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윤의 절터 기행[2] 경주 창림사 터

신라 첫 왕이 살던 땅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3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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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산이 흘러내린 곳에 첫 왕궁 터로 알려진 창림사 터가 있다. 창림사 터를 지키는 삼층 석탑은 남산에 있는 석탑 가운데 가장 큰 탑으로 알려졌다.

금오산과 고위산을 통틀어 남산이라 한다. 태초에 남산은 배경처럼 남과 북으로 길게 누웠다. 남산이 흘러내린 곳엔 완만한 언덕과 너른 벌판이 펼쳐지고 벌판을 가로지르며 남천(南川)이 유유히 흐른다.

사람 살기에 마땅한 땅이었다. 남산을 사이에 두고 사람과 사람이 모이고, 고을과 고을이 생기니 사람들은 자연스레 왕을 추대했다.

왕들의 나라, 귀족들의 땅, 서라벌은 그렇게 역사와 역사를 잇대며 오늘까지 이어져 경주를 기록하기에 이르렀다.

남산에 얽힌 전설과 영험한 이야기는 신라사를 논할 때 적지 않게 등장한다.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528년(법흥왕 15) 이후 남산은 부처가 있는 신령스러운 산으로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왕들은 남산에서 신(神)을 만나 춤을 추고 대화했다. 백성들은 남산에 올라 소원을 빌고 영험함을 기다렸다.


삼국유사 기록, 궁궐 남산 서쪽 기슭은 창림사 터

35번 국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산기슭에 하얀 탑 하나가 서 있다. 제법 묵직한 느낌의 큰 탑은 신라왕조 궁궐터로 알려진 곳에 서 있는 창림사지 삼층석탑이다. 절은 사라졌지만, 석탑이 남아 사라진 과거의 땅임을 알려준다. ‘昌林(창림)’이라 적힌 기와가 발견되면서 사찰 이름이 확인되었다. 창림사가 언제 창건되었고 폐사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삼국유사』에는 창림사지를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첫 궁실로 기록하고 있다.

“궁궐은 남산 서쪽 기슭(지금의 창림사지)에 세우고 두 성스러운 아이를 받들어 길렀다” 월성에 궁궐이 지어지기 전의 궁터로 추정하는 대목이다.

창림사지는 통일신라 시대에서 고려 시대로 편년(編年)되는 연화문·보상화문(寶相華文)·비천문(飛天文)·귀목문(鬼目文) 와당(瓦當)과 명문 기와 등이 출토되어 7세기부터 13세기까지 사찰이 존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인근의 혁거세 왕의 탄생 설화가 서린 나정(蘿井)과 함께 신라 초기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추정하는 곳이기도 하다.



남산에서 가장 크다는 창림사 터 삼층석탑

창림사지 삼층석탑은 남산에 있는 석탑 중 가장 큰 탑으로 알려졌다. 1824년 도굴꾼에 의해 석탑이 무너졌다. 이때 사리공 속에서 탑의 건립 배경과 참여 인력, 발원 내용 등을 기록한 금동판 ‘무구정광다라니경’과 ‘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國王慶膺造無垢淨塔願記)’가 발견되었다.

경주 창림사에 왕명으로 석탑을 조성한 후 황금으로 도금한 동판에 그 내력을 기록하게 한 기록물이다. 문성왕(신라 제46대 왕)의 생전 이름은 ‘경응(慶膺)’이며 ‘무구정(無垢淨)’은 통일신라시대에 탑을 세우는데 근거가 되는 불교 경전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의미한다.

한참 세월이 흘러 조선 순조 24년(1824년) 조선시대 서예가, 금석학자, 정치가, 실학자 등 많은 활약을 펼쳤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당시 창림사 터를 찾았다가 무구정탑원기에 새겨진 발원문 무구정탑의 조성에 관한 기록을 베껴 두었다. 이 발원문에 신라 문성왕 17년인 855년에 절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이 기록은 후대에 이르러 이견이 일기도 했다.

고고학자들은 ‘현존하는 창림사지 삼층석탑은 탑의 양식으로 볼 때 문성왕 대보다 100여년 앞선 7세기에 세워진 것이라서 탑지와 연대가 어긋나 보인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탑은 2중 기단을 만든 후 3개 층의 탑신부를 얹은 전형적인 신라 삼층석탑 양식을 띈다. 아래층 기단은 돌 하나에 면석(面石)과 그것을 받치는 저석(底石)을 나누어 다듬는 한편 각 면석에는 일종의 기둥인 탱주 3개를 표현했다.

불교 미술사학계에서는 탱주 개수에 따라 석탑의 변천을 확인할 수 있는 지표로 삼기도 한다.

이는 석탑을 만든 시기를 통일신라 초기인 7세기 말로 보는 유력한 근거가 된다. 이와 함께 10개의 석재로 된 하층 기단부 양식은 8개 석재로 만든 황복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7호)과 경주 장항리사지 서오층석탑(국보 제236호)보다 훨씬 옛날 석탑으로 보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창림사지 석탑의 가장 도드라지는 특징은 상층 기단 면에 돋을새김한 팔부신중이다. 팔부신중(八部神衆)’은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호법신으로 천(天)·용(龍)·야차(夜叉)·건달바(乾闥婆)·아수라(阿修羅)·가루라(迦樓羅)·긴나라(緊那羅)·마후라가(摩睺羅迦), 여덟 신장(神將)을 일컫는다.

현재 남면(南面) 1구, 서면(西面) 2구, 북면(北面) 1구, 아수라·용·천·건달바만 남았고, 나머지 면석은 파괴된 채 방치되다가 복원하면서 새로운 면석으로 교체되어 팔부신중 없이 비워둔 상태다.

특히 눈에 띄는 신중은 아수라다. 육중한 탑 면에 조각된 아수라는 얼굴이 셋이고 팔이 여섯(삼면육비 三面六臂)인 형상으로 매우 선명하고 화려하게 조각되어 사실적인 느낌마저 불러일으킨다. 아수라는 힘이 세고 위력이 대단하여 싸움을 일삼는 나쁜 귀신의 우두머리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우리는 흔히 파괴되고 어지러운 상태, 처참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을 ‘아수라장(阿修羅場)’이라고 말한다. 이 말의 어원이 바로 육도(六道) 팔부중(八部衆)인 아수라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창림사지 삼층석탑은 규모와 완성도 면에서 매우 높은 가치로 평가된다. 우리나라 석탑 가운데 팔부신중이 조각된 탑은 안동 법흥사지 전탑, 구례 화엄사 사사자탑, 경주 인용사지탑, 양양 진전사지탑 등이며, 인왕상이 조각된 경주 장항리사지탑, 십이지신과 사천왕상이 조각된 경주 원원사지탑 등이다.

창림사지 팔부신중 조각은 다른 탑의 조각 수법과 비교해 볼 때도 기랑 면에서 결코 부족하지 않다.


↑↑ 아수라는 얼굴이 셋이고 팔이 여섯(삼면육비三面六臂)인 형상으로 매우 선명하고 화려하게 조각되어 사실적인 느낌마저 불러일으킨다.


창림사 터 쌍귀부, 사라진 비신(碑身)의 비문(碑文)은 신라 명필 김생이 썼다

삼층석탑 아래 흙바닥에 엎어져 있던 쌍귀부는 어디로 갔을까. 필자가 처음 창림사 터를 찾았을 땐 석탑 아래 풀밭에 쌍귀부가 있었다. 그러나 올 봄 다시 찾았을 때 쌍귀부는 오간데 없었다. 어디로 옮겼다는 안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쌍귀부는, 부대석은 모죽임기법으로 사각 모퉁이를 부드럽게 돌려 깎았고, 대석 위에 쌍 거북이가 나란히 엎드려 큰 비석을 등에 지고 있는 형상이었다. 머리는 둘 다 떨어져 없고, 다만 한 마리의 머리만 경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다고 했다. 귀부 위 비신(碑身)도 사라졌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비문(碑文)은 신라 때 김생(金生)이라는 인물이 창림사비(昌林寺碑)를 썼고 이를 원나라 학사 조맹부(趙趙孟頫, 1254~1322)가 창림사비 비문을 인용하면서 ‘이것은 당대 신라 승려 김생이 쓴 그 나라의 창림사비다’라면서 ‘자획이 매우 법도가 있으니, 비록 당나라의 명각(各刻)이라도 그보다 뛰어나지는 못할 것이다’고 찬양했다. 김생은 711년(신라 성덕왕 10년)에 태어나 80세가 넘도록 살았으며 죽을 때까지 붓과 벼루를 놓지 않았다고 전한다.



첫 왕의 탄생 설화가 서린 나정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왕궁 터

창림사지가 신라의 첫 왕이 생겨나고 첫 왕궁터로 자리 잡은 곳이었다는 것을 떠올려 본다면 이 땅의 쓸모를 가늠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 설화가 깃든 나정이 있는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서로 다른 생각의 사람을 모아 하나로 모으며 무리를 만들고 그 무리를 모아 나라를 열고 이끌며, 불완전한 사로국을 이끌어가야 했던 13살 어린 왕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이곳에서 느껴볼 만한 특별한 감흥은 바로 ‘해와 달이 밝게 빛났다’는 것이다.

경주의 서쪽이 훤히 내다보이는 특별한 풍경을 바라보며 한 시대를 시작했던 ‘첫’의 모습을 떠올려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박시윤 답사기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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