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과 문파의 만남, 그리고 백범의 증손자 김용만 후보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4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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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조할아버지 백범 김구 선생의 대형 걸게 사진 앞에 선 김용만 후보.

↑↑ 박근영 작가
“할아버지의 독립 운동을 말할 때 대부분 사람들은 할아버지가 백산무역만 운영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네. 그러나 할아버지는 실제로 몇 개의 기업을 더 운영하셨는데 이게 모두 중간에 문을 닫거나 망했네. 그걸 아는 사람들이 할아버지에 대해 ‘하는 일마다 망해 먹은 사람’이라 말하곤 했지. 그러나 사실은 할아버지가 사업수완이 없어서가 아니고 무슨 일을 계획하시면 반드시 이 일을 어떻게 독립운동과 연계시킬 것인가를 먼저 고민하셨기 때문에 사업적으로 이익을 남기거나 일 자체를 성공시킬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기에 일어난 결과였네”

최염 선생님의 이 말씀을 들으면서 모골이 송연해졌다. 동시에 평생 부자로 살면서 아무런 어려움 없이 호의호식하고 산 사람일수록 압류딱지의 위력은 더 처절했을 것이라 여겨졌다. 갑자기 온 집안을 움켜쥔 압류딱지는 최부자댁 모든 사람들의 숨통을 쥐어 잡은 거대한 마수(魔手)처럼 여겨지지 않았을까. 그러니 최부자댁 안방마님이 버선조차 갈아 신지 못한 것쯤은 실상은 조그마한 한 예에 불과할 뿐 그보다 훨씬 견디기 어려운 곡절들이 있었을 것은 뻔한 노릇이다.

“내가 어린 시절, 가을 추수기가 되면 우리 집과 이어진 남천변으로 산더미 같은 나락 섬을 실어 오던 긴 소달구지 행렬이 늘어섰어. 그때 나는 그게 모두 우리 나락이라 지레짐작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사실 조선식산은행이 압류 이후 전부 관리하고 있던 나락이었어요”



“백산, 내가 죽어 저승에 가면 백산의 얼굴을 어떻게 본단 말이고!!”

↑↑ 문파 최준 선생님.
한편, 문파 최준 선생이 국내에서 백산무역회사의 실질적인 운영을 했다면 백산 안희제 선생은 국경을 넘나들며 독립자금을 해외로 전달하는 운반책의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당시의 해외여행, 더군다나 만주와 중국을 가로지른다는 것은 보통 위험한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일본 경찰과 헌병들의 감시가 삼엄했고 국경을 넘어도 만주 지역은 수시로 비적과 마적들이 출몰하거나 여행자를 노린 도둑과 강도 같은 악한들이 넘치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교통 역시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열악한 시대였다. 그런 삭막한 시대에 독립운동 자금을 운반한다는 것은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지 않고서는 실행할 수 없는 비장한 일이었다.

안희제 선생은 일본경찰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일본 여자들과 어울리며 장사를 했다. 일본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는 방탕한 모습도 보여주고 사업가로 보이기 위해 씀씀이도 큰 것처럼 위장하거나 어떤 때는 피눈물도 없는 장사치로 보여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독립운동가로서 안희제 선생은 그 역할을 완벽히 진행한 대단한 연기력을 가진 인물이자 고결한 양심의 소유자였다. 이를 증명하는 가슴 뜨거운 일화가 있다.

“최선생, 그간에 얼마나 고초가 많으셨습니까? 이렇게 많은 돈을 기탄없이 보내 주시다니…, 나라와 겨레를 구하고자 하신 최선생의 높은 뜻에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요!”

김구 선생이 최준 선생의 두 손을 굳게 잡으면서 한 말이다.

“천만에요. 저는 기껏해야 눈먼 돈이나 댔을 뿐이지러요. 목숨을 걸고 싸우신 분들이 아이랐으믄 이런 일이 가당키나 했겠는기요

최준 선생 역시 김구 선생의 손을 마주 잡았다. 굳게 잡은 두 손이 뜨겁게 떨렸다.
1945년 11월 어느 날, 경교장(京橋莊). 백범 김구(白凡 金九 1876~1949)선생이 집무를 시작하자마자 꼭 만나고 싶다며 최준 선생을 초대했다.

“제가 찾아뵈어야 도리이나 뜻밖에도 나랏일이 힘들고 많아 찾아뵙지 못 합니다. 다만 조국 독립에 너무나 큰 공을 세우신 분이라 꼭 뵙기를 청하오니 왕림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최준 선생을 초대하는 김구 선생의 말이 지극히 겸손하고 조심스러웠다는 것이 할아버지 문파 선생의 후일담을 들은 최염 선생님의 회고다.

김구 선생이 최준 선생을 만난 것은 경교장 2층 서재였다. 별도의 응접실이 있었으나 굳이 이곳을 택한 이유는 김구 선생이 최준 선생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던 장부가 보관되어 있어서였다.

문파 선생을 만난 백범은 여러 가지 면에서 고마움을 전했다고 한다. 가장 먼저 임시 정부에서 재무부장과 의정위원을 지낸 동생 최완 선생에 대한 치하였다. 38세의 젊은 나이에 일경에게 잡혀 순국한 최완 선생은 경주최부자댁 독립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뜻을 함께 한 동지의 죽음은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친 백범에게 뼈아픈 사실이자 마땅히 챙겨야 할 인사였을 것이다. 이어 백범은 거액의 자금을 아낌없이 마련해서 보낸 정성에 대해 치하하면서 두터운 장부 하나를 문파 선생에게 건냈다.

그것은 백산 안희재 선생이 문파 선생으로부터 받아서 건넨 독립자금을 기록해 둔 장부였다. 문파 선생은 굳이 그것을 볼 일이 아니라 믿었지만 백범이 내미는 장부에서 묘한 기운을 느끼고 장부를 펴들었다. 거기에는 백산이 목숨을 걸고 배달한 독립자금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그런데 단순히 독립운동 자금을 넘긴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한참을 장부를 넘기던 문파 선생은 계절에 맞지 않게 땀을 흘리는가 싶더니 급기야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남쪽을 향해 길게 탄식했다. 어찌나 한 맺힌 탄식이었던지 샘솟는 눈물조치 억제하지 못했다. 백범이 놀라서 연유를 물었다. 잠시 진정을 취한 문파선생이 사연을 설명했다.

“저는 백산이 독립자금을 전하는데 오만 고생을 다 겪었다는 거를 안 봐도 압니다. 제 생각에 그 무서운 감시 속에서 돈을 전달할라카믄 욕도 마이 보고 돈도 만만차이 들었을 끼시더. 그라이 제가 보낸 돈이 다는 몬 갔을 끼고 그중에 한 3분지 2나 반쯤만 갔을 끼라고 생각했지러요. 그런데 오늘 보이까네 내가 보낸 돈이 거진 다 임시정부에 전달이 대 있네요. 백산이 목숨을 걸고 이래 정직하이, 이래 성실하이 돈을 전달했는데 나란 사람은 편안히 앉아가서 눈꼽만치라도 백산을 믿지 못했으니까 나중에 죽어 저승에 가믄 그때 백산을 어떻게 볼지 걱정입니다”

말씀을 마친 문파 선생은 다시 백산이 묻힌 의령으로 짐작되는 남쪽을 보며 또다시 애통해 마지 않았다.

“백산, 백산, 내가 죽어 저승에 가면 백산의 얼굴을 어떻게 본단 말이고!!”

문파 선생의 구슬픈 탄식에 백범 역시 진심으로 감탄하며 함께 눈시울을 붉혔다. 문파 선생을 만난 백범은 이렇게 만난 차에 앞으로 해방된 나라를 위해 함께 좀 더 뜻있는 길을 함께 걸어보지 않겠느냐 권유했다.

“최선생, 이제 해방이 되었으니 최선생 같은 지사들이 나서서 나라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저랑 함께 손을 잡고 우리나라를 제대로 바로 세울 수 있도록 참여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를테면 함께 정치를 해보자는 제안이었던 것. 그러나 문파 선생은 잠시의 틈도 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정치는 저 같은 촌 무지랭이들이 하는 게 아이시더. 저는 따로 생각해 둔 게 있으이까네 마, 제가 하고접은 대로 할랍니더. 김선생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을 위해가 젤로 고생을 마이 하신 분이까네 우야든동 보중해가 이 나라를 반석에 올래 주이소”

그렇게 백범을 떠난 문파 선생과 백범의 만남은 그 후로 두 번 다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방 후 또 다른 외세에 의해 조국이 분단되고 온갖 이념이 동족을 나누는 와중에서 백방으로 국민의 안위만을 생각하며 뛰던 백범이 문파 선생을 만난 바로 그 경교장에서 우익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짐작되는 육군 소위 안두희의 총탄에 의해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김구 선생이 돌아가신 75년 후, 역사 바로 세우기 시작한 증손자 김용만 하남을 후보

그로부터 75년이 지난 2024년 3월, 제2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김구 선생의 증손자 김용만 씨가 더불어민주당의 ‘역사바로세우기’의 대표 주자로 인재영입되어 경기도 하남에 전략공천되었다. ‘The 큰 바보 경주최부자’ 작가인 내가 사는 ‘하남을’ 선거구가 바로 김용만 후보가 공천된 곳이다. 정치적 이념을 떠나 이 기막힌 인연은 최준 선생과 김구 선생의 안배라 여겨졌다. 더구나 현 정권은 상해임시정부의 정통성을 훼손하고 독립운동의 영웅 홍범도 장군을 비롯, 김좌진, 박승환, 안중근, 이회영, 지청천 장군의 흉상을 육군사관학교에서 철거하겠다는 어이없는 결정을 내린 와중이었다.

김용만 후보에게 찾아가 할아버지 김구 선생과 마지막 경주 최부자 최준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니 김용만 후보가 숙연해하며 경주최부자를 제대로 알고 싶어 했다. 김용만 후보는 이번 선거의 승패여부와 상관없이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의 존엄을 세우고 역사를 바로잡는 작업에 헌신하겠다고 다짐했다. 그중에는 경주최부자의 아픈 질곡도 반드시 포함될 것이라 믿는다. 최준 선생의 헌신과 김구 선생의 인연이 이로써 다시 이어질 것이다!

재미있는 우연 하나, 김구 선생이 백성을 위하고 나라를 도탄에서 구하겠다며 동학에 입교한 것이 1912년, 김구 선생이 37세 때다. 김용만 후보가 역사 바로 세우는 정치인이 되겠다고 출사표를 던진 올해 나이 37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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