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최부자는 언제부터, 나눔과 상생을 실천했을까?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4월 11일
공유 / URL복사
↑↑ 이조리에 조성된 최부자댁 상생을 표현한 동상.

↑↑ 박근영 작가
경주최부자가 유명해진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역시 최부자댁 조상님들이 대를 이어오며 ‘나눔’과 ‘상생’이란 사회적 기능을 실천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그게 한두 대나 몇십 년정도가 아니고 최소한 10대 300년 가까운 세월을 이어온 것은 세계사에서도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최부자댁이 이렇게 나눔을 실천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고 어떤 이유에서 비롯된 일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최국선(1631~1681) 공 때부터이다. 최국선 공은 소작인들에 대해서 당시로서는 파격적이기 이를 데 없는 반분작, 즉 50:50의 배분을 처음으로 실천하고 가난한 소작인들을 위해서 장리쌀 장부를 불태우고 적극적으로 빈민을 구제하기 시작한 분이다. 그러면, 최국선 공이 이런 결단을 내린 데는 어떤 계기가 있었을까? 이에 대해 최부자댁에서 정통으로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 최국선 공은 조상 전래의 고향인 이조리에 정착하고 이앙법과 개간사업으로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반분작을 한 것은 아니고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도 특별한 혜택을 주지 않았다. 다만 천성이 인자하여 박하지 않은 대우는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올해부터는 단갈림이다” 말을 마친 국선 공이 장리쌀 장부를 훨훨 타는 놋화로에 처넣어버렸다.

그러던 어느 해, 이조리에서 명화적이 일어나 국선 공에게도 들이닥쳤다. 명화적은 밤에 횃불을 들고 화적질을 하는 패거리를 일컫는다. 명화적들이 화적질할 때는 특정 동네에 가서 그 동네가 쑥대밭이 되도록 약탈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그날 일어난 명화적들은 마치 목표를 정해 놓은 듯 동네의 다른 집은 대충 털어내는 시늉만 했을 뿐, 국선 공 집만 들이쳤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곳간에 들어 있는 곡식과 옷감들은 털렸으나 목숨을 잃거나 다친 사람이 생기지는 않았다.

이때 국선 공 눈에 띈 것이 있었다. 명화적들은 보통 복면을 하고 설치기 십상인데 그날 명화적들은 마치 내놓고 약탈하러 온 듯, 복면조차 하지 않고 집안을 털어댄 것이다. 게 중에는 국선 공에게 낯익을 얼굴들도 꽤 보였다. 그것은 잡아갈 테면 잡아가 보라는 말과 다름없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이튿날 추포를 피해 그날로 어디 멀리라도 달아날 각오까지 했다는 말이다.

명화적들이 물러난 다음 국선공은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심했다. 비록 그간에 선업(善業)을 베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소작인들과 이웃들에게 소홀하게 대한 적이 없는데 왜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더구나 장리쌀을 내주면서도 남들보다는 이자를 낮게 해 주었고 야박하지 않게 대해 왔었다. 도대체 어디에서 문제가 생겼을까?

며칠 고민하던 국선 공은 중대한 결단을 내린다. 이 일을 관가에 고발하는 대신 처음으로 부에 대한 원론적인 결론을 내린 것이다.

‘곳간에 채워 둔 곡식들은 한 차례 명화적 난동으로 대부분 거덜 나고 말았다. 부를 유지하는 것이 이렇듯 허망하다면 애써 곳간을 채워놓을 이유가 없다. 내 대에 부자로 살다가 내가 죽고 나면 이 부가 어떻게 소멸될지 알 수 없다. 대부분 부자들이 삼대 넘기기 힘들다고 하는데 그 이치는 너무나 분명하다. 부자가 된 사람은 근검절약하고 절치부심해서 부를 쌓지만 그 아들 대에서는 자기가 피땀 흘려 이룬 것이 아니니 기껏해야 유지하기에 바쁘고 그 손자 대에서는 어릴 때부터 귀하게 살아 흥청망청 쓰는 데만 급급할 것이니 당연히 쪽박신세를 면하기 어려운 것이다. 더구나 이렇게 화적이 일어나면 흥청망청할 일도 없이 하루아침에 패가망신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이 국선 공의 마음에 들어앉았다. 또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사람들이 복면도 하지 않고 집안을 쫓아다닌 것이었다.

‘화적질하다가 잡히면 여지없이 목숨이 달아난다. 화적질은 보통 화적질의 대상이 양반이나 부호이므로 이는 단순한 도둑질이나 강도짓이 아닌, 체제에 대한 반동으로 해석되어 작당하는 것만으로도 역모에 준해 엄히 처벌한다. 그러니 얼굴을 내놓고 화적질하는 것은 목숨을 가져가라는 것과 다름없다. 얼마나 맺힌 한이 많았으면 얼굴 팔리는 것도 개의치 않고 화적질에 여념이 없었을까? 따지고 보면 얼굴까지 드러내 놓고 준동한 동리 백성들은 가난과 굶주림에 몰릴 대로 몰린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먹을 게 없어 굶어 죽으나 화적질하다 잡혀 죽으나 다를 바가 없다고 여겼으니 얼굴까지 다 내놓고 화적질을 한 것이 아닐까?’

한때의 배부름을 위해 목숨까지 내건 사람들의 절박한 심정이 국선 공의 가슴에 가 닿았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이렇게 해서는 농사를 짓고 곡식을 모아 놓을 이유가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또 이런 일을 사전에 방지하려면 이웃 백성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적선지가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 선을 쌓는 집이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기는 법이다. 국선 공은 마침내 자기 혼자 가지던 부를 주변과 나누어 가짐으로써 오래 유지하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낸 것이다.

이튿날 국선 공은 사랑채 마당에 소작인들과 동리사람들을 불러 모으고는 중대한 발표를 했다. 사람들이 모일 때쯤 방 안에 있던 놋화로를 가져와 마당에 꺼내놓고 불부터 폈다.

“앞으로 소작제는 단갈림으로 하겠다!”

단갈림은 앞서 설명했듯이 반분작 50:50의 분배다. 국선 공의 선언에 소작인들이 어리둥절해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국선 공은 다시 한번 단갈림을 하겠다고 힘주어 선언했다. 그런 다음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장리쌀 문서를 가지고 와서는 한 장 한 장 불구덩이에 처넣기 시작했다.

“보다시피 이거는 작년에 빌려 간 장리쌀 문서들이라. 이제 다 불구덩이에 들어 갔으이까네 올해부터는 아무런 근심 말고 농사들 잘 지어서 다 같이 배 불리 농갈라 묵자꼬!”

국선 공은 또 지난밤 털리고 난 뒤에도 곳간에 남아 있는 쌀 중에서 몇 석을 꺼내와서는 멍석 위에 풀어놓고 동리 사람들이 알아서 조금씩 퍼가도록 하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런 국선 공의 결정에 소작인들이 환호하고 눈물 흘렸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국선 공은 이렇게 함으로써 화적질한 사람들을 크게 용서하는 한편 소작인들에 대해서는 일거에 덕을 베풀고 굶주림과 장리쌀 빚에 쫓기던 사람들에게도 인심을 쌓은 것이다. 그리고 이런 약속을 이듬해부터 정확하게 지켰고 이후로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는데도 적지 않은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가르침을 아들인 최의기(1653~1722) 공에게 철저히 훈육하고 후세에 본보기로 남겨서 ‘함께 잘 사는 길이 오래 잘 사는 길’임을 분명하게 가르친 것이다. 그래서일까? 국선 공 이후 최부자댁에 대한 평가가 훨씬 더 좋아졌고 화적이 일어도 최부자댁에 대해서는 함부로 약탈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더 중요한 것은 후세의 최부자들이 국선 공의 뜻을 대를 이어오면서 실천했다는 것이다.

국선 공이 백성들의 어려움을 돌보기 시작한 것에 대해 항간에는 어느 스님의 충고가 있었다는 말이 알려져 있기도 하다. 국선 공과 친한 어느 노스님이 부자가 된 국선 공에게 “재물은 쌓아두면 썩어서 버리거나 구린내를 풍기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 뿌리면 거름이 되어서 나에게 다시 돌아온다”고 훈시했고 이에 크게 깨달은 국선 공이 소작인들과 백성들을 돌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얼핏 그럴듯해 보이지만 이것은 누군가에 의해 지어진 이야기일 뿐 최부자댁에 전해오는 말은 아니라는 것이 최염 선생님의 분명한 결론이었다. 그러나 최부자댁의 오랜 나눔을 해석하는 이야기이고 재물을 나누면 그것이 다시 돌아오지는 않아도 백성들에게 거름이 되는 것은 분명하니 좋은 해석이라 여길 뿐이다.

그런 한편 국선 공의 대오각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후세의 최부자들이 국선 공의 뜻을 소홀하게 여기지 않고 대를 이어오면서 실천했다는 것이다. 특히 다음 대인 의기 공은 나눔과 상생의 정신을 매우 구체화한 분이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의기 공은 금강산에 유람 가 그곳에서 유명한 스님의 법문을 듣고 비우고 채우는 마음을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이야기는 뒤에 따로 소설로 풀어 놓았으니 그 소설을 공개되면 더 재미 있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최부자댁은 재산이 오래 이어진 것도 놀랍지만 그보다 더 대단한 것이 최부자댁의 훌륭한 가르침이 후세에 고스란히 전달된 것이다. 더구나 그 가르침이 10대나 내려오기는 더더욱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최부자댁은 손이 귀해 중간에 두 번이나 양자를 들인 적도 있어서 그 뜻이 퇴색할 법도 했는데 오히려 양자로 들어온 최부자들이 더 공고히 선대의 뜻을 이어 왔기에 문파 선생님에 이르기까지 부를 유지하고 그 가르침을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에 그 중간에 어느 한 분이라도 선대의 가르침을 소홀히 여겼거나 후대에 훈육을 게을리 했다면 우리가 아는 경주최부자댁의 찬란한 전통이 세워질 수 없었을 것이다.

X
URL을 길게 누르면 복사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