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윤의 절터 기행[3] 경주 장항리 절터

이름 없는 절터, 금강역사가 지키는 두 탑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4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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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함산 자락, 노루 ‘장(獐)’, 목덜미 ‘항(項)’, 장항리 절터

해발 745m의 토함산(吐含山)은 경주의 동쪽을 수호하는 산이다. ‘머금었다 토해낸다’는 뜻으로 신라 때부터 동악(東嶽)이라 부르며 진산(鎭山)으로 신성시했다. 토함산이 동쪽으로 뻗어가는 능선 그 어디 즈음에 이름 모를 절터가 있다. 토함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는 장항리 절터 앞을 지나 대종천과 섞여 감은사 터를 적시고 문무대왕릉이 있는 동해로 간다. 골짜기 중 골짜기, 아는 사람만 찾아간다는 곳.

해가 기우는 늦은 오후, 감포로 가는 구불텅한 옛길을 따라 토함산 자락 어디까지 오르니 장항리는 벌써 그늘에 들었다. 사찰 이름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학자들은 ‘장항리(獐項里)’라는 마을 이름을 따 ‘장항리 절터’로 이름을 붙였다. 노루 ‘장(獐)’, 목덜미 ‘항(項)’, 장항은 ‘노루목’을 뜻하는 지명이다. 마을로 들어서는 입구가 노루목처럼 가늘고 길어서일까, 아니면 이곳에 노루가 많아서일까. 아니면 노루 눈빛처럼 순둥순둥하고 선한 사람들이 살고 있어서일까. 무엇이 이름 없는 절터의 이름이 되었는지 모르나, 인적 드문 곳을 찾는 객에게 아주 간간이 어린 노루가 나타나 힐끗 쳐다보고는 나무숲 사이로 사라지곤 했다.

해가 넘어간 산골짜기엔 묽은 어둠이 먼저 내린다. 뒤이어 스산한 바람마저 불면 어떤 쓸쓸함까지 더해져 마음을 내려앉게 한다. 돌아갈까, 아니다. 멈출 수 없는 건 실루엣을 드러내는 산 능선 아래, 불그스름한 빛으로 존재를 드러내는 탑을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비워진 공간이 어두워서 더 환해지는 저녁의 처연함은. 비워진 듯 채워진 절터만의 느낌일 것이다. 아침이 건 저녁이 건, 사라진 산중 절터의 분위기를 안다면 누구라도 결코 쉬이 돌아나가지 못할 것이다. 가던 길 멈추고 먼발치서 석탑의 상륜부만 바라보다 뭣에 홀린 듯 탑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자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봄비가 넉넉히 내린 터라 겨우내 말랐던 계곡이 여유롭게 흐른다. 물길을 건너가는 일, 이쪽을 등지고 저쪽을 향해 가는 일이다. 번뇌로 가득한 속세를 잊고 자비와 평화가 깃든 부처의 세계로 가는 일이다. 그렇게 물길을 건너가는 건 마음을 비우고 비우는 일이다.

산기슭을 두른 풀마다 기운이 치솟고, 절터를 돋운 벼랑 언저리마다 이 작고 가녀린 풀들이 돋고, 이 풀에 꽃이 피니 산천이 무릉도원처럼 몽글거린다. 모든 걸 다 기록할 수는 없지만 숲 사이로 들리는 짐승 우는소리, 나무를 잠재우는 어둠, 무른 것과 단단한 것을 만지고 온 바람에 이르기까지 여기서 만은, 여기서 만은 모든 게 혼몽에 젖는다.


↑↑ [동탑과 서탑] 1923년 도굴꾼들에 의해 무너지고 크게 훼손된 두 탑, 복원 후 국보(제236호)로 지정된 서탑(우, 앞)과 지붕돌만 오층으로 쌓아놓은 동탑(좌, 뒤)


절터 지키는 두 탑 중 서탑은 국보

장항리 절터에 올라서면 오직 나는 이 봉우리의 주인이 된다. 산봉우리 하나 싹둑 잘라 부처를 모실 사찰을 얹었으니 이 얼마나 귀한 땅인가. 누가 여기에 산을 깎고 탑을 세우고 부처의 나라를 만들었을까.

경주는 신라의 수도였다. ‘사사성장 탑탑안행(寺寺星張 塔塔雁行)’ 발길 닫는 곳마다 절이 많았다. 그러기에 지금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절터도 많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황룡사 터를 비롯해 너른 터를 자랑하는 절터들도 있다. 장항리 절터는 매우 좁다. 겨우 금당 하나 들어설 만큼의 넓이다. 그러나 절터의 넓이보다 석탑의 웅대함에 넋을 놓고 만다. 불가에서 탑은 엄숙한 존재다. 사람들은 탑을 향해 부처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했고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복을 빌었다.

달라도 너무 다른 두 탑의 인상은 매우 강렬하다. 붉을 빛을 내며 미끈하게 하늘을 향해 치솟은 서탑, 그리고 시루떡을 피라미드 쌓듯 쌓은 동탑. 다소 엉뚱한 모습의 동탑은 경주를 돌아다니며 익숙해져 있던 탑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충격적이라는 말, 바로 이 동탑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몸돌 하나에 다섯 개의 지붕돌을 켜켜이 얹어 놓은 것이 전부다. 대체 왜 이런 부족한 모습이 되었을까.



도굴범 손길 피하지 못한 두 탑과 석조여래불

장항리 절터는 경주 시가지에서 깨나 외곽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니 사람들의 관심이나 관리를 받지 못했다. 1923년 도굴꾼들은 두 탑 속에 든 사리장엄구와 불상의 복장물을 탐했다. 커다란 돌로 만들어진 탑과 불상이 꿈쩍도 하지 않자, 근처에 있는 금광에서 폭약을 가져와 폭파했다. 폭약의 위력을 견디지 못하고 탑과 불상은 깨지고 넘어져 풀밭을 구르거나 계곡 아래로 떨어졌다.

석불을 비롯한 두 탑은 크게 파손되었다. 무엇보다 동탑이 큰 타격을 입었다. 계곡으로 굴러떨어진 동탑은 거센 계곡 물살에 유실되어 동해로 흘러갔을 것이다. 1965년 계곡에 떨어져 있던 잔해를 수습해 복원하였으나, 몸돌 하나에 지붕돌 다섯 개가 전부였다.

 결국 있는 것만 쌓아 지금의 모습으로 남았다. 일반적인 석탑에 비해 불균형한 모습으로, 보는 이들로 하여 충격적인 모습으로 남게 된 이유다. 석불은 경주박물관으로 이전되었고, 절터 풀밭에 넘어져 있던 서탑은 비교적 온전하게 복원되었지만 상륜부엔 노반만 남았다. 서 오층석탑은 국보(제236호)로 지정되었다. 서탑을 복원한 이는 일본인 후지시마 ​가이치로(藤島亥治郞)였다. 그는 복원 당시 다수의 상륜부 부재들을 찾았으나 당시는 복원하지 않았고, 이후 이 부재들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른다고 했다.

서 오층석탑은 상처가 있기는 하나, 가늘고 시원한 모습을 되찾았다. 상층과 하층의 기단은 여러 개의 판석을 깔았고 기단 모서리에는 우주와 탱주를 새겼다. 위로 올라가면 갈수록 점점 좁아지는 지붕돌이 균형을 유지하며, 지붕돌 모서리 끝은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다. 아이의 해맑은 입꼬리 같기도, 깍쟁이들의 눈꼬리 같기도 하다.


↑↑ [서탑에 조각된 금강역사상] 두 탑 몸돌에 새겨 놓은 금강역사상은 사악한 것이 성스러운 부처의 세계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수문장 역할을 한다. 서탑에 새겨진 금강역사상은 예술성이 뛰어나다.


탑에 새겨진 예술성 뛰어난 금강역사상은 사악한 것 막는 수문장

동탑과 서탑 모두 몸돌 각 면에 문(門)을 새기고 문 중앙에는 용의 얼굴과 문고리를 도드라지게 조각했다. 문을 중심으로 좌우에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을 새겼다. 인왕상(仁王像)으로도 불리는 금강역사는 인도에서 유래된 것으로 사찰의 문이나 입구를 지키는 1쌍의 천부신장상(天部神將像)이다.

보통 좌우에 무서운 표정을 하고 마주 보며 서 있고, 머리에는 정수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두광(頭光)이 표현돼 있다. 커다란 눈알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부리부리하고,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몸을 자랑하기도 하는데 금강역사는 그 자체만으로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사악한 것이 성스러운 부처의 세계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수문장 역할을 한다는 의미다.

사람들은 금강역사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동안의 잘못을 뉘우치며 앞으로는 착하게 살겠노라 손을 모으고 몸을 숙여 다짐하게 된다.

입을 벌리고 한 손에 금강저와 같은 무기를 들고 있으면 아금강상(阿金剛像), 입을 꽉 다문 채 주먹으로 권법의 자세를 취하고 있으면 음금강상(吽金剛像)이라고 한다.

금강역사상은 장항리 절터 석탑의 독특한 특징이다. 전체 비례가 균형이 있고 기술적인 면에서도 뛰어나다. 다만 동탑과 서탑에 새겨진 인왕상은 서로 다른 석공의 솜씨로 보인다. 서 오층석탑의 인왕상은 굉장히 정교하고 사실적이다. 인왕상이 밟고 있는 연화좌(蓮華坐)는 세련미를 더한다. 누구의 솜씨인지 예술적 감각이 경지에 오른 듯하다.
그러나 동 석탑의 몸돌에 새겨진 인왕상은 세밀하지 못하고 뭉툭하고 투박하다. 이목구비마저 다소 느슨해 다듬다가 만 듯한 모습이다. 인왕상이 딛고 있는 것은 연화좌가 아닌 사각의 어떤 받침으로만 표현됐을 뿐이다.

↑↑ [불상대좌 사자부조] 사자의 용맹함은 없고 천진난만하고 익살스럽기만 하다.


불상대좌 익살스런 사자 모습에 찾는 이들 흐뭇

금당지에 놓인 불상대좌는 누구라도 올라와 부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라는 듯 풀밭에 휑하니 놓여있다. 거대한 돌덩이도 부처를 모시는 대좌가 되어 어느 한 시대를 평정했겠지만 세월을 비껴갈 수 없었다. 부처는 없고 몸뚱이엔 굵은 금이 쩍쩍 갔다. 아랫단은 팔각으로 조각을 했고, 윗단은 연꽃을 조각한 원형이다. 대좌엔 사자 부조를 새겨 놓았는데 그 모습과 표정이 얼마나 귀엽고 익살스러운지, 하루 종일 마주하고 앉아 놀아도 지겹지 않을 듯하다. 누군가를 향해 한 대 칠 듯한 모습이지만 그렇다고 무서운 것은 아니다. 사자의 용맹함은 없고 그저 익살스럽기만 하다. 이래서 보살을 지킬 수 있겠냐고 묻고 싶다.

탑 뒤에는 흙을 돋움을 한 금당 터가 있다. 장항리 절터는 회랑이나 강당이 없는 단칸의 암자가 아니었을까 싶다. 절터 뒤쪽은 가파른 산이고 앞쪽은 절벽의 계곡이니 또 다른 건물을 상상해 낼 여지가 없다. 굳이 생각하자면 서탑 옆으로 단칸의 움막 정도는 가능했을 것이다.

장항리 절터는 인간의 욕심과 무지함으로 불행을 기억하는 비운의 절터다. 시원스레 하늘을 이고 선 서탑과, 몸돌 하나에 지붕돌만 얹은 동탑, 그리고 주인 없는 대좌만 덩그러니 풀밭을 지키고 있는 늦은 오후, 나는 홀로 부처의 세계에 든 채 풀밭에 서 있다.


박시윤 답사기행에세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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