지 담을 수 있어서 섬은 곧 도태되고 말았다.

한 석(혹은 섬)의 쌀은 144kg이고 한 가마니는 80kg이니 만석은 가마니로 치면 1만8000 가마니다. 예전에는 보통 도정하기 전인 나락으로 보관하였으니 만석은 1만8000 가마니의 나락인 것이다. 이를 도정하면 반 분량인 약 9000 가마니의 쌀이 된다고 할 수 있다. 9000 가마니면 요즘 시중에서 흔히 파는 20킬로 쌀 한 포를 기준으로 3만6000포다. 이것을 한 포당 2024년 올해 시점에서 5만 원쯤으로 환산하면 쌀값만으로도 연간 약 18억 원의 수입이 들어왔다는 말이다. 그러나 근대시대 쌀의 가치가 지금보다 3~4배가 넘었다고 가정하면 지금 기준으로 연간 5~60억 원 정도의 수입을 올리는 부자였을 것이다. 다른 산업이 발달하지 않은 농경중심의 산업구조에서 이 정도의 수입이면 대단한 부자였음은 틀림없다. 여기에 다른 작물의 수입까지 고려한다면 이보다 훨씬 많은 수입이 있었을 것이고 부란 것이 꾸준히 축적된다고 보았을 때 300년 넘게 부를 축적한 최부자댁은 단순히 농토에서 얻는 수입만으로 따질 수 없는 엄청난 부를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누대에 이르도록 도중에 엉뚱하게 가산을 탕진해 구렁텅이로 몰아간 가주가 단 한 사람도 없었으니 그 부가 온전히 쌓였을 것 아닌가?

그런 가정을 두고 최부자댁 집을 보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생긴다. 이런 전통적인 부자라면 당연히 고대광실, 궁궐 같은 집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 최부자댁을 보면 다소 의외다. 집이 그렇게 커 보이지도 않고 특별히 잘 꾸며 놓은 것 같지도 않아서이다. 최부자댁을 찾는 방문댁들의 표정을 보면 ‘그 유명한 경주최부자댁이 뭐 이래?’라는 의구심을 품는 듯한 모습이다.

실제로 최부자댁은 대문도 ‘솟을대문’이라고 해서 담장과 맞닿은 행랑채보다 높이 처마를 올린 다음 문을 달았지만 다른 명문가들에 비해 높이가 낮은 편이고 문의 크기도 그다지 크지 않다. 집도 전반적으로 낮게 보여 얼핏 보기에는 큰 부잣집이라는 인상이 들지 않을 만큼 평범하게 보인다. 그 이유는 이 앞의 ‘터도 깎고 기둥도 낮추고’ 편에서 말한 바 있다.

집의 칸수도 다른 유명한 대갓집 혹은 부잣집에 비해 적은 편이다. 흔히 가장 큰 여염집을 99칸이라고 부르고 최부자댁은 가장 넓었을 때도 90칸 정도였다는 최염 선생님의 말씀을 들었다.

최부자댁은 전체 2000여평 대지에 1만 평의 후원을 따로 두고 꾸며졌다. 대지에는 선조들의 위폐를 모신 가묘를 비롯하여 10개의 방으로 구성된 안채 30칸과 20개의 방으로 구성된 25칸짜리 사랑채, 곳간과 행랑채만 남아 있어서 다소 썰렁하게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된 데는 1970년에 일어난 화재로 큰 사랑채와 작은 사랑채 등 주요 건물들이 불타버린 영향이 크다. 다행히 2007년에 큰 사랑채가 복원되었고 2023년에 작은 사랑채가 다시 복원되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이 외에 3칸짜리 초가집, 외양간과 말 2마리가 들어가는 마구간, 디딜방아가 놓여 있는 방앗간이 연이어 있었다. 그러나 이 집은 최부자댁 종택일 뿐 실상은 교촌 대부분의 기와집들이 모두 최부자댁에 포함된다고 보면 집만으로 최부자댁 부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상상할 수 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산이다. 최부자댁 논과 임야는 물론 사는 집터와 선산까지 대구대학설립에 희사되었는데 대구대학 후신인 영남대학이 이중 선산을 비롯 불국사와 울산 근처의 임야 수십만 평을 문파 선생님의 뜻과 상관없이 대거 팔아버렸다. 그 땅만 해도 지금의 가치로 따지면 수천억 대로 알려졌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시 언급할 기회가 있겠지만 이런 규모로 보았을 때 최부자댁 재산가치를 지금으로 환산하면 최소한 수천억 원대는 되었을 것이다.

놀랍게도 문파 선생님은 이런 부를 독립운동에 전부 희사하셨고 독립이 되어 일본식산은행에 저당 잡힌 재산이 회수된 것을 다시 대구대학설립에 전부 희사하셨다. 더 놀라운 것은 선산과 사는 집의 땅까지 전부 희사하셨다는 것이다. 후손들의 입장에서는 ‘놀라 자빠질’ 만큼의 전격적인 희사였다. 실로 사람의 인식 범주를 뛰어넘으신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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