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해버린 경주최부자댁과 안희제 선생과의 인연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3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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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영 작가
백산이 거액의 독립자금이 필요해서 급히 최준을 찾아가 지원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최준은 그런 거금을 구할 수 없다고 난색을 표했다. 백산은 다른 곳으로 돈을 구하러 떠났다. 그리고 며칠 후 최준의 집에 강도가 들었다.

“자, 이 수표에 2만원 금액을 적어 넣어라. 그러지 않으면 네 목숨을 거두겠다”

복면한 강도가 칼을 들고 위협했다. 최준은 어쩔 수 없이 강도가 내민 백지 수표에 2만원을 적은 뒤 사인했다. 그러자 강도가 복면을 벗어던졌다. 놀랍게도 복면 안에서 안희제의 얼굴이 드러났다. 이튿날 최준은 2만원을 결재했다”



문파 선생을 위협해 독립운동자금을 받아냈다는 안희제 선생의 이야기는 와전, 사실은 박상진 선생과의 이야기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이야기를 아는 사람이 더러 있을 것이다.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 1885~1943) 선생이 문파 최준(1884~1970) 선생에게 독립자금을 대라고 했다가 거절당하자 복면강도로 가장해 최준 선생을 떠본 끝에 자금을 얻어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안희제 선생의 전기문에도 나와 있어서 많은 이들이 사실인 양 알고 있다.

그러나 우습게도 이 이야기는 잘못 와전된 이야기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문파 선생과 처남인 고헌 박상진(1884~1921) 의사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최염 선생님의 회고를 들어보자

“그 이야기를 안희제 선생이나 할아버지께서 들으셨다면 무덤 속에서라도 웃으실 겁니다. 두 분은 독립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놓은 분들이셨고 그 이전에 서로의 진면목을 충분히 알고 의기투합하신 분들이죠. 그러니 안희제 선생이 필요하다는 비용이었다면 그것은 할아버지에게도 필요한 돈이었고 할아버지가 돈이 없는 상황이었다면 백산 역시 그런 사실쯤 빤히 알고 있었을 것이므로 이런 사건 자체가 성립될 리 없습니다. 이것은 백산의 의협심을 좀 더 드러내기 위해 누군가 할아버지와 박상진 의사 사이의 이야기를 와전시킨 것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지난주 말한 경주최부자댁의 어마어마한 부가 일시에 무너진 사실을 이야기 하고자 함이다. 문파 선생이 백산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의암 손병희(1861~1922) 선생과 교유하며 천도교를 지원하실 때다. 그런 한편 문파 선생 박상진 의사가 조직한 대한광복회 재정부장과 조선국권회복단 경주대표 역을 맡아 독립군의 자금줄 역할을 하실 때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파 선생의 입장에서 지속적이고 과감하게 독립자금을 대기에는 너무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농경 시대, 막대한 규모의 독립자금을 만들려면 쌀이나 땅을 파는 것이 가장 쉬운데 특별한 큰 일도 없이 한꺼번에 대량의 쌀이나 넓은 토지를 내놓으면 누가 봐도 의심스러울 것이다. 문파 선생이 이런 고심을 할 때 백산 선생이 찾아왔다.

백산은 왕산 허위(1855~1908) 선생과 허위 선생의 제자인 박상진 의사 등과 함께 만주에서 활동하며 ‘기미육영회’라는 학교를 세우고 ‘중외신문’이라는 신문사도 운영하는 등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해온 분이다. 1930년에는 옛 발해 땅에 발해농장이라는 협동농장을 만들어 만주지역에 사는 동포들의 삶의 터전을 마련하기도 했다. 1931년에는 대종교에 입교하여 국민들에게 민족정신을 심어주기 위해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나 임오교변이라는 일제의 대종교 탄압사건에 연루되어 헤이룽장성에 있는 감옥에 투옥된다. 여러 차례에 걸쳐 혹독한 고문을 받은 선생은 거의 죽을 지경이 되어 석방되었고 석방된 지 며칠 만에 고문 후유증을 이기지 못해 돌아가셨다.

백산은 초기 백산상회를 운영하며 독립운동자금을 해외 독립단체로 보냈고 3.1운동 후 상해임시정부가 생긴 1919년, 문파 선생과 함께 백산무역주식회사를 운영하며 상해임시정부로 독립운동자금을 밀반출한 공로가 크다.

원래 백산은 부산에서 몇백 석쯤 하는 부농의 자재로 부산에 ‘백산상회’라는 무역회사를 차려 이곳을 통해 상해로 독립운동자금을 보냈다. 그러나 큰 부자가 아니라 언제나 자금에 시달렸다. 그런 그가 박상진 의사를 통해 문파 선생의 말을 듣고 국내에 들어오는 즉시 경주로 문파 선생을 찾아온 것이다. 여기서 다시 최염 선생님의 회고!

“백산 선생은 부산 구포에서 큰 부자로 이름난 윤상은이란 사람과 함께 찾아왔습니다. 당시 경주에 자동차라고는 택시가 딱 한 대 있었는데 거의 할아버지께서 전용으로 타고 다니던 것이었어요. 그렇게 자동차가 귀하던 시절, 백산 선생 일행이 할아버지를 찾아오던 날 이런 승용차가 무려 다섯 대나 최부자댁 대문 앞으로 몰려와서 동네 사람들이 그걸 구경하러 나와 법석을 떨기도 했답니다. 그 차에는 후일 백산무역주식회사의 주주가 될 부산 일대와 경상남도 지역의 독립지사들이 타고 있었지요”

백산은 이때부터 무려 한 달 가까이 최부자댁에 머물며 문파 선생과 함께 효과적인 독립자금 지원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자신이 꾸려오던 백산상회를 주식회사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백산이 지금까지 해오던 것처럼 겉으로는 무역회사로 가장해 은행에 신뢰를 쌓고 이후 사업 규모가 커지면 무역회사에서 발생하는 현지 물품 대금을 실제보다 더 보내거나 해외에서 물건값을 떼이거나 장사를 잘 못해 밑지게 되었다는 등의 핑계로 돈을 현지에 묶어두고 그 돈을 독립운동하는 단체에 지원하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1919년 5월 1일 ‘백산무역주식회사’가 영업을 개시했다. 3·1운동으로 전국에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두 달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백산무역을 처음 열었을 당시 회사 규모는 우리나라에서 몇 번째에 들 만큼 큰 규모였다고 한다. 자본금 100만 원이라는 거금은 화폐가치도 높았으려니와 기업들이란 것이 모두 고만고만할 때여서 지금 기준에서는 천문학적일 만큼 큰돈이었다.



1919년 설립한 백산무역주식회사는 1928년 완전히 문 닫는다. 개인입보를 선 문파선생의 집안 전재산이 차압되었다.

부산에 본사를 두고 대구와 원주에 지사를 둔 이 회사는 우리나라 특산품, 명주, 면포, 강포(마직물), 인삼 등을 해외로 수출하는 것을 가장하고 세워졌다. 그리고 초기에는 실제로 부지런히 사업을 전개하여 일본 경찰과 은행의 눈을 속였다. 사업을 제대로 해야 은행 대출도 순조롭게 받을 수 있었고 그래야 일제의 의심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회사를 최대한 키워놓고 일시에 그 자금을 해외독립운동단체에 넘긴다는 야심찬 계획이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수익을 남기기보다 해외 독립지사들에게 자금을 보내는데 목적이 있었던 이 회사는 사업이 궤도에 올라 일본의 감시망이 느슨해지면서 본격적으로 계획된 수순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거래 물품을 키운 후 물품 대금을 떼이거나 수출품이 비적들에게 약탈당했다거나 거래에서 손해를 봤다는 등의 이유로 자본금을 깎아 먹기 시작했다.

이렇게 자본금이 잠식되자 식산은행에서 대출받고 다시 그 대출마저 탕진하며 급기야 1925년 문파 선생은 회사경영 부실로 피소 당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해서 자본금 100만원은 물론 은행에서 대출받은 돈까지 전부 독립운동단체에 넘어갔고 경영부실로 인해 문파 선생과 백산은 회사에서 물러나게 된다. 문파 선생은 이 일로 회사 경영에서 완전히 물러났지만 백산은 다시 회사에 복귀하여 해외로 출장을 다녔다.

그러다가 1928년에 백산무역 주식회사는 완전히 부도가 났고 이로써 조선식산은행 등에 저당 잡힌 최부자댁 전 재산이 일제히 압류된다. 주식회사의 부도에 개인재산이 압류당한 게 이해되지 않겠지만 그렇게 된 이유는 식산은행이 백산무역에 대출해줄 당시 기체결의서에 문파 선생이 ‘개인입보’를 섰기 때문이다.

당시 돈을 대출받은 곳이 주거래 은행이 조선식산은행이었고 부거래 은행이 경남합동은행이었다. 조선식산은행은 대출금을 회수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1925년부터 새로운 대출건이 생길 때마다 문파 선생에게 개인보증을 하라고 압박했던 것이다. 어차피 독립자금을 대는 데 목적이 있었던 문파 선생은 기꺼이 개인보증을 수락했고 이로써 식산은행에서 대출된 자금 역시 고스란히 독립운동 단체로 넘어갈 수 있었다. 절묘한 ‘재산반출’ 방법이었다.

비록 재산의 해외밀반출에는 성공했지만 이로 인해 경주최부자 문파 선생은 ‘드디어’ 전 재산을 압류당함으로써 무일푼으로 전락하여 고난의 길로 들어섰다. 당시 문파 선생이 개인보증으로 갚아야 할 돈의 총액은 130만엔, 쌀로 무려 3만석, 지금의 가치로 약 100억원 가까운 거금이다.

당시의 쌀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귀하고 비쌌던 데다 화폐가치 역시 지금보다 훨씬 높을 때다. 추측하건데 그때 당시 문파 선생이 진 부채는 지금의 수천억 원에 비교될 만큼 큰돈이었을 것이다.

결국 최부자댁 소유의 부동산과 돈 될 만한 물건에는 일제히 압류딱지가 붙여졌다. 실제로 생활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도구, 이를테면 숟가락 젓가락과 밥그릇 따위를 제외하고 연명에 지장이 없는 장롱이나 가구 같은 것에는 죄다 딱지가 붙었다. 그 유명한 경주최부자댁의 부가 이렇게 끝나는가 싶었다. 나중에 최염 선생께 할머니가 하신 말씀 한 토막.

“얼매나 그놈의 압류딱지가 붙어 있었던지 보름 동안 내가 버선까지 못 갈아 신었디라. 장롱 서랍에 압류딱지가 붙어 있으이까네 그거를 열 수가 없었던 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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