립스틱 짙게 바르고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4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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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성철 교수
동국대 파라미타 칼리지
가수 린이 부른 〈립스틱 짙게 바르고〉는 달랐다.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고 마는/나팔꽃보다 짧은 사랑아 속절없는 사랑아/마지막 선물 잊어 주리라 립스틱 짙게 바르고” 전형적인 컨템퍼러리 알앤비(R&B) 보컬로서 매력적인 비음에 가성과 진성을 넘나들던 그녀 입에서 터져 나온 가사에 가슴은 찌릿했다.

트로트 가수로 자리매김한 그녀의 활동명 린(藺)은 물망초를 의미한다고 스스로 밝혔다. 물망초 꽃말은 ‘나를 잊지 말아요’다. 사람들 뇌리에 기억되고 싶은 가수의 바람이 이상하게 전달되었는지 나는 노래를 감상하는 내내 그녀 입술만 따라다녔다. 뜬금없이 ‘갈치 비늘(?)을 입술에 바르면 느낌이 어떨까’ 궁금해졌다. 빨간색 립스틱을 보고 물고기 비늘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대단한 능력이다.

주지하다시피 갈치의 은빛 펄(pearl)은 립스틱이나 네일 등 화장품 재료로 쓰인다. 반짝반짝 윤기 나는 화장품은 갈치한테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보통 갈치 은분은 복통을 일으킬 수 있어서 꼭 익혀 먹어야 한다. 회로 먹을 때도 은빛 가루를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이유다. ‘반짝거리는 립스틱은 그럼 먹어도 되나? 그렇다고 입술에 바른 걸 안 먹을 수도 없지 않을까? 여자들은 무지 힘들겠다...’ 궁금증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 도통 노래를 감상할 수가 없다. 자, 정신 차리자.

그 가수도 물론이거니와 그럼에도 여성들이 립스틱을 바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다. 흔히 입술은 심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입술이 붉으면 심장이 건강하다고 본다. 한의학에서도 ‘앵두 같은 입술’을 건강의 상징으로 여긴다. 혈액 속 헤모글로빈이 산소와 잘 결합하고 있을 때 입술은 앵두처럼 붉다. 양방에서도 빨간 입술은 혈액순환이 원활하다는 뜻으로 여긴다. 육체적으로든 심리적이든 빨간 립스틱은 우리 인간에게 매우 유익한 존재다.

이번에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립스틱이 발견되었다고 학계가 한껏 고양되어 있다. 자그마치 4000년 전의 립스틱이란다. 그것도 다른 나라도 아닌 이란에서 말이다! 이란이 어떤 나라인가, 이슬람 율법이 가장 성성한 곳이다. 지금도 공공장소에서는 여성들이 히잡을 착용해야 한다. 대학 진학이나 취업도 제한되어 있다. 혼인뿐 아니라 이혼을 하고 싶어도 남편의 동의가 없으면 할 수가 없다. 다양한 기본권과 자유가 제한받고 있는데도 희한하게 화장만큼은 관대하다. 세상 여성들의 보편적인 사회적 지위와 권력 상징과는 달리 이란의 립스틱은 남성들의 욕망에 일조하는 면이 없지 않다. 이번 이란에서 최고의 립스틱 발견은 그 자체로 상징적이다.

중국 최고의 섹시 입술이라면 누구라도 양귀비를 꼽을 것이다. 그녀에게는 ‘사람(당 현종)의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고 해어화(解語花)]라는 최고의 별명이 있다. 남아있는 기록이 없으니 절세미녀였는지 증명할 길은 없지만 아마 입술만은 붉디붉게 빛났으리라. 아니, 자기 며느리를 귀비(貴妃)로 삼았는데 나이 차이가 서른 살이 훌쩍 넘는 남편이라면 아내를 위해 명품 립스틱 정도는 사줘야 하는 거 아닌가! 당시라면 여자는 자신을 사랑하고 인정해 주는 사람을 위해 화장을 하고, 그 사람을 위해 모든 걸 바치는 걸 우선 덕목으로 여겼을 테니 당연하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터무니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한 아이돌 가수 입술이 하얗게 질린 사건이 벌어졌다. 공식적으로 사과문까지 게재하는 걸 보면 빨간 립스틱을 발라서 덮을 사안이 아닌 모양이다. “팬이 너에게 주는 사랑이 부족하니? 왜 팬을 배신하니? 사과하지 않으면 텅 빈 공연장을 보게 될 거야!” 팬들의 사랑을 배신(?)하고 연애를 했다는 사실에 화난 팬들이 쓴 문구다. 대상을 가려가며 립스틱을 발라야 한다는 경고장이 아닐 수 없다. 화장을 하는 이유는 개인의 선호나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아직 현실은 엄격하다. 아직도 ‘쌩얼’은 예의 바르지 않다고 느껴진다. 화장이 지극히 개인 단위의 영역인데도 말이다.
가수 린은 떨리는 목소리로 읊조린다. 

“내일이면 잊으리 꼭 잊으리 립스틱 짙게 바르고/사랑이란 길지가 않더라 영원하지도 않더라... 별이 지고 이 밤도 가고 나면/내 정녕 당신을 잊어 주리라” 

아무리 진하게 의지를 다진다 해도 립스틱은 언젠가 희미하게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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