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사산에서 신라인의 흔적을 더듬다(5)

선덕여왕의 예지로 적을 물리친 여근곡(女根谷)

하성찬 시민전문 기자 / 2024년 03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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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천 신평리 마을회관에서 바라본 여근곡(좌), 여근곡 옥문지(우).

↑↑ 하성찬 시민전문기자
“하느님이 최초의 여자를 남자의 머리로 만들지 않은 것은 여자가 남자를 지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남자의 다리로 만들지 않은 것은 남자의 노예가 되어서도 안 되기 때문이었다.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신 것은 여자를 항상 남자의 마음 가까이에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유대인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 온 탈무드에 나오는 이 이야기도 얼핏 맞는 말인 듯하나 우리 선덕여왕의 이야기를 듣지 못해서 이런 오류를 범했을 것이다.

이곳 주사산의 마지막 이야기를 찾아 여근곡을 향했다. 네비게이션을 신평2리 마을회관으로 설정한 후 집을 나섰다. 요즈음은 네비게이션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늘 다니던 길도 잘못 찾을 수가 있다. 마을회관 바로 앞에 여근곡 전망대가 있다. 건물 옥상이 전망대이다. 전망대에 오르면 여근곡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전신주와 전깃줄이 시야를 어지럽힌다.

전망대 뒤쪽으로 나오면 수십 대를 주차할 수 있는 널찍한 주차장이다. 여근곡을 찾거나 주사산 정상으로 오르려면 이곳에 주차해야 한다. 여근곡 들머리인 유학사까지는 1.2km 떨어져 있다. 유학사 전방 100m 남짓한 갈림길에서 오른쪽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면 주사산 정상에 이른다. 유학사는 대웅전과 산신각, 용왕전 3동의 전각으로 단출하다. 잘 정비되어 있는 등산로를 따라 250여m를 오르면 여근곡 옥문지에 이르게 된다. 샘 주위를 돌로 에워싸여 있고 안으로 흐르는 샘물이 없지만 축축하게 젖어 있다.

중국에서는 유일한 여황제가 당나라 때의 측천무후였다. 일본에서는 비미호라는 여왕이 있었다고는 하나 전설로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옛 신라에는 선덕, 진덕, 진성 등 여왕이 세 분이나 된다. 이 세 분 여왕 중 가장 현명하고 통치를 잘한 분이 선덕여왕이다.

『삼국유사』「기이」편에 의하면 636년(선덕여왕 5) 여름 영묘사 앞 옥문지에 난데없이 수많은 두꺼비들이 몰려들어 요란스럽게 울어대는 일이 있었다.

모두 괴이하게 여기는 가운데 여왕은 두꺼비의 눈이 심상치 않음을 보고 병란이 다가왔음을 직감했다. 여왕은 알천과 필탄 두 장군으로 하여금 2000여명의 군사를 주어 출전시킨다. 이들이 서라벌 서쪽에 있는 여근곡에 이르니 그곳에는 백제의 장군 우소가 거느리는 500여명의 침입군이 잠복하고 있어 이를 쉽게 섬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선덕여왕은 그곳에 적군이 잠복했던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삼국유사』가 전하는 그 예측의 근거가 재미있다.

“성난 남근이 여근 속으로 들어가면 반드시 죽는 법이다”

말하자면 옥문을 여근으로 해석하여 여근은 음(陰)이므로 남자 군사들이 이곳 여근 속으로 들어가면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음양설을 인용하여 해석한 것이다.

여근곡은 부산 즉 주사산의 동쪽 아래에 있는 골짜기로 지형이 마치 여근과 같이 생겼다고 해서 여근곡이라고 한다. 이 지역에서는 여공골, 소산골(小山谷), 소문골(小門谷)이라고도 한다.

여근곡 건너편에는 남자의 상징인 바위가 우뚝 솟아 있었다는데 지나는 소금 장수가 휘두른 지게 작대기에 잘린 채 야트막한 구릉에 누워 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또 이 지방에서 전해오는 이야기로 이 골짜기 옥문에 샘이 있었는데 남정네가 이 샘을 건드리면 반드시 동네 처녀 한 사람이 바람이 나서 마을을 떠났다고 한다. 이후 이 샘을 막아서 현재에는 그 흔적은 볼 수 있으나 샘물은 나오지 않고 있다.

과거를 보러 가는 사람들은 재수가 없다하여 이 길을 피해 다녔다고 하고, 경주에 부임하는 관리들도 이 앞을 지나는 것을 꺼려하여 영천에서 안강으로 돌아가곤 했는데 퇴임할 때는 그 형상이나 한 번 보고 가자하여 구경을 하고 가기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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