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보는 ‘孝子, 烈女碑(효자, 열녀비)’[4] 현존 최고(最古) 효자비 ‘손시양 정려비’

충효동 지명 유래 ‘관란 이승정 정효각’
‘손시양 정려비’는 보물로 지정돼 관리

이상욱 기자 / 2024년 04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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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남시장 동편에 위치한 효자 손시양 정려비와

본지가 지난 1992년부터 ‘孝子, 烈女碑(효자 열녀비)’를 제목으로 연재한 고 함종혁(咸鍾赫: 1935~1997) 선생의 기사를 토대로 그 현장을 다시 찾아 점검한다. 함 선생은 1963년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경주에 부임해 경주의 문화재를 알리는데 주력했다. 함종혁 선생이 본지를 통해 전했던 경주지역의 효자, 열녀 이야기를 재편성해 선조들의 충효사상을 되새겨본다. 그리고 현재 효자·열녀비에 대한 관리 상황도 함께 점검해본다./편집자주

‘경주 황남동 효자 손시양 정려비(慶州 皇南洞 孝子 孫時揚 旌閭碑)’는 현존하는 효자비 중 가장 오래된 비다.

↑↑ 손시양 정려비 앞면에는 효자리(孝子里)라는 글자가 음각돼있다.
이 정려비는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제68호)로 지난 1963년 1월 21일 지정됐다.

지금은 황리단길로 널리 알려진 이곳은 황남시장에서 동쪽으로 20여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문화재당국의 관리 아래 잘 보존돼 오고 있는 이 정려비는 경주지역 효 사상의 상징이기도 하다.

현재 이곳을 소개하는 안내판에는 그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고려 명종 12년(1182년)에 세운 것으로, 현존하는 효자비 중 가장 오래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화강암 비석에는 사각기둥 모양의 몸돌만 있고 받침돌과 머릿돌은 없다. 앞면에는 ‘孝子里(효자리)’라고 크게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손시양의 효행과 비를 세운 경위가 기록돼 있다. 손시양은 고려 중기 사람으로 부모가 돌아가시자 초막을 짓고 각각 3년씩 묘소를 지킴으로써 자식의 도리를 다했다. 그의 효행을 동경유수 채정이 나라에 보고하니 나라에서는 마을에 정문(旌門, 충신, 효자, 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해 그의 집 앞이나 마을 앞에 세우던 붉은 문)을 세우고 큰 상을 내렸다고 한다. 원래 길가에 비석만 세워져 있었는데, 1977년에 지금 모습과 같이 비석을 보호하기 위한 보호각을 만들어 세웠다’고 기록돼있다.

↑↑ 경주신문 144호에 실렸던 정려비 사진.

함종혁 선생은 1993년 당시 본지 기고에서 손시양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손시양은 고려 명종 때 사람으로 행실이 바르고 부모에 대한 효심이 얼마나 많은지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묘소 옆에 움막을 짓고 3년 동안 부모가 살아계실 때와 같이 무덤 옆에서 함께 생활했다.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부모 무덤에 아침인사를, 또 아침·점심·저녁 식사를 지어 올리고, 밤이 되면 ‘안녕히 주무십시요’하고 하직 인사를 하는 등 부모가 살아있을 때와 똑같이 효행을 다했다.

아버지 3년, 어머니 3년, 도합 6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비바람이 불어오나 하루같이 시묘(侍墓, 부모의 무덤 옆에 움막을 짓고 3년간 사는 일)생활을 하면서 무덤의 봉분을 보살펴왔다. 명종 12년 동경유수가 이 같은 사실을 왕에게 상소해 려(閭, 마을의 문)에 정표(旌表, 어진 행실을 세상에 드러내어 널리 알림)함이 마땅하다고 간청했다. 왕은 쾌히 승락해 효자리비가 세워지게 됐다.

이 석비는 자연석을 방주형(方柱形. 네모진 기둥)으로 깨어 석면을 곱게 다듬지 않은 채 울퉁불퉁 자연 그대로 높이 194cm, 너비 61cm, 두께 33.5cm 크기로 세웠다.

비신 앞면에는 글자 간격 30cm의 ‘孝子里(효자리)’라는 세글자를 음각했고, 뒷면에는 5행의 해서 비문이 글자간격 5cm의 대자로 128자가 음각됐다. 뒷면 글은 손시양의 효행 내용과 정려비의 건립경위가 음각돼 있으나 마멸이 심해 13자가 판독되지 않고 있다.

비문에는 손시양의 효행을 널리 알려 백성들이 지켜야 할 효도정신을 고취시키려던 유서 깊은 비석으로, 노천에 방치돼 있던 것을 1977년 경주시가 기단을 설치하고, 목조기와로 된 보호각을 건립했다.

또 금석총람(金石總攬)에는 이를 신라효자(新羅孝子)라 했으나. 비문의(碑文意)로 보아서는 고려시대 비임이 틀림이 없는 듯하다고 경주시지(慶州市誌)에 기록돼 있다.

손시양 정려비는 고려시대 일반적인 비의 형식과는 달리 사각기둥 모양으로, 불교와 관련되지 않은 비문으로서 희귀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다음은 손시양 정려비 뒷면에 새겨진 비문과 그 해석이다. ▨은 글자가 마멸돼 판독되지 않는 부분이다.


里中有擧子孫其姓時揚其名▨▨▨▨▨其父允伯端坐而終葬于
州南冷泉寺之北山廬于墓隱守之三年服▨而去及其母死歸葬金
山中谷守墳又如是以▨人之事親之道▨州▨具是狀以聞其留主
留守以聞 上上嘉其孝行旌表門閭使▨▨▨欲爲後勸云
時大定二十二年壬寅十二月▨日 東京留守 蔡靖誌


마을에 한 거자(擧子)가 있으니, 손(孫)이 성이고 시양(時揚)이 이름이다. … 이고 그 아버지 윤백(允伯)이 단정히 앉아서 임종하니, 주(州)의 남쪽 냉천사(冷泉寺) 북산(北山)에 묻었다. 묘에 오두막을 짓고 묘를 지키기를 3년(三年)을 마치고야 그만두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심에 금산(金山)의 중곡(中谷)에 묻었는데, 묘를 지키기를 또 이전과 같이 하였다. 이로써 사람이 부모를 섬기는 도리[事親之道]를 다하였다고 하여 주(州)에서 이러한 상황을 갖추어 유수(留守)에게 아뢰니, 유수가 임금에게 아뢰었다. 임금이 그 효행을 가상히 여기시어 그 문려(門閭)에 정표(旌表)하였다.

때는 대정(大定) 22년(명존 12, 1182) 임인년(壬寅年) 12월▨일이다. 동경유수(東京留守) 채정(蔡靖)이 짓다.


↑↑ 첨성대 북편에 자리한 문호사 전경.


충효동 지명이 유래된 ‘관란 이승정 정효각’

첨성대와 인접한 곳에 한옥 건물이 있는데, 이곳이 문호사(汶湖社)다. 건물 바깥에 있는 비는 관란(觀瀾) 이승증(李承曾) 창의비(倡義碑)다. 문호사 내부에는 이승증을 기리는 사당과 정효각(旌孝閣) 등이 있다.

문호사는 조선 중기 성리학자 관란 이승정의 서원 유적지로, 공의 충효 정신을 받들기 위해 제향하는 곳이다.

↑↑ 문호사 내 ‘관란이선생정효각(觀瀾李先生旌孝閣)’

먼저 그의 정려각에 새겨진 효심에 대한 이야기다.
‘당시 본지 보도(제149호, 1992년 12월 28일자)에 따르면 이승정은 8세 때 모친상을 당해 3년간 현재의 충효동에 어머님의 무덤을 마련하고, 바로 옆에 움막을 지었다. 그리고 어머님이 살아계실 때와 같이 3년간 아침·점식·저녁 식사를 올리고 하루도 호곡(號哭, 목 놓아 슬피 움)을 그치지 않았다.

그의 효행이 얼마나 지극했던지는 당시 도적들도 이곳을 피해 다녔다.
팔용(八龍)의 도적 떼는 각 읍면에 출몰해 백성을 죽이고 아녀자를 겁탈하며 양곡을 약탈하고 다녔다. 하지만 이승증이 시묘살이하는 묘역을 지나면서는 ‘여기는 효자가 있는 곳이니 경거망동한 행동을 하지말라’고 하며 무리를 거두어 피해 다녔다.

이 같은 효행이 하늘에 닿았는지 호랑이가 여막 앞에 짐승을 잡아다 물어 놓고 갔다고 한다.특히 지금의 충효동은 효자 이승증이 시묘하던 곳이라 해 마을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 문호사 바깥에 있는 ‘관란이선생창의비(觀瀾李先生倡義碑)’
다음은 창의비 이야기다.
선조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우리나라를 침범해 오는 왜적을 방어하는 사람을 찾고 있을 때, 이승증은 78세 노구를 이끌고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진두지휘하고 왜적과 싸웠다.

그는 1558년(명종 13) 생원·진사시에 모두 합격해 나라에서 여러차례 관직에 제수했으나 끝내 취임하지 않고 후학 양성에 전념했다고 한다. 또 그는 혼자 힘으로 보문들에 보를 막아 물길을 열고 천여정보의 옥답을 만들었다.

창의비는 1972년 이승증의 임진왜란 때 국가의 위기를 극복한 충성심을 기리기 위해 창의로 추서하고, 당시 경주시장 등으로 구성된 창의비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해 건립했다.

선조는 후세 사람들이 그의 업적과 효행을 알 수 있도록 삼강록, 여지승람, 동경지, 유문집에 기록하도록 했다. 또 영조 26년(1750년) 효자로 정여(旌余)하고, 4칸 한식기와집의 비각을 건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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