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인식 시인의 경주인문학산책] 봄날, 시로 찾아가는 황용골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3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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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용동 마을 입구.

황용동은 경주에서도 가장 깊은 산골 중의 산골이다. 지금이야 감포로 넘어가는 길이 훤히 뚫려있지만, 과거에는 걸음하기 쉬운 길이 아니었다.

이 깊은 산중으로 찾아들어 봄을 노래한 사람들이 있으니 놀랍게도 그들은 한국문학을 주름잡으며 한 시대를 풍미한 사람들이다.

금오신화의 저자이자 천재 시인 매월당 김시습과 시와 소설로 한국문학을 대표한 경주 출신 두 거장 동리와 목월이 주인공이다.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찾아간 곳이 봄날의 황용골이다. 봄이 가장 늦게 올 것 같은 깊은 산골 마을로 가서 봄날을 노래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들이 남긴 시를 읽으면 그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봄을 맞이하는 설레는 마음으로 시와 함께 황용골로 떠나보는 일도 꽃구경만큼이나 즐거운 일이 아닐까?

↑↑ 야생화의 보고 시부거리 마을


매월당의 시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천하를 방랑하다 경주 남산 용장사에 머물며 금오신화를 지었으며, 그의 문집 「유금오록」에는 경주에 관한 많은 시편 들을 남겼다.

떠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매월당 또한 이곳 황용을 빼놓지 않았다.

지금처럼 감포가는 길이 놓인 것도 아닌 그 당시는 아마도 알천 물길을 따라 올라왔거나 아니면 산 고개를 몇 개 넘어 이곳으로 왔을 것이다. 매월당은 어느 절 스님을 만나러 왔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매월당 김시습의 ‘황룡동’이란 시이다.

발길이 황룡동에 들어와 보니
안개와 노을 모두 듣던 대로라
길은 깊어 보이느니 짐승뿐이요
땅 외져 사람들은 만날 수 없네
냇가 풀은 안개 속에 파랗게 돋고
강가 매화마저 저 혼자 봄을 웃누나
서로 끌어 스님 집 찾아가 보니
선승 경내 먼지가 하나 없도다.
-김시습의 시 「황룡동(黃龍洞)」 전문


시 속 ‘강가 매화 저 혼자 봄을 웃누나’하는 구절이 가슴에 쏙 들어온다. 먼지 하나 없이 청정한 절은 어디였을까? 황룡사였을까? 표충사였을까 아니면 또 다른 절일까?
김시습이 찾아왔던 절이 명확히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황룡동에는 절골이라는 지명이 있을 만큼 수많은 절이 산재해 있던 곳이다.

시내에 있던 신라 대표 사찰 황룡사와 이름이 같은 황룡사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이미 일본인이 발굴조사를 할 만큼 유명세를 탄 절터였다. 수년 전 발굴조사를 하였는데 적지 않은 유물들이 나왔던 것으로 보아 규모가 큰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까지도 남아있는 크고 작은 절이 20여 개나 있다. 조선 땅을 유랑하던 김시습이 경주 땅 어디를 가보지 않았을까? 경주 남산 용장사에 거처를 정하고 머물며 김시습은 경주 여기저기를 유람했다.

황용동뿐만 아니라 외동 신계에서 양북 범곡 사이 동산령을 넘으며 「동산령에 올라 동해바다 바라보다」라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아마도 불국사에서 석굴암을 경유해서 기림사로 향하던 길이었거나, 기림사에 갔다가 돌아가는 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황용동을 노래한 시 속에서 얼핏 세상을 등진 매월당의 모습을 엿볼 수가 있다.


↑↑ 황용-절골마을


동리의 유고시 「황룡골의 노래」

김동리(1913 ~1995)는 소설가의 명성에 가려 시인으로서 존재감은 미미하지만, 소설가 이전에 시로 먼저 등단한 작가이다. 193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백로>가 당선되었고 이후 「화랑의 후예」 등 소설로 등단하였다. 문학사에 남을 수많은 소설을 남겼으며 시집으로는 『바위』 와 『패랭이꽃』 두 권을 남겼다. 사후 그가 남긴 미발표 유고시 30편 가운데 「황룡골의 노래」가 있다.

뒷내 자갈벌 패랭이 꽃은
가뭄이 들수록 붉어나고
황룡골 산중 복분자는
철이 겨워 검어난다

황룡골 산중 우는 새여
사월 오월 해도 길다

엉개와 두릅 산나물은
벼랑이 가팔라 못 따내고
황룡골 산중 큰 애기는
골짝이 깊어 세어난다

황룡골 산중 우는 새여
물이나 먹고 쉬어 울지
-김동리의 「황룡골의 노래」 전문


뒷내는 북천을 말한다. 동리의 집이 있던 시내 성건동 쪽에서는 북천을 뒷거랑으로 불렀다. 패랭이꽃이 많던 뒷내 물줄기를 따라 올라가면 마지막으로 닿는 곳이자, 북천의 첫 물줄기가 시작되는 곳이 황룡골이다. 어느 때 왜 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황룡의 봄날은 동리에게 시 한 편을 선사해 주었다.

패랭이꽃과 복분자의 붉은 대비가 선명하다. 가팔라서 못 딴 엉개와 두릅이 눈에 밟히면서 봄나물 향에 입안 가득 침이 괸다. 산중에 우는 새와 산중 큰 애기의 대비가 외로운 듯 닮아있다.


↑↑ 황용-모차골


목월의 시와 산문 속의 「구황룡」

목월의 시와 수필에서 황룡골은 오누이처럼 등장하니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목월의 시에 나오는 「구황룡九黃龍」을 두고 많은 시간을 고민했기 때문이다. 과연 구황룡이 어디일까? 실제 지명일까 아니면 상징적 장소일까? 황룡이 아니고 왜 구황룡이라고 했을까? 1년여 년 만에 이런 궁금점은 말끔히 해소되었다. 도서관에서 이 책 저 책을 찾아보고, 온라인 중고 책을 구입하여 확인한 결과 구황룡은 바로 황용동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자전적 에세이』의 산문 「부운 3일」은 초등학교 2학년 때 구룡포에서 전학 온 친구가 말한 그 바다, 상상 속의 그 바다, 최초의 바다를 찾아가는 여정의 글이다. 여행은 구황룡 고개 넘어 양포를 거쳐 구룡포 가는 과정에 구황룡이 등장한다. 정민 교수가 엮은 에세이집 『달과 고무신』의 「구황룡의 아지랑이와 꽃 고사리」를 읽어보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시작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구황룡九黃龍은 경주에서 50리 남짓, 동해로 나가는 길가에 있는 깊은 산골 구황룡 재를 넘으면 동해다. 이른 여름이면 운무가 갤 날이 없고 운무 속에 산딸기가 제물에 익어 이슬을 머금은 채 지고 마는 높은 준령이요, 그 준령 아래 골짜기다. 나는 젊었을 무렵 직장 관계로 그 골짜기에 출장을 나가곤 했다. 산골로, 산골로 기어드는 외갈래 소로길을 따라 들어가면 닥나무를 벗겨 백지를 뜨는 것으로 유일한 생업을 삼는 가난한 마을이 골짝마다 뜸뜸이 몇 집씩 흩어져 있었다. 이른 봄날 그 소로길에는 온통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벌건 진달래꽃 사태를 이룬 골짝과 길에 일렁거려 산이 흔들릴 듯했다. 그 아지랑이의 황홀감 한 오리 한 오리에 꿈이 어려 있는 것 같았다. 아지랑이는 한 오리마다 일렁거리며 피어오르는 동안에 햇빛을 받아 빛나기도 하고 때때로 빛을 거두기도 해서 어쩌면 금실 같기도 하고 혹은 은실 같기도 했다.


↑↑ 시부거리 야생화


 수필 「구황룡의 아지랑이와 꽃고사리」 중 일부

박목월이 근무했던 동부금융조합의 관할구역 중 하나가 이곳 황룡동이다. 위 산문의 내용처럼 업무차 출장 갔을 때의 황룡동의 모습을 시 한 편으로 다시 노래하고 있다. 다음은 시집 『산도화』에 수록된 「구황룡」 이다


날가지에 오붓한
진달래꽃을

구황룡 산길에
금실 아지랭이

- 풀섶 아래 꿈꾸는 옹달샘
- 화류장롱 안쪽에 호장저고리
- 새색시 속눈썹에 어리는 이슬

날가지에 오붓한
꿈이 피면

구황룡 산길에
은실 아지랑이
-박목월의 시 박목월의 시「구황룡 전문」


목월의 시 전집 속에는 「구황룡」 이라는 시가 두 편이나 있다. 같은 제목에 내용은 다르지만 황룡이라는 장소성은 같다. 두 편의 시와 산문을 남긴 목월에게 황룡은 평범하지 않은 곳으로 여겨진다.


대가들을 사로잡은 황룡골

봄날 황룡 꼴짝으로 가보면 그곳에 매월당과 동리와 목월이 있을지도 모른다. 냇가 저 혼자 웃고 있는 매화나무는 세상을 비웃던 김시습을 닮았고, 우는 새에게 물이나 먹고 울어라 말한 동리는 이곳까지 오느라 목이 말랐을 것이다. 목월이 황룡 산길에서 보았던 금실, 은실 아지랭이 그 너머에는 그리운 사람이 서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명의 유래를 보아 황룡이라는 마을은 가을이 더 어울리는 것 같지만 봄날의 황룡골은 평범하지 않다. 누구나 갈 수 있는 황룡골이지만, 누구나 시를 짓지는 않는다. 대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황룡골은 우리들이 모르는 특별함이 깃들어져 있는 듯하다. 가장 늦게 오는 봄이 가장 먼저 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봄날 황룡골에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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